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 선서식에서 찍은 사진.
1932년 4월29일 오전 11시40분 중국 상하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고 1차 상하이사변에서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일제의 기념행사가 열렸다. 일본국가 제창이 끝날 무렵,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음으로 잠시 어수선해진 틈을 타 연단 중앙으로 폭탄이 던져진다. 당시 나이 25세의 대한남아 윤봉길이 던진 물병 모양의 폭탄이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군 사령관 등이 죽고 다수의 일본인이 다쳤다. 이날 윤봉길 의사가 현장에서 연행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국내외 여러 신문에 실렸다.
거사가 있은 지 8개월 후인 1932년 12월19일 윤 의사는 두 발의 탄환을 맞고 목숨을 잃는다. 시신은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유족에게는 흰 손수건, 가죽지갑, 회중시계 등 유품만이 전해졌다. 이 유품들은 윤 의사 고향인 충남 예산 충의사의 윤봉길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인 1972년 8월15일 윤 의사의 일부 유품이 보물 제568호로 일괄 지정된다. 4년 후인 1976년 5월21일 몇 점이 추가로 보물로 지정됐고, 이때 윤 의사가 연행되는 모습을 담은 사진 2점도 보물에 포함됐다.
연행 사진은 진짜인가?

일본 아사히신문 1932년 5월1일자 호외에 게재된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연행 사진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쪽에는 충남대 국사학과 김상기 교수(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가 있었다. 김 교수는 연행 사진 2점을 놓고 비교했다. 김 교수가 비교한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이 저술한 ‘도왜실기’에 실린 사진으로 일본 통신사 니혼뎀포(Nihon Dempo)가 제공해 영국계 신문이 보도한 것이다. 김 교수는 반일감정을 고려해 아사히신문이 윤 의사의 핏자국을 숨기려 한 것 같다며 두 장의 사진은 촬영 시점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현장에서 찍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윤 의사를 마지막으로 본 백범 선생이 ‘도왜실기’에 실은 사진이 가짜일 리 없다는 주장이다.
연행 사진이 가짜라는 측의 강 교수는 사진 속의 얼굴이 겁에 질린 중년남성이라는 점에서 윤 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김 교수가 비교한 두 장의 사진 모두 일본에서 조작한 가짜라는 것이다.
윤 의사 연행 사진의 진위를 가리려는 논쟁은 10년 가까이 이어진다. 세간의 흥미를 끌 만한 주제여서인지 성형외과 교수의 분석, 언론의 추적 보도, 네티즌의 관심 등이 뒤엉켜 혼전이 계속됐다. 2008년 8월8일 국가보훈처는 연행 사진이 진짜라고 공식 발표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의뢰해 내린 판정이다. 그러나 최초로 의혹을 제기한 강 교수는 아직도 승복하지 않고 있다.
유족, “보물 해제 철회하라”
국가보훈처가 연행 사진이 진짜라고 확인하자, 유족과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측은 보물 해제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원래 보물이었으니, 진짜인 것이 확인된 만큼 다시 보물로 복원해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