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저거요? 친구가 사준 시계인데, 건전지 간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또 망가졌네요.”
시간을 못 봐 불편하지 않으냐고 묻자 아이들 중에 시계 볼 줄 아는 아이가 없어 괜찮다고 했다. 나는 카펫 대신 매트가 깔린 마루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흰 치아가 빛나는 웃음 때문일까. 사람이 한없이 좋아 보였다.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 하나는 내가 마시고 하나는 선생님에게 권했다. 그러곤 이곳에 사는 아이들 얘기를 들었다.
“잘 웃는 우리 큰딸 은아는 지체장애 2급이고 서른 살이에요. 얼마 전까지 양말 공장에서 양말 비품을 정리했는데,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일이 끊겼어요. 요즘엔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죠. 그래도 낮엔 복지관 가고 밤엔 헬스장 가느라 바빠요. 그리고 우리 큰아들 정인이. 지체장애 1급이고 청각장애 1급이라는데, 제가 봐서는 청각 1급은 아닌 것 같아요. 이름만 불러도 얼마나 빨리 반응하는데요. 그런데 난시라고 해서 걱정이에요. 나이가 있어 혜택도 적고 몸도 좋지 않아 학교만 다니고요.
우리 둘째딸 수정이. 스무 살인데 왜소증이라 키가 126cm밖에 안 돼요. 버스 탈 때 초등학생 요금 내도 아무도 의심 안 할 정도로 작죠. 지체장애 2급이긴 하지만 똑똑해요, 우리 수정이. 성수 요 녀석은 열두 살로 지체장애 2급인데 개구쟁이죠. 우리 집 귀염둥이 수미는 열 살인데 지체장애 1급이고 다운증후군이라 혼자서 밥을 못 먹어요. 제가 귀하게 여겨서 그런지 다른 데서도 귀여움을 많이 받아요. 이따 보세요, 얼마나 귀여운지.(웃음)”
그는 입이 마르도록 얘기를 하면서도 음료수는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아이들이 오려면 한 시간이 남았다고 했다. 중간에 큰딸 은아가 오자 만지작거리다 상 위에 둔 음료수부터 내민다.
“옴마, 이 썬쌩님 누구우세요?” “응, 엄마 친군데 혜민이 이모야. 우리랑 같이 며칠 있을 거야. 괜찮지?” “이모가 나 주신 거예요오?” “응, 은아 먹으라고 사오셨어” “앗! 고맙습니다. 자알 먹을게요오. 나 이이모 와서 좋아요! ” 나는 손이 무색해진다.
복지관 다녀왔다는 체격 큰 은아에게서 외할머니의 선한 웃음이 보인다. 맑고 큰 눈 위에 그려진 핑크빛 아이섀도를 보니 결혼할 나이겠구나 싶었다.
“은아 좋다는 지체(肢體)장애인이 있었는데, 대화상대가 안 된다고 느꼈는지 나중엔 싫다고 그러더라고요. 저한테 계속 남자친구 소개해달라는데, 어쩌겠어요. 지적(知的)장애인이라도 얼굴이 잘 생겨야 하니….(웃음)”

큰딸이 나가더니 네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학교 다녀왔다는 인사가 들리는가 싶더니 꼬맹이 수정이는 부끄러워 눈도 못 마주친다. 코 한쪽이 예쁘지 않다는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런가 싶었다. 성수는 개구쟁이답게 활달하다. “이모, 귀엽다! ” “난, 이모가 좋다! ”를 연발했다. (처음에는 내가 정말 예뻐서 그러는가, 하고 착각했지만 매일같이 반복하는 걸 보면서, 타인에 대한 호감표시라는 걸 알았다.) 정인이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느린 걸음으로 와선 악수를 청했다. 손을 움직여 악수하는 데까지 1분이 걸렸지만, 각질 많은 건조한 손이 따뜻했다.
오후 8시가 되면
조용했던 집이 들썩인다. 젓가락처럼 마른 성수는 공을 벽으로 던지며 주고받기 놀이에 빠졌고, 수정이와 정인이는 차례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입던 옷을 빨래바구니에 넣었다. 씻고 나온 수정이는 텔레비전 받침대 서랍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곤 제자리에 뒀다. 수선스럽던 막내 수미는 ‘뽀로로’ 비디오를 틀어주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