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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국제사’ 펴낸 美외교사학자 윌리엄 스툭 교수

“한반도 통일과정에 강대국 개입 어려워졌다”

‘한국전쟁의 국제사’ 펴낸 美외교사학자 윌리엄 스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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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북침을 원하지 않는다고 신중론을 폈습니다. 또 북침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이승만에게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50년 1월부터 김일성의 남침입장을 지지하고 무기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의 처지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전을 연구할 때 국내적인 요인과 국제적인 요인을 함께 분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전쟁에 관한 국내외 학계의 해석은 아직도 분분하다. 여러 해석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전통주의적 해석이다. 소련이 전세계 공산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이용해 남침한 국제도발이었다는 것이 이 시각의 핵심이다. 그러나 1960년대 베트남전이 터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미국 지상주의적’외교정책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좌파 성향 학자가 중심이 된 이 시각을 수정주의적 해석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따르면 한국전과 베트남전은 내전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 이러한 견해는 더욱 힘을 얻었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전은 민족 내부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터진 전쟁이며,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미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1985)이란 책이 이 견해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이 책은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젊은 지식인 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최근 ‘한국전쟁의 국제사’한국어판을 펴낸 미 조지아대 윌리엄 스툭 교수는 이러한 수정주의를 다시 비판한다. 그는 이 전쟁을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이해가 충돌한 세계사적 의미가 강한 국제전이라고 본다.

그는 특히 전시 강대국 외교와, 이것이 세계 정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며 한국전쟁의 국제적 성격을 전쟁 국면마다 분석하고 있다. 스툭 교수는 동서대결의 고착,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등장과 일본의 부활, 그리고 중국의 부상을 포함한 초기 냉전구조를 설명하면서 한국전쟁이 세계 3차대전을 막는 대리전쟁 역할을 했다고 진단한다. 특히 그는 유엔(UN)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압력 때문에 미국 정부가 맥아더의 확전 주장을 누르고 전쟁을 한반도로 한정시켰다고 지적한다. 이는 유엔을 미국의 심부름꾼 정도로 여긴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새로운 주장이다.

스툭 교수는 사실 이 책을 1980년경에 박사논문으로 처음 써냈다. 수정주의가 유행하던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조류와는 전혀 다른 이 논문을 탈고한 뒤, 논문을 보완하기 위해 15년 동안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 16개국 서고와 문서보관서를 묵묵히 뒤져, 1995년 영문판을 완성했다.



그의 시각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으로 넘어오면서 힘을 얻었다. 학계에서 수정주의를 재수정하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새로 공개된 소련측 비밀문서를 통해 소련 권력부가 조선인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며 인권을 남용하는 등, 소련이 저지른 악(惡)이 속속 드러나면서 수정주의에 대한 재해석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스툭 교수의 연구 가운데 단점이라면 한국어 자료를 직접 인용한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는 달리 한국과 중국 자료를 거의 인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한국전쟁의 국제사’는 탈냉전 이후 세계 학계에서 한국전쟁 연구를 대표하는 성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학문에도 유행이 있는데, 이 책은 향후 30년 동안 외교사 강의의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있다. 지난 9월 말, 한국전 관련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주한미국대사관 공보원에서 만났다.

-교수님의 이번 저서는 한국전쟁을 북한과 소련의 남침이라고 보는 ‘전통적 시각(Traditional Perspective)’과도 차이가 있고, 브루스 커밍스의 ‘수정주의(Revisioni sm)’와도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씨 같은 경우는 한국전을 내전(Civil War)이라고 강조했습니다. 1980년대 초의 한국 상황을 보면 한국전쟁을 내전이라는 시각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그전까지는 서방세계가 한국전쟁을 이런 측면에서 연구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커밍스씨의 연구작업이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학문에도 유행이 있어, 과거와 다른 틀이 나오면 거기에 너무 많은 인력이 쏠려 지나치게 연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의 이론과 새로운 이론을 절충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과정, 그리고 내전 측면에서의 특징도 중요시하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세계적인 절차를 보지 않고서는 한국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저서에서는 국제적인 시야로 한국전을 보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전 측면에서의 한국전쟁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중시하면서 한국전쟁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분단은 미·소의 국제적 결정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계속된 한국전쟁은 반드시 그 출발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1945년 한반도가 분단되던 상황을 살펴야 합니다. 당시 한반도 분단은 전적으로 외부세력인 미국과 소련이 결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국제적인 결정이었고, 여기에 한국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내부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에서도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1948년 남북한에 제각각 독립적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단이 영구적이 되는 상황으로 발전했습니다. 또 그 당시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가 누구였는가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소가 남북한의 어느 지도자를 선택했는지도 중요합니다. 당시 소련은 김일성을 선택했습니다만, 미국이 꼭 이승만을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미국은 이승만보다는 김규식 쪽을 더 선호했습니다.

6월25일에 한국전이 터졌을 때,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사전에 알렸고, 여기에 대한 찬성을 받아낸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남한의 대통령 이승만 또한 북침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남북한의 지도자가 서로 침략을 원한 데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남침할 수 있었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당시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은 북침을 원하지 않는다고 신중론을 폈습니다. 또 북침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이승만에게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50년 1월부터 김일성의 남침 입장을 지지하고 무기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전을 연구할 때 국내적인 요인과 국제적인 요인을 함께 분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전에 대해서 나 자신과 브루스 커밍스씨의 해석을 비교해보면, 브루스 커밍스씨는 1945년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미국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저는 6·25 이후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이 필요했고, 정당했다고 봅니다.

저는 한국전의 국제적인 요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이 남북한의 순수한 내전이었다면 미국의 개입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었고, 국제적인 역량이 개입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개입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한국전에 내전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을 베트남전과 견주자면 게릴라전 위주였던 베트남전과 달리 한국전은 정규전이었습니다. 이것이 베트남전과 한국전의 차이점입니다. 이 정규전 성격 때문에 미국이 한국전에서 38도선 이북으로 공산 세력을 억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당시 남한 정부는 베트남 정부보다 훨씬 합법적인 정권이었고 국민의 지지도 높았습니다.”

유엔은 미국의 하수인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다룬 과거의 시각인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에 견주어 교수님의 연구와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저의 해석이 좀더 복잡합니다. 저는 수정주의자(Revisionist)도 아니고,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도 아닙니다. 전통주의적 해석은 북한과 소련이 힘을 합쳐 38선을 넘어 남침했고, 여기에 한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시각보다 좀더 복잡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차이가 있다면 저는 외교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저는 한국전에서 유엔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기존의 해석은 유엔이라는 기구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유엔이 미국의 하수인이었다는 입장은 1947년부터 1950년말까지는 유효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한국전이 한반도를 넘어 세계적인 분쟁으로 확산될 위기에 놓였을 때 유엔이 오히려 미국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947년 당시 미국의 동맹국들과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중립국들은 유엔총회라는 틀로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 바 있습니다. 유엔이라는 틀은 미국이 제안했으나 1950년 말 이후부터는 오히려 미국의 동맹국들과 비동맹중립국들이 한국전을 확산하려는 미국을 저지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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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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