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사학자가 동양철학자 초청한 이유
인류 직면한 문제 해결 위해 세계 석학들 만나다
“내면 변혁, 인류의 숙명 전환”…SDGs보다 앞서
“핵 폐기 여부? 인간 의지에 달렸다”
인간 내면의 힘에 천착…“강인한 낙관주의 중요”
“무한한 가능성 지닌 대화, 해결 못할 문제 없어”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왼쪽)와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오른쪽)은 1972년과 1973년 영국 런던에서 만나 열흘 동안 대화를 나눴다. 세이쿄신문
두 사람은 1972년과 1973년 영국 런던에서 만났고, 열흘 동안 40시간 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 자리에서 토인비는 “인류는 과학기술의 힘에 취해왔다”며 “이제 절제할 지혜를 갖춰야 할 때”라고 말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이 문명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는 내면 수양을 중시하는 불교에 주목했는데, 이케다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헤어지던 날 토인비는 여러 저명한 학자의 명단을 건네며 “만나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2년 뒤 토인비의 타계로 이는 유언과도 같은 숙제가 됐다.
인류가 직면한 문제 해결 위해 세계 석학들 만나다
이케다는 토인비와 만난 이후 세계 각국 지도자와 학자, 사상가 7000여 명을 만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행보였다. “대화야말로 평화의 왕도”라는 신념 아래 이어진 이러한 대담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모색하기 위한 그만의 실천으로 볼 수도 있다. 이탈리아 출신 사상가인 아우렐리오 페체이와의 만남도 그 연장선이었다.토인비가 건넨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던 페체이는 세계적 연구·제언 단체 로마클럽의 창립자다. 로마클럽은 1972년 보고서 ‘성장의 한계’를 통해 인구 증가와 산업화가 기존 추세로 이어질 경우 식량 부족과 자원 고갈, 환경오염으로 100년 안에 인류가 한계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페체이는 “물질주의에 매몰된다면 인류는 파멸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다. 농업·과학·산업혁명을 거치며 인류는 자연을 개발하고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으나, 그 거대한 힘을 통제할 ‘정신적 성숙’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진단이다. 그는 인류가 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21세기에 지구는 불모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도 덧붙였다.
1975년 두 사람은 문제 해결의 종착지가 결국 ‘인간 내면’이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페체이는 “인간 안에는 지금까지 탐색도, 개발도 하지 않은 막대한 잠재력이 잠들어 있다”고 단언했다. 그간 인류가 외부 환경을 개발하며 문제를 해결해 왔다면, 이제는 내면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진단이다. 이케다 역시 “한 사람의 내면적 변혁이 한 나라의 숙명을 바꾸고, 나아가 전 인류의 숙명 전환까지 가능케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화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읽어도 낯설지 않다. 빈곤·환경 오염·불평등·전쟁 같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UN)이 추진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역시 ‘인간의 각성’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과 제도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없고, 개개인의 인식과 행동이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SDGs 논의의 핵심이다. 페체이와 이케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세기 앞서 짚어낸 셈이다.
“핵 폐기 여부? 인간 의지에 달렸다”
이케다는 교육과 반핵(反核)을 위해 평생을 힘써 왔다. 그는 교육에 대해 “인간에게 내재된 가능성을 끌어내는 일”로 평가했으며, 핵무기는 “수많은 이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문명과 노력을 단 한 번에 무(無)로 돌릴 수 있는 위협”으로 규정했다. 개개인이 가능성을 꽃피우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라면, 핵은 그 토양 자체를 초토화하는 존재라는 인식이다.이러한 철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관통한 개인적 체험에서 빚어졌다. 1930~40년대 군국주의 시절, 학생이었던 그는 교육이 본질을 잃고 전쟁의 도구로 변질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위해 학생을 길러내던 때였다. 학교는 배움의 터전이 아닌 병영이었고, 강당은 무술 훈련장으로 뒤바뀌었다. 1945년 패전과 함께 군국주의는 막을 내렸으나, 인류에게는 더 가혹한 과제가 던져졌다.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탄두는 단 한순간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며 생명의 존엄을 뿌리째 파괴했다.

이케다 회장(맨 앞 왼쪽)이 2006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안와룰 초두리 전 유엔 사무차장과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세이쿄신문
두 사람은 나아가 아이를 ‘가르침의 대상’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초두리는 “기성세대인 부모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부정적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주입하곤 한다”며 “부모가 아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편견으로부터 부모를 해방시킴으로써 부모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에 이케다도 “‘아이가 부모를 바꾼다’는 관점이야말로 사람의 의식을 변혁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라고 화답했다.
이케다는 인류의 모든 미래를 한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는 핵문제 해결에 평생을 투신했다. 상징적 장면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영국의 핵물리학자 조지프 로트블랫과의 대담이다. 로트블랫은 나치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막기 위해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독일의 패전이 가시화하자 양심을 지키기 위해 홀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했다. 이후 핵무기 폐기를 지향하는 과학자 연대체 ‘퍼그워시 회의’를 창설하며 반핵운동의 상징이 됐다.
이케다와의 대담에서 로트블랫은 “핵무기를 만들어낸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핵 문제를 해결할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케다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케다 회장(오른쪽)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영국의 핵물리학자 조지프 로트블랫을 2000년 2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만나 손을 맞잡고 있다. 세이쿄신문
핵문제를 둘러싼 두 사람의 대화는 오늘날 국제사회가 직면한 과제를 선명하게 비춘다. 핵무기 확산은 단지 안보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의 위협이 지속되는 한 빈곤 해소나 교육, 환경 보전 같은 과제 역시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SDGs에서 평화(SDG 16)를 핵심 목표로 설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트블랫과의 대담은 과학기술이 유발할 수 있는 위협에 대해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점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내적 변혁과 의지가 필수적임을 일깨운다.
“무한한 가능성 지닌 대화, 해결 못할 문제 없어”
갈등과 폭력을 이겨내는 인간 내면의 힘은 어디서 올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만난 인물이 세계적 갈등중재학자 케빈 클레멘츠다. 클레멘츠는 “비폭력적 방식으로 갈등을 관리하도록 하는 ‘리질리언스(회복탄력성)’를 사회제도에 어떻게 정착시키느냐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케다는 그의 견해에 공감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과 마음의 유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다는 ‘강인한 낙관주의’가 중요하다”며 “사회를 근본에서 떠받치는 사람들의 의지와 생명력, 바로 그것이 열쇠를 쥐고 있다”고 강조했다.그럼에도 개인의 의지를 꺾는 현실의 벽은 높다. 기후 위기와 빈곤, 전쟁 같은 난제를 마주할 때면 “나 혼자 행동해 봐야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느냐”는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이들이 행동 대신 체념을 택한다. 이케다가 거듭 경계한 것도 바로 이러한 무력감이었다.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한 인물이 아르헨티나 출신 인권운동가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이다. 그는 197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비폭력 인권운동을 이끈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에스키벨은 이케다에게 “인간은 공통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자유와 평화를 지향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이어 “민중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날마다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이라며 일상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심어가는 과정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개개인의 참여와 실천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이는 SDGs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케다가 평생을 전 세계 석학들과 마주 앉아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평화사상은 ‘대화’와 ‘세계시민성’을 근간으로 한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이해와 협력을 쌓아갈 때 내면의 각성이 만들어내는 긍정적 변화가 세계로 확산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대화를 협력의 관계망을 구축하는 토대로 본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대화는 시대의 균열을 메우기 위한 실천이었다. 증오와 대립이 팽배한 냉전시대에 맞선 자신만의 방식이자, 평화라는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각자가 가진 서로 다른 경험과 지혜를 연결해 더 나은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케다는 대화의 힘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이 일으킨 문제인 이상 인간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한 노력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한 타개할 길은 반드시 보인다. 그 최대의 열쇠는 바로 대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얼마만큼 끌어내는지에 달려 있다.”
최진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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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주간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재미없지만 재미있는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1인분의 몫을 하는 사람이 되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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