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은 패전 후에 나치를 단죄함으로써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추궁했다. 그와 같은 조치에 입각해 독일은 주변국에 대해서도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하여 전후처리를 마무리했다. 이에 유럽 각국은 독일을 진정한 우방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은 패전 후 일부 전범을 처벌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군부에 협력한 많은 사람이 면죄부를 받고 일본의 재건에 참여했다. 일왕과 군국주의자들이 이렇게 전쟁책임을 회피하자 일본 국민은 일왕과 마찬가지로 침략전쟁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무책임의 사고방식이 일본의 역사인식 토대를 이루었고, 이는 불완전한 과거청산으로 연결됐다.
현재 한국과 중국이 계속 지적하는 문제들, 예컨대 교과서 왜곡이나 수상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그리고 정치인들의 망언의 뿌리는 일왕과 군국주의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과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 있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오늘날 일본은 어두운 과거를 외면한 채 헌법을 개정, 정치대국·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 단편적이고 감정적으로 일본을 바라봐서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역사적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해 합리적인 대일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부터 불완전한 과거청산의 원점에 존재하는 히로히토와 그의 전쟁책임과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히로히토가 병석에 누워 있던 1988년 12월7일, 나가사키(長崎)시 의회에서 공산당 소속의 한 시의원이 모토지마 히토시(本島等) 시장에게 태평양전쟁 당시 일왕의 전쟁책임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모토지마 시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후 43년이 지난 지금, 반성은 충분히 이뤄졌다고 본다. 외국의 자료나 일본 역사학자들의 기술 및 본인의 군대생활 경험에 비춰볼 때 천황에게 전쟁책임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 및 연합국의 의사로 그 책임이 면제됐으며 일왕은 새 헌법의 상징이 됐다. 따라서 우리들도 그러한 선에서 대처해나가면 된다.”
전쟁 당시 일본 육군의 교육대 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천황이 중신들의 상주(上奏·천황에게 올리는 상소)를 받아들여 좀더 일찍 종전 결단을 내렸더라면 오키나와 전투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도 명백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부군관구 교육대에서 병사들에게 ‘천황을 위해 죽어라’고 가르친 나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고 고백했다.
일본 공산당은 일왕제를 일관되게 반대했기 때문에 시의원의 그러한 질문은 이상할 것이 없다. 시장의 답변도 비교적 합당했다. 그러나 그 반향은 컸다. 격려의 편지도 있었지만 비난과 협박편지가 더 많았다. 그 같은 발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자민당 시의원들에 대하여 모토지마 시장은 “발언의 철회는 정치가에게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