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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소파를 두 번 죽이지 말라”

소파 방정환 아들 방운용 옹의 피끓는 절규

“내 아버지 소파를 두 번 죽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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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들 코묻은 돈으로 만든 동상이나마 있으니 이젠 됐어요. 더 이상 재단은 안 했으면 해요” 방정환재단의 파행으로 겪은 마음고생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팔순노인은 분노와 회한이 엇갈리는 표정으로 방정환재단이 파행으로 치달은 지난 2년을 회고했다.
지독한 황사(黃砂)였다. 방운용 옹(方云容·83)을 처음 만난 3월7일, 서울의 대기는 사람들의 눈과 목을 자극했다. 쌀쌀한 공기 탓에 더더욱 을씨년스럽기만 한 날씨였다. 방옹이 사는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주공아파트. 약속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각인데도 아파트 주차장에 미리 나와 기다리는 방옹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 방정환의 유일한 아들인 방옹은 말년에 얻은 아들마저 유학을 떠나보내고 노부부가 단둘이 살고 있다. 낯선 방문객의 손을 맞잡는 그에게서 누구라도 찾아오면 반겨줄 듯한 너그러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한때는 제 집 드나들듯 이 아파트를 출입했다는 이씨의 행적에 새삼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치밀었다.

첫 인터뷰에서 방옹은 피를 토하듯 이종찬씨와 세상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이씨의 범죄혐의를 입증할 만한 자료를 취재진에 한가득 챙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방옹은 배웅을 하겠다며 10분 거리에 있는 전철역까지 취재진과 동행했다. 그리고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3월13일 오전, 다시 방옹의 철산동 집을 찾았다. 일주일도 안 됐지만 그 사이 방정환재단사건에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경찰조사에서 혐의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던 이종찬씨에게 리베이트성 뇌물을 줬다는 증인이 나타나면서 수사는 급진전됐고 이씨의 구속은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 소식에 방옹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타일렀거늘…” 방옹은 이 말을 되풀이했다.



―이종찬씨의 공금 유용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제넘은 얘기인지 모르지만 세상 혼자 사는 게 아니니 어른들 공경하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나중에 돌아다니는 얘기 들어보니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예요. 명예를 훼손당한 사람도 적지 않아요. 그분들도 다 저명한 사람들이라 이종찬이에게 당하고도 어디 내놓고 말도 못 하고, 그러다 보니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지요. 처음엔 저도 아들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남들이 뭐라고들 하면 덮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래선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제2, 제3의 이종찬이 나오지 말라는 법 있나요.”

―이종찬씨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색동회 회장이던 윤극영 선생을 통해 인사를 했지요. 97년인가, 98년인가부터 우리 집에 출입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집에 올 때도 혼자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그를 안 믿게 되면서는 늘 다른 사람을 앞세우곤 했는데 재단이사장인 김명윤씨도 이종찬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 가운데 한 분입니다. 재단이사장인 김명윤씨와 이종찬의 관계는 훨씬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옹의 말대로 김이사장과 이씨의 관계는 뿌리가 깊다. 96년 김이사장이 ‘장한나후원회’ 회장을 맡을 때 이 이벤트를 연출한 이가 바로 이종찬씨였다. 오랜 인연 탓에 김이사장만은 이종찬씨의 사기 전력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방옹은 대답을 피했으나 옆자리의 부인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돌연 방옹은 미국 유학중인 외동아들 얘기를 꺼냈다.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애가 미국 가기 전에 그래요. 제발 이종찬이와 어울리지 말라구요. 그런데 이렇게 일파만파로 일이 커지고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서는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는 얘기를 안합니다.”

‘방정환재단 사건’의 가장 큰 정신적 피해자이면서 아들에게만은 근심거리를 전하고 싶지 않다는 부정(父情)에 공감이 가긴 했지만, 어쩌면 주위에 아무도 도움을 청할 가족이 없는 노인이라는 점을 상대가 악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건립예산만도 수백억원에 달하는 방정환기념관을 건립하겠다며 거창한 계획서를 들고 나타난 이종찬의 유혹을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살고 있는 노부부가 과연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처음 이씨는 소파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나섰다면서요.

“97년 봄인가 어느 날 밤에 알고 지내던 아동문학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색동회 사람들과 아동문학가 등이 현직 총리를 모시고 소파기념관 건립준비위원회를 만든다, 방정환기념사업회 모임을 갖는다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유족대표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라고 해 조찬모임에 나갔는데 이수성 총리, 김명윤 의원 등이 계셨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했지만 기념관이라는 게 여러모로 이용해야 하는 것이어서 실제 그 자체로는 그다지 쓸모가 없어요. 그저 일년에 한 번 돌아가신 분 추모식이나 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도 건물 유지비는 들어갑니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겠다며 이경재 전의원, 이동원 전의원 등이 인사차 찾아왔을 때도 저는 기념관 건립은 싫다고 했습니다. 어린이들의 순수한 돈, 한푼 두푼 모은 코 묻은 돈으로 마련한 아버님 동상으로 만족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든 미국이든 어느 나라를 가봐도 어린이를 위해 일하다 돌아가신 분을 기념해 작게라도 기념관을 운영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외국인들을 불러다 어린이 관련 행사를 해도 데리고 갈 만한 곳이 없지 않습니까. 어린이 관련 민간단체들도 사무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기왕 재단을 만들고 기념관을 세우겠다고 하니 가난한 어린이 관련 단체들이 모여 지낼 수 있는 공간이 되겠다 생각했지요. 저 자신은 재단이니 기념관이니 탐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건 분명히 해두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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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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