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는 소왕의 소재를 찾아 헤매던 중신 신포서(申包胥)가 남루한 옷을 걸친 채 만나러 와 구국방안을 건의했다. 자기가 서북방의 강대국인 진(秦)나라를 방문해 공식적으로 지원요청을 하고, 그 나라 대군을 빌려 국내에서 재편 중인 저항세력과 합세하고 싶으니 재가해달라는 것이다.
소왕은 즉각 허가했다. 신포서는 증명서류를 휴대했을 뿐 마차 같은 최소한의 준비조차 없었다. 하여튼 신포서는 진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진왕 애공(哀公)에게 초국 소왕의 애절한 지원요청을 전달했다.
신포서 : “지금 잔인무도한 오군이 초나라 수도를 점령하여 학살과 약탈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오나라가 초나라를 완전 평정해 귀국과 접경하게 되면 귀국에도 적지 않은 외환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위급한 시각에 즈음하여 말씀드리건대, 초나라는 절대로 전 영토를 오나라에 탈취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바엔 자모님의 출신국인 귀국에 헌상하고 싶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하루 빨리 출병하셔서 이 영토를 차지해주십시오. 만약 대왕께서 오군을 격퇴한 후 거룩하신 인자함으로 초나라의 존립을 허락해주신다면 초나라는 대대손손 대왕님의 속국이 되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春秋左傳, 定公 四年).
애공 : “말씀을 경청했소이다. 특사께서는 우선 숙소로 가셔서 휴식하시오. 생각해보고 협의한 후 회답하리다.”
신포서 : “소신의 주군께서는 지금 유랑하는 신세로 몸을 편히 쉴 장소마저 없으신데, 소신이 어찌 숙소에서 안락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벽에 기대어 통곡했다. 울음소리가 밤낮을 이었는데 7일간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드디어 진나라 애공은 신포서의 일편단심 순정에 감동해 출병을 결심했다. 전차 500승에 병사 약 5만명을 출동시켰다.
형세 역전과 오군의 철수
한편 오왕 합려는 이 정보를 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충격은 이것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본국에서도 지급 경보가 날아든 것이다. 이웃한 월(越)나라 윤상(允常) 왕이 오군 유수 병력의 허약함을 틈타 대거 침입해 약탈·교란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오군의 급선무는 당장 눈앞에 출현한 진나라 대군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양군은 직(稷)에서 격돌했는데 오군이 크게 패했다. 이때 선본대를 이끌고 돌진하던 왕제 부개까지 참패했는데 그는 면목이 없었던지 본영으로 복귀하지 않고 본국으로 무단 귀국했다. 게다가 자립해서 왕위에 올랐다. 누군가 국왕이 초나라 원정으로 출타 중이니 왕위를 비워둘 수 없다고 꼬드긴 모양이었다.
더하여 오나라의 동맹국 중 당나라가 초군의 급습으로 수도를 빼앗기고 그 군주가 살해당했다. 또 다른 동맹국인 채나라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처한 오왕 합려는 대책회의를 거쳐 귀국을 결정했다. 대신 오자서와 손무, 백의 등을 초나라 땅에 남겨두고 뒷수습을 감당케 했다. 귀국한 합려는 부개를 토벌했다. 쫓기던 부개는 어제의 적이던 초나라로 망명하여 항복했다. 초나라는 그를 받아들여 보호하는 고등 정책을 썼다.
한편 오자서와 손무 등이 지휘한 잔류 부대는 전선을 축소했다. 수도 영을 포기하고 동정호 동쪽의 소택지대를 사이에 두고 적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본국 지리에 밝은 초군이 우회해 화공으로 엄습해왔다. 오군은 거듭 대패해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결국 합려는 초나라의 태반을 일시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면철수로 마침표를 찍은 꼴이다. 오직 오자서만이 전쟁국면을 이용해 개인적 복수를 했을 뿐 합려는 대전략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원인은 우선 후고(後顧)의 염려를 국내와 국경에 남겨둔 채 원정에 나섰다는 데 있었다. 다음으로는 점령정책과 개입예방 대책의 부재를 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