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자 허련이 남긴 초상화를 보면 김정희는 풍채 또한 좋은 걸물이었다.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서법으로 후세의 칭송을 받는 그는 어떤 아버지였을까. 아내에겐 어떤 남자로 기억됐을까. 두 번이나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던 그의 비범한 삶 속으로 들어간다.
서자 신분에 가로막혀 김상우는 현달(顯達)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충남 예산의 김정희 고택엔 아들 김상우의 자취가 역력하다. ‘石年(석년)’이라 쓰인 돌기둥이다. 해시계를 올려놓았던 돌기둥 아래쪽에 그의 이름 석 자가 깊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깊은 사랑은 시간을 초월해 지금도 우리 앞에 서 있다.
文字香과 書卷氣
양반 아버지는 서자 아들에게 비법을 전수하고자 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터득한 난초 치기와 서법의 요체를 알려줬다. 그것이 한낱 기예였다는 오해는 금물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주문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그들 부자의 삶은 예술에 바쳐졌다. 하지만 그들의 예술은 학문적 단련을 토대로 했다. 오늘날의 예술과는 입각점이 달랐다.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시절(1840~1848) 아들 상우에게 난초 그림의 근본을 가르쳤다. 서신을 통해서였다. ‘완당전집’ 제2권의 ‘우아에게 주다(與佑兒)’가 그것인데, 아버지는 그 서두를 이렇게 뽑았다. “난(蘭)을 치는 법은 예서(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우니라. 반드시 문자(文字)의 향기와 서권(書卷)의 정취가 있은 다음에야 제대로 되는 것이다.” 독서와 학문이 부족하면 그림에든 글씨에든 선비의 기상을 담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난을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식으로 하면 절대 안 된다. 그림 그리듯이 난을 치려거든 아예 손도 대지 말라.” 난초는 정물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조희룡(趙熙龍) 등은 나에게 난 치는 법을 배웠다고 하지만, 끝내 그림 그리는 방식에 머물렀다. 그의 가슴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어서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난을 친다는 행위는 학식 없는 화가의 일이 아니요, 선비의 인품과 절개를 종이 위에 옮기는 일이라고 언명한 것이다. 김상우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도 “난은 화도(畫道)에 있어 특별히 한 격을 갖춘 것. 가슴 속에 서권기(書卷氣)를 지녀야만 붓을 댈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세기 조선에선 난초의 화법을 둘러싼 미학적 논쟁이 격렬했다. 김정희는 한때의 제자였던 유명 화가 조희룡이 난초 그림을 정물화로 접근하는 것에 반대했다. 김상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의적(寫意的) 추상화로서 난초 치기를 배웠다. 추상화라지만 거기에도 기법은 있다. 아버지는 그 점을 이렇게 일렀다.
“난을 치는 묘리를 터득해야 한다. 반드시 붓을 세 번 굴리는[三轉] 방식을 지켜야 한다. 네가 그려서 보낸 난초를 살펴보니, 붓을 한 번에 죽 긋고는 말았구나. 붓을 세 번 굴리는 방법을 깊이 연구하거라. 요즘 난을 좀 친다고 하는 이들 중엔 세 번 굴리는 묘법을 아는 이가 없다. 제멋대로 먹칠을 하고 있다!”
절망 속 아들을 구한 사랑
김정희의 삼전법은 김상우, 그리고 집안 조카인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 흥선대원군)을 통해 후세로 이어졌다. 김상우보다 세 살 아래인 이하응은 김정희의 이종사촌인 남연군의 아들이었다. 1853년(철종 4) 정월, 김정희는 33세의 조카 이하응에게 난초화의 요령을 이렇게 가르쳤다.“(난을 치는 것은) 한낱 작은 기예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전력을 기울여 공부한다는 점에서 성인(聖人)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와 다를 것이 없소. (…)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상스런 서화가나 마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오. ‘가슴속의 책 5000 권’이니 ‘팔 아래 금강(金剛)’과 같은 문자는 모두 여기서 비롯된 말이라오.”(‘석파에게’, ‘완당전집’, 제2권)
아들과 조카는 김정희의 미학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사제전승(師弟傳承)은 아름다웠다.
김정희의 또 다른 장기는 서예였다. 그는 평생의 공부를 아들에게 전수할 요량이었다. 생각 끝에 편지를 보내 아들을 힘써 격려했다(‘우아에게 편지를 쓰다(書示佑兒)’, ‘완당전집’, 제7권).
첫째, 송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서법을 온전히 익히라고 했다. “서법은 예천명(醴泉銘, 당나라 재상 위징(魏徵)이 짓고 훗날 구양순이 쓴 비문)이 아니면 시작도 할 수 없느니라.” 서법에 관해선 이미 많은 참고서가 있으나 글씨의 원본을 정밀히 관찰해 이치를 체득해야 한다고 했다. “예천의 탑본이 남아 있다. 그것이 비록 오랜 세월에 낡고 부스러졌다 하지만 (…) 어찌 이것을 저버리고 다른 것을 구할 수 있겠느냐.”
둘째, 끝없는 노력을 강조했다. 김상우는 글씨 공부가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자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절망감을 적어 유배지의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아들의 마음을 읽은 아버지는 위로의 말을 골랐다. 아버지의 편지는 아들을 낙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했다. 사랑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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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준 인절미는 모두 썩어버렸습니다.”
“장아찌는 그런대로 괜찮으나, 무장아찌는 또 맛이 변했습니다.”
“민어를 연하고 무름한 것으로 가려서 사 보내주시오.”
“어란(魚卵)도 거기서 먹을 만한 것을 구해 보내주시오.”
“좋은 곶감이 거기서는 구하기 쉬울 듯하니, 배편에 4~5접을 보내주시오.”
친절하고 세심한 남편
후세가 인정하는 대학자 김정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자주 등장했다. 그는 성질도 조급해, 아내의 소식이 늦어지면 발을 동동 굴렀다. 예순에 가까운 이 영감님을 우리는 체통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혹평해야 할까. 아내는 이런 남편을 철부지 혹은 귀여운 도련님쯤으로 여긴 것 같다.다른 한편으로 김정희는 너무도 친절하고 세심한 남편이기도 했다. “여름이라 참외가 맛있을 테니 자시기 바라오” 같은 글에선 아내를 아끼는 남편의 마음이 피부에 와 닿는다. 이런 구절도 보인다. “매양 잘 지내노라 하시나 말씀이 미덥지 아니하여, 염려가 무궁하옵니다. 부디 당신 한 몸으로만 알지 마옵고, 2000리 해외에 있는 내 생각을 하셔서 섭생을 잘하시기 바라옵니다.” 1841년 10월 1일, 56세의 김정희가 예안 이씨에게 보낸 편지다.
젊었을 적 김정희는 아내를 속상하게 했다. 평안감사 시절, 44세의 김정희는 평양 기생 죽향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죽향은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결국 염문이 본가에까지 전해져 아내가 편지로 항의했다. 김정희는 시치미를 뗐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문을 믿지 마오. 부디 내 말을 믿어주오.”
그는 곧 죽향과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할 땐 기생 첩을 두어 서자를 낳기도 했으니, 그만하면 ‘전과’는 충분했다. 그런 그였으나, 8년간의 제주도 유배 시절엔 첩을 두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아내를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남편의 권위 같은 것을 내세운 적도 없다. 아내는 늘 병약했으나 김정희는 그런 아내를 염려하고 그리워했다. 그 아내가 멀리 귀양 간 남편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1842년 11월 13일). 부음을 받은 김정희는 통곡했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소. 먼저 죽는 것이 무에 유쾌하고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나로 하여금 두 눈 빤히 뜨고 홀로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도 같고 먼 하늘도 같은 원한이 끝도 없습니다.”(‘부인 예안 이씨 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 ‘완당전집’, 제7권)
평범한 일상의 의미
71세를 일기로 김정희가 작고하자 세평은 이러했다.“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다. 그러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서 갖은 풍상에 시달렸다. 세상에 쓰이기도 했지만 버림을 받기도 했다. (…) 세상 사람들은 그를 송나라 시인 소동파와 같다고 말한다.”(‘철종실록’, 제8권, 철종 7년 10월 10일)
김정희가 정치적 풍파에서 벗어난 것은 60대 후반이다. 말년의 그는 경기도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렀다. 작고하기 2개월 전, 그는 의미심장한 대련(對聯) 한 구절을 세상에 남겼다. 지인 행농(杏農) 유기환(兪麒煥)을 위해 썼다고 하는데, 실은 후세를 위한 천재 예술가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오(大烹豆腐瓜薑菜),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면 족하다(高會夫妻兒女孫).
이 대련에 김정희는 몇 줄의 설명을 붙였다. “이것이 시골 늙은이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큼 큰 커다란 황금인(黃金印)을 차고, 음식상을 한 길 높이로 차리더라도 (…) 이 맛을 즐길 수 있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조선 최고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이조판서에 오르는 등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파란만장한 삶을 견뎌야 했던 김정희.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생의 행복은 외면의 성취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의미를 깨치는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가족과의 소박한 일상이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족하다.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