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화마다 발생 배경이나 전개 과정 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림파, 곧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훈구파와 왕실 외척들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당한 일련의 사건이라는 점이다. 현실주의자들이 성리학 정치이념을 구현하려 애쓴 이상주의자들을 거세한 것이다.
거듭된 사화로 사림파가 입은 손실은 막대했다. 그러나 사림파는 소멸되지 않았다. 그들은 되레 조선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장했고, 17세기 들어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따져볼 겨를은 없다. 다만 지나칠 수 없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들이 세찬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 배경엔 아버지들의 비상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김종직-김굉필-유계린
새삼스럽게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라는 호남 성리학자 집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유희춘은 말년에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정3품)에 이르렀다. 당대의 석학 김안국(金安國·1478~1543)과 최산두(崔山斗·1483~1536)의 문인이다. 청년 시절부터 학자로 이름을 날렸고, 사후에는 전라도 담양과 무장, 함경도 종성의 여러 서원에 배향됐다. 노년에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는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됐다. 유희춘의 아내 홍주 송씨도 당대의 여류 문사였다. ‘덕봉(德峰)’이란 호로 이름난 그녀는 한시(漢詩)에 능통했다.
이렇게 몇 줄로 뭉뚱그려놓고 보면, 그 집안에 과연 무슨 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실상은 비참했다.
그들은 연거푸 4차례의 사화에 얽혀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성리학자 가문의 전통을 굳게 지키며 성장을 거듭했다. 결국은 명문가가 됐다. 그런 성공의 이면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의 지혜와 노력이 있었다.
유계린(柳桂隣·1478~1528)은 조선 초기 사림파의 일원이다. 그의 스승은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다. ‘소학동자(小學童子)’라는 별호로도 유명한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 사건의 발단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한 편의 글. 그 저자는 김종직(金宗直·1431~1492)으로, 그는 고려 충신 길재(吉再·1453~1419)의 학통을 이어 조선 초기 사림파의 종장(宗匠)이 됐다.
김종직은 ‘세조실록’에 실린 이 글에서 은연중 세조의 왕위 찬탈을 중국 고대에 항우가 진(秦) 의제를 살해한 사건에 비유했다. 유자광 등 훈구파는 그 점을 문제 삼았다. 유자광 등은 김종직을 불충한 인물로 규정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어 목을 자름)했다. 그들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과 김굉필 등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고, 조정의 권력을 독점했다.
해남 성내에 숨어 살아
무오사화 6년 뒤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이번엔 왕실 외척들이 주도했다. 그들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를 추진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일부 훈구파와 사림파를 역신(逆臣)으로 몰아 잔혹하게 처벌했다. 유계린의 스승 김굉필은 사림파의 영수로서 이 사건에 다시 연루됐다. 김굉필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당해 결국 거기서 사약을 마시고 운명했다.유계린은 두 차례의 사화로 스승과 많은 동료, 선배를 잃었다. 그에게 친아버지와도 같던 장인 최부(崔溥·1454~1504)도 희생됐다. 최부는 이미 무오사화 때부터 김굉필과 유배형을 당했다. 그는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김굉필 등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흔히 조선 초기 사림파라면 영남 출신 성리학자들만 떠올린다.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경기, 충청은 물론 호남에도 사림파가 상당수 존재했다. 최부는 호남 성리학자의 대표적 인물로서 김종직의 아낌을 받았다. 최부의 호는 금남(錦南), 훗날 ‘표해록(漂海錄)’이란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왕명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 부친상을 당했다. 귀향을 서두르던 중 그가 탄 배가 표류했다.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도 중국을 다녀왔다(1488).
당시 명나라 황제는 최부를 만나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상중(喪中)의 죄인이라는 이유로 알현을 거절했다. 당혹한 명나라 조정은 강압적 방법을 써서 황제와 그의 대면을 성사시켰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 ‘표해록’이다. 요컨대 이 책은 개인의 권력과 명예보다 예법을 앞세우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관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동시대의 중국, 일본 유학자들보다 훨씬 더 성리학 근본주의에 가깝다는 점에서 후세의 관심을 끌 만하다.
연이은 사화로 장인과 스승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 유계린의 나이는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의 상심은 깊었다. 그로 말미암아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저 고향인 해남의 성내를 서성일 뿐이었다. 유계린이 자신의 호를 ‘성은(城隱)’, 즉 성안에 숨어 지내는 이라고 자처한 데는 이런 기막힌 사정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유계린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다짐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거가십훈(居家十訓)’을 짓고 몸소 이를 실천했다. 그에겐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부디 자손들이 성리학자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그 덕목을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해 가문을 재건하고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주인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훗날 유희춘은 작고한 아버지 유계린을 그리워하며, 아버지의 “언행과 문장은 순수하고 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유희춘은 아버지의 탁월한 행적이 후대에 전해지지 못할까봐 조바심을 냈다. 그래서 “두려워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이 집안에서 독실히 실천하신 ‘거가십훈’을 기록”했다.‘거가’란 벼슬을 멀리하고 집안에 머문다는 뜻이다. 유계린은 김굉필, 최부 등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학자답게 성리학적 이념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에 힘썼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십훈’이다.
유계린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선비의 기상을 잃지 않고자 했다. 또한 부당한 사적 ‘욕심을 차단하기(窒慾)’에 노력했다. 일상사를 처리할 때도 성리학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관계를 멀리하고 순리대로 결정할 것을 다짐했다. 대인관계에선 상대방의 됨됨이를 미리 알아볼 줄 아는 능력(知人)을 갖추고자 했다. 초야에 묻힌 선비로서 매사에 한층 더 관대하고 진실하기를 자신에게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대의에 따른 결단이 필요하다면 누구보다 과감하기를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필자가 보기에 ‘거가십훈’의 요체는 4가지다.
첫째는 효(孝)를 실천하는 생활이다. 유희춘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며, 아버지의 효성과 상중 예법에 감복했다.
선친이 23세 되던 경신년(1500),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셨다. 선친은 순천(順天)에서 여막(廬幕)을 지키며 애통해하고 사모함이 지극하셨다. 소상(小祥)을 마치고 일이 있어 부득이 해남을 왕래하셨다. 그때 어머니(탐진 최씨)와 한 방에서 13일을 같이 지내셨으나, 예(禮)로써 멀리하셨다. 작별할 때가 되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열흘 넘게 머무셨으나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으니, 더욱 슬픕니다.” 선친은 민망히 여기며 길을 재촉하셨다. 우리 집 여종 눌비가 그때 방에 함께 있어서 전후사정을 잘 알았다. 눌비는 늙을 때까지도 그때 일을 자주 말했다. “앞뒤로 듣고 보아도, 우리 주인님(유계린)만큼 공경할 만한 분이 안 계십니다.”
묵묵히 齊家하며 공부
둘째, 유계린은 ‘제가(齊家)’, 즉 집안을 원만하게 다스리는 데도 심혈을 쏟았다. 유희춘은 몇 가지 일화를 들며 아버지에게 존경을 표했다. 유계린처럼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선비에게 ‘제가’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선친은 부부 사이에도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예를 갖추셨다. 그러나 애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35년간 함께 사셨는데, 한 번도 첩을 사랑하신 적이 없으셨다.
하나뿐인 아우 계근(桂近, 유희춘의 숙부)과 우애가 깊으셨다. (…) 올벼가 나오는 논(早稻田)을 그에게 다 주셨다. (선친에게는) 누이가 두 명 있었는데, 조모께서 생전에 몹시 사랑했다. 그 점을 고려해 선친은 동기간에 재물을 나눌 적에 좋은 전답과 노비는 다 그들에게 양보하셨다.
자식 사랑도 고르게 하여 편애함이 없으셨다. 새끼에게 먹이를 고루 나눠주는 뻐꾸기의 사랑이 있었다.
노비들도 아끼셨다. 그들의 나쁜 점은 미워하셨지만 장점을 알려고 노력하셨다. 자상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몸에 배셨다. 그런 선친이 작고하시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노비들이 넋을 놓고 곡성을 터뜨려 마치 자기네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하였다. 마을에 사는 백성들 중에도 우리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고 탄식하며, ‘덕인(德人)이 돌아가셨다’고들 하였다.
셋째, 유계린은 함부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자손만대의 안전을 위해 고향인 해남 땅을 떠나려고 했다. 재산이 넉넉하면 벼슬에 연연할 이유가 없고, 해남처럼 왜구의 침입이 염려되는 곳은 자손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떠나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훗날 유희춘이 담양 대곡(大谷)으로 집을 옮기고, 상당한 전답을 마련해 생계의 안전을 꾀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다.
넷째, 유계린은 가문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에 힘썼다. 그는 기억력이 출중했고 “문리(文理)가 투철”했다. 유희춘의 증언은 이러하다.
고문(古文) 중에 까다로워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나 의미가 애매한 어려운 부분도 대나무를 쪼갠 듯 명쾌하게 이해하셨다.
고을의 여러 자제들이 와서 (선친께) 수업을 받았다. 십수년 동안 그들을 지도했으나 조금도 게을러지지 않으셨다. 아동에게 글을 가르침에 반드시 먼저 강령(綱領), 즉 대의를 알려주고 그 문맥과 이치를 펼쳤다. 그런 가르침 덕분에 작고한 형님(유성춘)도 어릴 적부터 문의(文義)에 밝았고, 글 또한 잘 지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유희춘도 문장 분석력이 탁월해 당대 최고의 경학자로 꼽혔다.
기묘사화로 장남 잃어

결과적으로 유계린은 ‘거가십훈’의 실천을 통해 멸문의 위기에서 탈출했다. 거듭된 사화로 그의 집안은 자칫 몰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좌절의 위기 속에서 유계린은 오히려 성리학적 가르침의 온전한 구현을 추구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성리학자로서 그의 명성은 향촌사회에서 드높아졌다. 집안 살림살이도 더욱 안정됐고, 가족의 화목과 유대감도 강화됐다. 그의 학문적 지도를 받은 두 아들, 유성춘과 유희춘은 전국적인 명사로 자랐다.
유계린이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큰아들 유성춘(柳成春·1495~1522)은 약관 20세에 문과에 급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유성춘은 윤구, 최산두와 더불어 ‘호남 삼걸’로 불릴 만큼 명망이 높았다. 중종 때 조정에 진출한 그는 개혁정치가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정치적 동반자였다.
유성춘은 곧 이조정랑에 등용돼 사림파 정계 진출의 산파 노릇을 했다. 이조정랑은 6품 이하 당하관의 등용에 상당한 자율권을 행사했다. 아울러 삼사(三司),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리 임용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직이다. 유성춘은 조광조와 더불어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정치적 역풍이 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사림파가 일망타진됐다. 유성춘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는 경상도 금릉현으로 귀양 갔다가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자 이내 숨을 거뒀다. 향년 28세였다. 유계린은 이런 비극적 사태에 직면해 말을 잃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큰아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뜬 지 6년 만에 눈을 감았다.
말년의 유계린은 실의 속에서도 차남 유희춘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그의 학문적 성취에 자신의 힘과 능력을 다 바쳤다. 유희춘은 “선친은 3남 중에서 나를 특별히 아끼시어 매번 몸소 업고 거닐며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는 이 아들이다’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장자 유성춘이 쓰러진 뒤 아버지는 더욱 유희춘을 아끼며 채찍질했다. “늘 네 마음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 한번이라도 마음이 치우치는 경우가 있다면, 그로 인해 일이 어긋나고 윤리가 흐려지기 마련이다.”
유계린이 세상을 뜬 뒤 유성춘의 자손은 유희춘에게 의지해 문호를 보존했다. 유성춘의 아들과 손자들, 즉 유연개(柳沿漑)를 비롯해 유광운(柳光雲)과 유광문(柳光雯)은 유희춘의 각별한 보살핌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순탄한 일이 아니었다.
을사사화로 차남마저…
사림파 유씨 일가의 수난은 3차례의 사화로도 끝나지 않았다. 유계린의 차남 유희춘도 을사사화에 얽혀 고난을 겪었다. 그는 20년 동안 궁벽한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비참한 신세였다.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버지 유계린은 그런 비극을 직접 겪지 않은 점이리라. 유희춘은 아버지가 작고한 지 10년 만에 문과별시에 급제해 조정의 반열에 섰다(1538). 어릴 적부터 그는 아버지가 실의를 극복하고 ‘십훈’을 실천하며 성리학자의 외로운 길에 매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무한에 가까워 아버지를 자신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그는 훗날 ‘거가십훈’을 글로 적어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굳게 지키라고 당부했다.
유계린은 아들 유희춘의 운명을 예감했다. 언젠가 아버지는 ‘주역’을 가지고 아들의 운명을 점쳐,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네(유희춘) 운명은 (…) 정괘(井卦) 구오(九五)에 해당한다. 그 ‘괘사(卦辭)’는 ‘한 번은 고개를 숙이고 한 번은 하늘을 우러르노라. 초수(楚水)와 회산(淮山) 땅에 한이 더욱 깊구나’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네가 장차 멀리 귀양 갈 조짐이다. 그러므로 벼슬길에 나서더라도 정상에 오르기를 기약하지 말고, 중도에 몸을 거두어 전원으로 돌아감이 좋으니라.
사화라면 치를 떨던 유계린이다. 그는 둘째아들이 장차 과거에 급제해 큰 뜻을 펼 수 있기를 강렬하게 바라면서도 행여 아들이 무사하지 못할까봐 근심했다. 사림파에 대한 기득권층의 질시와 탄압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가 한쪽으로 기운 권력 판에서 감히 정의가 구현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유계린의 염려는 현실이 됐다. 결국 그의 스승과 장인, 두 아들에 이르기까지 온 집안이 ‘4대 사화’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됐다. 그러나 유씨 일가는 시류를 좇아 기성 세력에 아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를 이어가며 절개와 지조를 숭상하고, 성리학의 근본이념에 투철하고자 했다. 16세기 후반, 경향 각지엔 그와 호흡을 같이한 다수의 성리학자 집안이 있었다.
사림파의 찬란한 부활
결국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선조의 즉위와 더불어 그동안 사화에 시달리던 성리학자들이 대거 조정에 복귀했다. 유희춘도 오랜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선조는 유희춘의 학덕을 높이 평가해 대사헌과 전라감사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했다. 이후 그의 여생은 순탄하고 평안했다. 그가 누린 말년의 영예는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과 인격을 부단히 연마한 유희춘 자신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거가십훈’이 상징하는 아버지 유계린의 강철 같은 신념과 실천의지를 토대로 했다.◇ ‘아버지 유계린’의 가르침
- 효(孝)를 실천하라.
- 집안을 원만하게 다스려라.
- 함부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라.
- 가문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에 힘써라.
백 승 종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