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 교수법의 둘째 목적은 이처럼 왜곡된 정보와 개념을 바로잡는 일이다. 예를 들어 교육개혁의 구호인 ‘다양화·특성화·자율화’가 유행어처럼 되었지만 이것들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가를 설명한다. 우선 다양화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서는 유사한 학과를 통폐합하여 교육의 효율과 품질을 높이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기 위해 학부제를 도입했다고 한다. 학부제는 폐쇄적인 학과의 벽을 허물어 다양한 인접 학문, 다학문이 번창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국 학부제는 학문과 학생의 다양화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양화는 새 시대가 지향하는 패러다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학부제 시행을 둘러싼 잡음이 왜 이토록 많은가. 일부에서는 교수들의 치졸한 영역 싸움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기존 체제를 뒤흔들어 불안하게 해놓고, 그 정도 반발에 고개를 내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학이 학부제로 인해 진통을 겪고 있는 이유는 보수파 교수의 반발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화를 추구하는 학부제를 획일적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효과보다 부작용이 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적과 방법이 일치하지 않았다. 학부제를 하는 대학이 있으면 안 하는 대학도 있고, 한 대학 안에 학부제를 시행하는 단과대학과 학과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단과대학과 학과도 있어야 진정한 다양화 아닐까?
다양화는 대학사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역에 걸쳐서 반드시 필요한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다양화는 정부가 주도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자생적 현상이어서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주면 저절로 나타난다.
그래서 특성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성화는 다양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이지만 한국에서는 특성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이 산업화를 이룩하는 동안 선진 외국을 많이 베껴왔는데, 이것이 그만 타성이 되어 서로 눈치보며 베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특성화의 결과를 두려워하거나 정서적으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특성화는 서열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다양화와 특성화는 서로 다를 뿐인 수평적 구조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다름’과 ‘뛰어남(특성)’이 상대 비교되어 우열로 구분되고, 소위 수직적 서열화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특성화의 당연한 결과를 인위적으로 막으려고 하니 특성화를 위한 개혁 정책은 항상 우왕좌왕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서열화가 나쁘니 없애야 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세상에 서열 없는 사회가 어디 있으랴. 평등 개념이 ‘기회의 평등’에서 ‘결과의 평등’으로 변질되는 것은 곤란하다. 모두가 성공을 보장받는 ‘결과의 평등’은 항상 실패를 평등하게 나눠 가지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공산국가는 결국 자멸하지 않았는가?
한국 교육의 서열화는 ‘계급화’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특수고에 들어가서 명문대에 입학하면 평생 상위계급의 특권을 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멋모르는 사춘기 때 공부하기를 싫어해서, 혹은 수능시험 점수 1,2점 차이로 이류 대학에 입학하면 훗날 아무리 열심히 해도 평생 이류 인생의 딱지를 면치 못한다. 따라서 계급화된 서열화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 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은 좋은 교육 여건을 찾아서 가는 것만은 아니다. 사교육비가 문제라면 미국에서 들일 교육비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평생 따라다닐 ‘이류’라는 계급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국 실정도 모른 채 무작정 떠나는 것이다.
서열화가 반드시 계급적일 필요는 없다. 시작이야 어떻든 노력 여하에 따라서 위아래로 이동이 자유로운 ‘계층적’ 서열화를 추구해야 한다. 나는 이 개념을 두고 ‘지식유통개혁’이라고 말한다. 새 시대에는 정보와 지식만 자유롭게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모두가 원활히 유통돼야 성장할 수 있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 ‘지식유통개혁’이야말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주도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자율화라는 개념 역시 뒤범벅되어 있다. 다양화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서 특성화라는 방법을 동원하려면 자율화라는 밑거름이 준비돼야 한다. 그러나 자율이 타율의 반대말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타율’이란 명사의 반대어는 ‘자유’지 ‘자율’이 아니다. 자유는 외부와의 투쟁해서 얻을 수 있지만, 자율은 내부로부터 얻어내는 것이다. 자율이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liberty와 freedom의 차이
자유라는 개념 또한 매우 잘못된 뜻으로 확산되어 있다. 영어에는 자유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프리덤(freedom)’과 ‘리버티(liberty)’ 두 가지가 있지만, 한국어로는 똑같이 ‘자유’로 번역되기 때문에 혼동을 초래하고 있는 것 같다. ‘freedom’은 아무런 규제가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liberty’는 비윤리적 또는 부당한 규제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합당한 규제는 있어도 된다는 뜻을 지닌 ‘liberty’는 타율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가 생존하기 위해서 국민이 추구해야 하는 자유는 liberty지 freedom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내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의 영문은 ‘liberty, equality, fraternity’였다. 미국 헌법도 국민의 liberty를 보장했지 국민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freedom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간섭과 규제로 통제받는 타율에 지쳐 자율을 외치지만, 자립 능력이 없는 상태의 자율은 타락과 방종으로 치닫기 쉽다.
이외에도 대학사회에 연봉제, 계약고용제 등 외국 제도가 속속 수입되고 있다. 특히 연봉제는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 여겨지고 있다. 연봉제는 비상시에 매우 효력있는 약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장기복용시에는 위험한 부작용을 가져오는 극약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자율화가 중요하다고 자처하는 교육기관에서마저 교원을 타율로 끌고 가는 수단으로 연봉제를 채택했으니 그 결과가 뻔할 수밖에 없다.
학생 중심 교육이라는 귀중한 교육이념이 소비자 위주의 시장경제원리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시장경제 체제에 걸맞은 경영기술이 마치 기업체의 영업기술인 듯 아무 생각없이 적용되고 있다. 지식기반시대라고 해서 지식인을 산업시대의 노동자처럼 취급하는 것은 아직도 행정이 산업시대의 경영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새 시대의 인력을 구시대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지식인들이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 또한 산업화 시대의 방식을 탈피하지 못한 대응책이다.
교원 연봉제는 교육 부실로 이어질 수 있으며, 노조의 등장은 집안 싸움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학생을 위한다는 교육개혁에서 자칫 학생만 피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앞날이 암담하다.
하지만 한국에 절망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단점과 선진국의 장점을 비교한다면 한국은 분명 몹쓸 나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선진국의 단점과 한국의 장점을 비교해서 한국이 좋은 나라라고 강변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막연한 희망으로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난 6년간 한국을 29차례 방문했고, 40여 대학에서 교수법을 강연했다. 내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 교육에는 희망이 있었다. 한국의 현실이 좋았다는 게 아니라 잘될 가능성을 보았다는 말이다.
한국은 일단 개혁의 방향과 방법을 정하면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엄청난 추진력으로 밀고 나가는 능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은 단시일에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반일, 반공, 반정부라는 대단히 귀중한 반발의 역사가 있지만, 이제는 지양보다 지향의 이념을 가질 단계다. 그래서 새 시대 교수법의 마지막 부분에는 희망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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