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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세종의 위업 살리려 나는 살았고 세종의 유훈 지키려 그는 죽었다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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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향한 절개인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선비의 절개와 지조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향한 절개요 지조냐가 더욱 중요했다. 태조 임금이 세우시고, 태종과 세종대왕에 이르러 기초가 닦인 이 조선왕조를 반석 위에 얹어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간사한 환관들이 힘을 얻고 더벅머리 선비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형국. 즉 “뱀을 손으로 움켜쥐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은 위태로운 형세”(신숙주, ‘제고화병십이절’)가 아닌가. 무엇보다도 세종께서 물려주신 “팔진도(八陣圖, 유비와 제갈량이 이룩한 위업)”를 계승해야 했다.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 위험한 때 당하여 명 받잡고 자기 한 몸 잊었네 /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니 /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신숙주, ‘제갈량’)

그 점에서 나의 조부 신포시(申包翅)의 판단은 옳았다. 조부께서는 끝내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킨 성삼문의 조상 성인보와 다른 길을 택하셨다. 당신은 고려가 망했을 때 잠시 은거했지만 세종의 정치를 보고 다시 출사하셨다. 이미 고려왕조보다 더 뛰어난 왕조가 탄생했는데, 굳이 왕(王)씨 가문에 절의를 지킨다는 것은 ‘독야청청하다’는 허명을 위한 일일 뿐이다.



특히나 매우 높은 수준의 위민(爲民)정치를 베푸는 군주가 나타났지 않았는가. 적어도 내가 배운 “인을 베푸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해야 하는” 군자는 특정 왕조나 군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존재가 아니었다. 모름지기 참된 군자는 “얼음 깨고 펄펄 뛰는 잉어를 얻는” 것과 같은 기상을 지니고, “나라의 안태(安泰)”를 우선시하며 “성은(聖恩)의 시절을 위해 마음을 다 바치는” 충성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신숙주, ‘보한재집’ 권12; 권9).

기상과 충성으로 말하자면 사실 김종서 대감만한 인물도 없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7년 동안의 함길도 근무에서 보듯이 성은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김종서 대감은 특히 6진(鎭)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임금의 지시를 받아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낼 방략”을 입안한 것에서 보듯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

조선 건국기의 북방 방위전략은 수비 위주의 ‘주진군(主鎭軍)체제’에서 공격과 수비를 병행할 수 있는 ‘익군(翼軍)체제’로의 전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세종임금 때 만들어진 새로운 방략은-나중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익군체제에 공격편제를 더욱 강화해 ‘적을 제압해 승리를 거두는(制勝)’ 공세적인 방략체제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김구진 외 ‘제승방략의 북방방어체제’ 1999, p.15).

1439년(세종21) 7월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대응할 방략을 자세히 갖추어 보고하라”(21/7/21)는 세종임금의 하명이 있었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 대감과 김 대감의 종사관(從事官)이던 나는 6진의 지리·지형을 자세히 조사한 끝에 그곳에 적합한 방략을 고안해 올렸다. 그것은 종래의 열진방어(列鎭防禦) 태세 외에 6진 대군분(大軍分)과 3고을 분군(三邑分軍)이라는 공격전술이 추가된 것이었다.

6진 대군분(大軍分) 편제는 큰 강(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오랑캐 지역을 공격할 때 사용되는 작전 지침이었다. 3고을 분군 편제는 정벌군이 만주에 투입되었을 때 전방의 정벌군을 계속 지원하거나 다른 오랑캐들이 후방지역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작전 지침이었다.

무엇보다 이 체제는 거미줄처럼 세밀한 연락망, 파수(把守), 복병 등을 통해 적진의 변화를 알리는 봉화체제를 그 생명으로 하고 있었다. 파저강 토벌에서 보듯이, 유사시에 조정에 긴급 연락하여 정벌군이 출동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지친(至親)과 자제라 하더라도 이 방략에 대해서는 완전히 비밀로 하라”(19/3/11).

세종임금의 특별 전지에서 보듯, 이 제승방략은 중대한 국가기밀이었다. 만약 이 기밀이 새나갈 경우 국가안보는 물론이고 자칫 왕실의 안녕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뒤의 ‘이징옥의 난’처럼 국가기밀의 누설은 곧바로 나라의 안태를 위협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幾而不密殆).

내가 보기에도 수비와 공격을 유연하게 전개하는 이 방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1460년(세조6) 7월 오랑캐 낭볼칸(浪兒罕)이 침입해왔을 때 주상께서는 나를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하면서 이 방략을 내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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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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