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21일 오후 11시45분 개성공단에서 남북 당국 간 접촉을 마친 김영탁 개성공단사업지원단장(앞줄 오른쪽)과 김남식 남북회담본부 회담기획부장(앞줄 왼쪽) 등 남측 대표단이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CIQ)를 통해 귀환하고 있다.
‘강성’이라는 참칭
정부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이 부분을 안보라인의 ‘참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가 강하다.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정책의 기조를 ‘전임 정부의 적폐(積弊)를 극복하는 것’으로 인식한 정책결정자들이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에 집착했다는 것.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 이후 청와대와 실무부처를 막론하고 정책방향 설정을 맡은 고위관계자들은 “노무현 정부가 박아놓은 대못을 뽑는 것이 급선무”라는 언급을 자주 남겼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과는 반대)’에 빗댄 ‘ABR(anything but Roh·노무현과는 반대)’라는 용어가 실무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강성’으로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평양의 도발에도 별다른 대응책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명박 정부는 ‘한 대 맞으면 절대로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스타일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같은 분위기는 1월17일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의 강도 높은 담화 발표로 서해북방한계선(NLL) 인근의 긴장이 고조되자 국방부가 청와대에 보고한 군사적 대응방안이 고스란히 언론에 유출되면서 정점을 찍었다.
북한에서 억류 중인 개성공단 직원 유모씨 문제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4월 하순 유명환 장관은 정례브리핑을 통해 “국제적인 노력을 통해서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이 문제를 유엔인권이사회에 제기하는 방안을 꺼내 들었다. 억류 장기화에 대한 나름의 대응방안 마련인 셈이다. 그러나 2주도 지나지 않아 이 얘기는 사실상 백지화됐다. 우선 상황 악화를 염려한 유씨 가족이 극력 반대한데다, 유엔에서 절차를 밟으려면 몇 달이 걸려 실효가 없다는 점도 뒤늦게 감안됐다는 후문이다. 여기에 북한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맞대응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정밀한 사전검토 없이 내걸었던 기치가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셈이다.
“정무가 움직였다”
“공직사회에서는 스태프 조직 사이의 장벽이 높다. 문제가 터져도 원래 그 업무를 담당했던 팀에서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능력이 부족하다면 아예 해당 직위의 사람을 바꾸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민간회사는 다르다. 원래 담당자가 제대로 못한다는 판단이 들면 CEO는 잠시 다른 자리에 있는 인물에게 상황을 바로잡을 임무를 맡길 수 있다. 그 인물의 소속이나 직급, 공식적인 담당업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위기에 빠진 프로젝트에 자신이 믿는 사람을 ‘소방수’로 투입해 어떻게든 살려놓는 건 민간회사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장 MB 본인이 정주영 회장 밑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배웠다.” (이 대통령과 친분이 깊은 경제계 원로인사)
흥미로운 것은 이후 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청와대가 전면에 나섰다는 점이다. 먼저 대통령 본인이 달라졌다. 혼선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한 것일까. 이 대통령은 4월 한 달 동안 2~3일에 한번 꼴로 안보관련 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지침을 내렸다. 외교안보라인에 속하지 않은 다른 수석실 관계자들의 움직임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 수습작업에 직접 뛰어든 형국이었다.
우선 개성공단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4월21일 열렸던 남북접촉 문제가 그 한 사례다. 당초 북측의 요구조건과 관련해 논란이 이어지자, 정부는 세부사항을 흘리며 상황 정리에 나섰다. 이때 나선 주체는 남북접촉의 당사자인 통일부 등 외교안보라인이 아니라, 대통령의 핵심측근으로 잘 알려진 청와대 고위관계자였다. 넓게 보자면 업무관련성을 주장할 수도 있는 직위에 있지만, 이전까지는 분명 안보사안에 관여한 적 없던 인물이었다.
PSI 발표연기가 결정된 4월15일 아침 안보관계장관회의와 관련해서도 ‘다른 라인’의 개입에 관한 후문이 끊이지 않는다. 당시 이 대통령의 연기 지시가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보고를 받은 뒤 이뤄졌다는 이야기가 그 하나다. 회의석상에서 연기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알려진 현인택 장관이 전날 밤 늦게 급한 호출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외교안보라인 이외의 참모들이 상황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청와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정무는 사실상 모든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분야에 상관없이 특정쟁점이 정치적 사안으로 비화할 여지가 있다면 이를 검토해 보고하는 것이 기본업무라는 것이다. PSI 문제나 개성 접촉과 관련해 청와대의 입장이 난처해졌던 만큼 충분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해석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이 무렵 이 대통령의 측근이나 대선참모 그룹이 “MB는 (대북정책에 있어) 절대로 강성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강경조치를 취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복조치를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감정적인 마인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는 정책방향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실용주의 마인드’가 요체라는 레퍼토리 역시 흡사 입을 맞춘 듯 반복적으로 제시됐다. 안보라인 고위 관계자들의 이전 설명과는 사뭇 차이가 있는 뉘앙스였다. 이를테면 ‘강성 참칭’의 수정작업인 셈이다.
평양은 알고 있다
외교안보라인의 주요인사들이 사석에서 ‘VIP와의 친분’을 유달리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최근의 논란으로 대통령의 신임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시선을 의식한 듯한 태도가 역력하게 읽혔다. 이른바 ‘외교부 헤게모니’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안보사안 실무에 청와대와 측근들이 직접 개입하게 된 것을 두고 정부 안팎에서 뒷말이 오가는 데 대해 안보라인의 핵심인사들 역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