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의 늦여름, 사람들은 평양을 주목했다. ‘9월 상순’으로 예정됐던 당대표자 대회를 통해 북한의 3대 세습이 현실화될지 모른다는 예측 때문이었다. 김정일의 셋째 아들 정은이 김일성과 김정일, 즉 만경대와 백두의 혈통을 잇는 3대 세습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물론 북한의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은 이제 시작일 뿐, 앞으로도 기나긴 과정이 남아 있다. 지금 당장에는 그 성공과 실패를 예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를 가늠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로 요약된다. 왜 셋째 아들인가. 김정일에게는 성혜림에게서 낳은 장남 김정남과 고영희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 김정철이 있다. 김정은은 고영희의 둘째 아들이라는 게 그간의 정설이었다. 더욱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결정되던 1970년대, 그는 삼촌인 김영주나 계모인 김성애, 이복동생인 김평일 등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장자 승계’라는 전통적 원칙의 덕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김 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 혹은 고영희의 첫아들인 김정철이 후계자로서 더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김정일은 막내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것일까.
장남을 제친 3남의 후계자 등극, 이는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그림이다.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에게 안정적인 보위를 물려주고자 치밀한 후계전략을 세웠다. 태종 자신이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골육상쟁의 피를 본 뒤 왕위에 올랐으므로 자신의 아들에게는 이 같은 불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1,2차 왕자의 난이 잘못된 세자(막내인 방석) 책봉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았다.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로 방석을 내세운 계모 신덕왕후의 외척들과 왕권보다 신권을 강화하려는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장자인 양녕대군에게는 이러한 문제점이 모두 내재해 있었다. 양녕대군 주변에는 태종의 부인인 민씨를 비롯해 외척세력인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있었고, 자신의 측근인 이숙번과 조영무 등이 이들과 강한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1404년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바로 2년 뒤 건강을 이유로 선위(禪位)를 선언한다. 선위는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철회되지만, 이후 계속된 태종의 선위 파동은 결국 태종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양녕대군의 즉위를 서둘렀던 민무구 형제의 죽음을 불러왔다.
태종은 1418년 장남인 세자를 폐위하고 삼남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의 선위를 통해 조선의 네 번째 왕인 세종의 즉위식이 열린다. 그러나 이때의 즉위식은 세종의 후계 구도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태종은 세종의 치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신의 창업공신 이숙번과 조영무 등을 쳐내고 충녕대군의 외척세력까지 제거함으로써 강력한 왕권을 아들 세종에게 물려주는 데 성공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선택이 세 아들 중 가장 충실한 아들을 선택한 결과인지 혹은 권력투쟁에 가장 능한 아들을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는 김정일이 자신과 얼굴과 체형이 닮은 김정은을 제일 마음에 들어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분명한 것은 김정은의 간택이 결코 우연일 리 없고, 철저하게 구성된 각본이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문제는 ‘과연 어떤 각본이냐’는 것이다.
이를 좀 더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우선 장자 상속이라는 대원칙을 버리고 셋째와 다섯째를 후계자로 택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삼성가(家)와 현대가(家)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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