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테오티와칸의 아즈텍 유적. 아즈텍 황제들은 적군의 심장을 신에게 바쳤다.
사제들이 제물로 바칠 사람을 둘러메고 피라미드 계단을 오른다. 피라미드 꼭대기 ‘태양의 신전’ 앞에서 제물은 커다란 석판 위에 놓이고 4명의 사제가 두 팔과 두 다리를 잡았다. 이윽고 다른 한 명의 사제가 칼로 인간 제물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하늘 높이 쳐들었다. 심장의 뜨거운 피가 제단 위에 뿌려지고 구멍 난 몸뚱이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아즈텍 제국(1325~1521)의 인신공양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데이비드 카라스코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이렇듯 생생하게 묘사했다. 근대 이전 인신공양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아즈텍의 인신공양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규모 때문이다. 1486년 아즈텍 제국의 새로운 황제에 즉위한 아우이소틀은 피라미드 재건을 기리는 단 한 번의 행사에서 8만 명 넘는 사람을 죽였으며 해마다 수십만 명을 제물로 바치기 일쑤였다.
인신공양의 명분은 아즈텍이 섬기는 태양신을 위해서였다. 아즈텍 신화에서 태양신과 밤의 신은 끊임없는 전쟁을 벌인다. 밤의 신의 승리는 곧 인간의 멸망을 의미한다. 태양신이 힘을 유지하게 하려면 인간의 피와 심장을 끊임없이 공급해야만 했다. 아즈텍이 주변 국가를 침공하고 포로를 생포해 그들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바친 것도 그래서다. 심지어 500㎞ 떨어진 곳까지 원정을 가서 포로 수만 명을 생포해 태양신에게 심장을 바쳤다. 이른바 ‘꽃의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적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로잡아 신에게 바치고자 싸웠다. 사람의 피가 곧 ‘전쟁의 꽃’이며 피를 얻기 위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꽃의 전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반역 막은 인신공양
이런 끔찍한 일이 어떻게 일상화했을까. 아즈텍이 등장하기 전 멕시코 지역은 씨족공동체인 칼풀리(Calpulli)와 도시국가들로 구성돼 있었다. 칼풀리는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활동을 영위했고 정치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소수 이방민족이던 메쉬카족은 멕시코 중앙 고원 지역 주변 칼풀리와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제국을 건설했다. 아즈텍은 20만㎢ 면적에 인구가 수백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으나 아즈텍을 움직이는 메쉬카족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했다. 절대 소수의 메쉬카족이 언어와 문화가 다른데다 정치적으로도 자치권을 갖고 있는 속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공물을 제때 보내지 않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다. 아즈텍의 대응은 무자비하고 가혹했다. 반란 주동자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관련된 인물은 모두 산 채로 잡아들여 태양의 신전에서 심장을 도려냈다. 인신공양은 처형의 차원을 뛰어넘어 제례와 축제 형식으로 승화됐다. 주변 속국의 왕이나 귀족을 모두 불러 모아 반역자의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했다. 반역을 도모하면 이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 소수 민족이 거대 제국을 유지하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인신공양을 활용한 것이다. 속국들이 행여 딴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위험인물을 가려내 숙청함으로써 범죄예방(?)의 효과를 거두었다. 아즈텍이 번성했을 당시 인신공양을 겸한 축제를 1년 365일 가운데 200일 넘게 열었다는 사실에서도 인신공양이 제국을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가에서 최악의 범죄는 단연코 ‘반역’이었다. ‘왕’이 곧 국가이던 시절이다. 왕에 대한 반항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다. 반역을 막으려고 갖은 방안이 만들어졌고 온갖 수단이 동원됐다. ‘왕권신수설’과 같은 종교와 이념의 활용은 기본이었다. 기독교, 불교, 유교가 빠른 기간 내에 널리 확산되고 국교로까지 공인된 데는 이들 종교가 기존 왕권을 인정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왕권에 대한 도전은 곧 신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다. 당연히 처벌 강도 또한 가장 셌다. 이른바 3족을 멸하거나 심하면 9족을 멸하는 연좌는 대부분 ‘반역죄’와 관련한 처벌이었다.
이렇듯 참혹하고, 야만스러운 사건의 배경엔 왕권을 비롯한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 있는 경우가 많다. 훗날 무자비한 학살과 문화파괴로 비판받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역시 마찬가지다. 진나라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뒤에도 크고 작은 분란이 계속됐다. 옛 왕조를 되살리려는 시도 또한 적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법질서를 세워야 했다. 또 새로운 질서를 거스르는 세력을 쓸어버리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과정이 요구됐다. 그러려면 빌미가 필요했다.
진시황 34년(기원전 213년)에 드디어 사건이 벌어진다. 진시황이 수도 함양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신하들이 진시황에게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 가운데 주청신이 진시황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했다.
분서갱유 목적은?
“폐하의 성스러움에 힘입어 우리 진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 오랑캐를 내쫓으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라면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게 됐습니다. 새로운 제도를 빨리 뿌리내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청신의 아부가 역겨웠던 순우월이란 신하가 마음먹고 진시황에게 쓴 소리를 했다.
“어떤 일이든 옛날을 본받지 않고 오래갔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옛 제도를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