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조선의 아버지들

편지로 잘못 일깨운 ‘한 시대의 아버지’

성리학 최고봉 이황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6-09-20 16: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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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이황은 교육의 힘을 굳게 믿었다. 자제들에게도 사람의 도리부터 깨치도록 가르쳤다. 그래도 언행에서 잘못이 눈에 띄면 야단치는 법 없이 조용히 타이르고 훈계했다. 집안에선 큰소리 나는 법이 없었고 안팎이 화목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을 모를 사람은 없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에 그가 있었다. 그는 요즘말로 ‘꼰대질’ 하는 선비가 아니었다. 유유자적하는 신선과도 같았다. ‘도산에서 뜻을 말하다’라는 시를 보라. 그러한 풍모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서당이 반이나 지어져 절로 기쁘구나(自喜山堂半已成)

    산속에서 살면서도 몸소 밭갈이는 하지 않았지(山居猶得免躬耕)

    책을 하나씩 옮기고 보니 상자가 다 비어간다(移書稍稍舊龕盡)



    대나무 심자 죽순 새로 돋는구나(植竹看看新筍生)

    샘물 소리, 밤의 정적 깨는 줄도 모르겠네(未覺泉聲妨夜靜)

    산빛 아름다운 맑은 아침, 더더욱 좋아라(更憐山色好朝晴)

    예부터 숲속 선비는 만사를 잊고 이름 숨긴 뜻을 이제야 알겠네(方知自古中林士 萬事渾忘欲晦名)



    이황은 순수한 시정의 소유자였다. 제자 정유일의 시평이 정곡을 찌른다.

    “이황의 시는 맑고 엄하며 간결하고 담박하다. 그는 젊어서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고, 노년에는 주자(朱子)의 시를 사랑했다. 선생의 시는 마치 그분들의 붓끝에서 나온 것처럼 품격이 높았다.”



    제자 눈에 비친 일상

    많은 제자에게 그는 지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언행록’ 등 이황의 일상생활을 증언하는 기록이 충실한 이유다. ‘언행록’과 정유일의 증언 등에 따르면, 선생은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났다. 의관을 갖추고 서재에 들어가 자세를 가다듬고 단정히 앉았다. 그러고는 꼿꼿이 앉아 종일 책을 읽었다. 때로 조용히 생각에 잠기거나 나지막하게 시를 읊기도 했다.

    이황의 책상은 말끔하고 깨끗했다. 벽을 가득 메운 책들도 순서에 맞춰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더러 피곤을 느끼면 잠깐 강가의 누대로 갔다. 책상에 기대 잠시 쉬기도 했다.

    그의 말씨는 부드럽고 화목했다. 어느 누구와도 다투지 않았다. 그러나 고위관리, 즉 대부(大夫)들과 국가 현안을 논의할 때만은 달랐다. 이황은 정색을 하고 끝까지 시비를 따져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고자 애썼다. 언변이 유창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문적 토론을 벌일 때는 달랐다. 그 주장이 통쾌했고, 의심스럽거나 불분명한 표현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이런 말이 어쩌면 의외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황은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진정으로 추구했다. 자신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해 더욱 그랬던 걸까. ‘퇴계선생연보’에 따르면, 이황은 21세 때 허씨 부인과 결혼했다. 두 해가 지나 큰아들 준(寯)이 태어났고, 다시 4년이 지나 둘째 아들 채(寀)를 얻었다. 하지만 산고 때문인지 허씨는 곧 세상을 떴다. 이황의 나이 27세 때 일이다.

    3년 뒤, 이황은 봉사 권질(權礩)의 딸과 재혼했다. 그런데 권씨에겐 깊은 병이 있었다. 자녀도 출산하지 못했고, 이황과 뜻이 잘 맞지도 않았다. 훗날 이황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불편했던 속내를 이렇게 털어놨다.



    나는 두 번 장가들었지만 늘 불행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탓하는 야박한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지낸 날이 수십 년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몹시 괴롭고 심란해 참지 못할 지경이 된 적도 있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대륜(大倫)을 가볍게 여겨(즉 이혼해서), 홀로 계신 어머님께 근심을 끼칠 수야 있었겠습니까.

    -‘이평숙에게 주다’, ‘퇴계선생문집’, 제37권



    남편의 도리는 ‘공경’

    그는 자신의 불우함을 통해 조화로운 부부 생활의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깨친 사람이다. 1560년(명종 15), 예순 살이 된 그는 갓 결혼한 손자 이안도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다. 아무리 친하고 지극히 가깝더라도 서로 정말 바른 태도로 지극히 삼가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부부 관계가 깨져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이황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예로 섬기고 공경하는 법을 다 잊어버렸다.” 그 해결책은 무엇일까. “집안을 바르게 하려면 마땅히 시작을 조심해야 한다. 너는 천 번, 만 번 경계하여라.”(‘손자 안도(安道)에게 주다’, ‘퇴계선생문집’, 제40권)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듯, 16세기 조선 사회에서도 파탄 지경에 이른 부부 관계는 흔히 발견된다. 이황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코 행복한 부부 생활을 누렸다고 할 수 없는 그로서는 문제의 본질을 곰곰이 생각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세상에는 아내를 박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부간의 정의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남편의 책임이 크다는 말이다.

    부부 관계로 갈등하다가 스승에게 조언을 구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승은 친절하게 장문의 답장을 써 제자를 일깨우고 격려했다. 이황은 결혼 파탄의 책임을 남편에게서 찾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남편이 반성하여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힘을 다해 부부의 도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대륜(大倫)이 무너지는 지경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황은 당시 여성의 사회적 처지가 특히 열악하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했다. “옛날에는 쫓겨난 부인이라도 다시 시집갈 길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칠거지악을 저지른 아내를 친정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다릅니다. 부인들이 일부종사(一夫從事)로 일생을 마치게 됐으니, 설사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그런 이유로 아내를 타인처럼 취급하거나 원수처럼 대하면 안 됩니다.”

    제자에게 보낸 답장에서 이황은, 남편이 “거듭 깊이 생각하여 경계하고 시정하는 것”이 답이라고 일깨웠다. 그러면서 사안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부부 문제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학문한다고 하겠으며, 무엇을 실천한다고 말하겠습니까.”(‘이평숙에게 주다’, ‘퇴계선생문집’, 제37권) 선비라면 누구나 아내와 평생 동안 서로 공경해 화목한 가정을 이뤄야 한다. 이황은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도 끝까지 실천했다.



    공부와 살림살이

    이황은 음식을 먹을 때 수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언행록’에 따르면, 그의 밥상에 오른 반찬은 3가지를 넘지 않았다. 여름에는 건포 한 가지일 때도 있었다. 김성일은 스승을 모시고 서당에서 함께 식사할 때 가지잎, 무, 미역 반찬뿐이었다고 회상했다.

    반찬에 관한 일화가 없을 수 없다. 이황이 벼슬하느라 서울의 서쪽에 살 때였다. 좌의정 권철이 방문했다. 식사 때가 되자 밥상이 나왔는데, 특별한 반찬은 하나도 없었다. 이황은 평소처럼 진미를 맛본 듯 맛있게 먹었다. 거친 음식에 익숙지 않은 정승은 젓가락만 들었다 놓았다 할 뿐이었다.

    누구보다 검소한 이황이었지만, 경제생활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농사나 누에 치는 일을 등한히 여긴 적이 없다. 집안의 1년 수입을 헤아려 꼬박꼬박 지출했다. 뜻밖의 일을 고려해 조금이지만 저축도 했다. 하지만 집안이 원래 가난했기에 흉년에는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다. 집이래야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검소하고 절약할 것. 이는 이황이 아들들에게 강조한 살림의 원칙이었다. “살림살이란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의무다. 네 아비인 나도, 평생 그 일에 서툴기는 했다만, 무시하고 모른 체하며 살 수는 없었느니라.” 편지를 통해 자신의 체험을 담담하게 고백하면서 아버지 이황은 살림살이와 공부 2가지를 모두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으로 글공부에 전념하면서, 밖으로 살림살이를 살펴야 한다. 그러면 사풍(士風)이 퇴락하지 않아 (명성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공부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어놓고 살림살이에 정신을 판다면 농부와 다를 것이 없다. 시골의 속된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는 법이다.”(‘언행록’, 제2권)



    종들도 아낀 인격

    가난은 이황으로서도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이 가난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기 너무 안쓰러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가난과 궁핍은 선비의 다반사다. 어찌 마음에 거리낄 것이 있겠느냐. 너의 아비도 평생 이로 인해 남의 비웃음거리가 된 일이 많았다. 그러나 꿋꿋이 참고 순리로 처세하며 수양해야 한다. 그러면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언행록’, 제2권)

    아들만큼이나 가난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너는 의탁할 곳이 없이 (처가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으니 군색하기 짝이 없다. 네 편지를 받아 읽으면 여러 날 동안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털어놨다.

    “부디 괴로움을 참고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저 분수대로 주어진 천명을 기다릴 뿐이다. 가난을 너무 슬퍼하거나 원망하다가 실수를 저질러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언행록’, 제2권)

    16세기 조선 사회는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물려받은 농토와 노비의 많고 적음에 따라 빈부가 결정되다시피 했다. ‘금수저’를 물려받지 못한 가난한 선비는 살아갈 방법이 막연했다. 고통을 참고 견디며 학업에 정진하는 것 말고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 어려웠다.

    이황이 늘 절약을 강조한 건 그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유계(遺戒, 숨을 거둘 때 남긴 가르침)에서 자손들에게 “제사에 유밀과를 쓰지 말라”고 부탁했다. 값비싼 유밀과를 제상(祭床)에 올리면 살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을 깊이 걱정했다.

    빈부 여하를 떠나 조선의 선비는 집안일을 자신이 직접 돌보지 못하고 종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들의 역할을 귀하게 여긴 이황은 남들이 함부로 여기는 종들을 무척 아끼고 인격적으로 대접했다. 제자 우성전이 전하는 바, 이황은 종을 꾸짖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잘못을 하면 조용히 타일렀다.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언행록’, 제2권) 언젠가는 손자 이안도에게 편지를 보내 종들의 처지를 잘 생각해보라고 일깨웠다.

    “네가 유모로 택한 여종은 아직 3, 4개월밖에 안 되는 자기의 어린애를 여기에 놔두고 (네가 있는) 서울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아이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일 그 사람을 꼭 데려가고 싶거든 그 어린아이도 함께 데리고 가게 해라. 두 아이를 함께 기르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싶다.”

    주인을 위해 심신의 노고를 아끼지 않는 종들을 인간답게 대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군자의 길에서 스스로 멀어지는 짓이다. 이황은 그렇게 확신한 게 틀림없다.



    조용히 거듭 타일러

    누구든지 배우지 못하면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이황은 교육의 힘을 굳게 믿었다. 자제들에게도 사람의 도리부터 깨치도록 ‘효경’과 ‘소학’을 먼저 가르쳤다. 그런 다음에 차츰 사서(四書)를 읽게 했다.

    그렇게 가르쳤어도 자제들의 언행에서 잘못이 눈에 띄면 어떻게 했을까. 이황은 마구 야단치는 법이 없었다. 거듭해서 조용히 타이르고 훈계했다.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황의 집안은 큰소리 나는 법이 없고 안팎이 화목했다(‘언행록’, 제2권).

    자식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지를 썼다. 같은 이야기라도 대놓고 말로 하면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정성이 깃든 편지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공부에 소홀한 젊은 아들에게 아버지 이황이 보낸 편지를 잠깐 읽어보자.



    너는 본래부터 공부에 뜻이 독실하지 못하다. 집에 머물면서 일없이 세월만 보낸다면 더더욱 공부를 망치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서둘러서 조카 완(完) 또는 독실한 뜻을 품은 친구와 더불어 책을 짊어지고 절에 올라가거라. 한겨울 동안 부지런히 공부하여라.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유수 같아 한번 흘러가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우니라. 내 말을 천만번 마음에 새겨 소홀히 하지 말라.

    -‘언행록’, 제2권

     

    아버지의 이런 편지를 손에 받아 쥐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송세월하는 아들은 없으리라. 간절한 뜻은 통하기 마련이다. 이황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훈도에 따라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훗날 이황은 손자 이안도의 교육에도 공을 들였다. “들으니, 몽아(蒙兒, 이안도의 아명)는 아직 집안에 있다고 한다. ‘예기’에 따르면, ‘남자는 열 살이 되면 집을 떠나 스승에게 배우고 바깥에서 거처한다’ 했다. 이제 아이가 벌써 열서너 살이나 됐는데, 아직도 바깥에 나가지 않으니 될 일이냐.”

    당시 큰아들 이준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난 행위를 또 하고 있었다. 이황은 편지에서 그 점을 지적했다. “또 내가 들으니, 무당이 자주 집을 드나든다는구나. 가법(家法)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나의 어머니 때부터는 전혀 무당을 섬기지 않았다. 나 역시 언제나 그것을 금해 무당이 드나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순히 옛 어른의 가르침대로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가법은 무너뜨리면 안 되는 법이다. 어찌하여 너는 이런 뜻도 모르고, 경솔히 고치려 드느냐.”(‘언행록’, 제2권)

    아들은 집안의 전통을 무시하고 함부로 무당을 집 안에 끌어들였다. 이황의 상심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차분한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 아들의 잘못을 깨우쳤다. 아들은 송구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벼슬은 뒷전

    이황은 34세 때인 1534년(중종 29) 문과시험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처가인 안동 권씨 집안의 영향이 있었다. 장인 권질은 기묘사화(1519)에 희생된 정언 권전(權磌)의 친형이다. 그 때문에 권력층은 이황을 꺼렸다. 또한 이황은 세력가 김안로의 면담 요청을 거절해 미움을 샀다. 나중엔 친형 이해(李瀣·1496~1550, 호 溫溪)도 김안로의 모함으로 유배 길에서 객사했다. 혼탁한 세상에 이황은 어울리지 않았다. 일찍이 그의 모친 박씨는 “높은 벼슬에 나아가지 말라.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까 두렵다”고 앞일을 내다봤다.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그에겐 관직이 거듭 주어졌지만 이황의 뜻은 부귀공명을 벗어나 있었다. 43세 되던 1543년(중종 38), 친구 김인후를 전송한 시에서 그는 “부귀영화란 내게 뜬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황은 50세 때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발걸음이 더러 조정에 미쳤으나, 마음은 늘 전원에 있었다.

    1570년(선조 3), 노쇠한 이황은 세상 떠날 준비를 했다. 별세하기 엿새 전, 그는 사람들에게 빌린 책을 되돌려줬다. 나흘 전엔 제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내가 그동안 잘못된 견해로 제군들을 종일토록 가르쳤구나.”(‘언행록’, 제5권) 떠날 날이 되자, 아끼던 매화 화분에 물을 듬뿍 주게 했다. 얼마 뒤 그는 똑바로 앉은 채 운명했다(‘언행록’, 제5권).

    배움이 없는 백성과 종들도 애도했다. 여러 날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장례에는 사대부만 해도 300명이 모였다. 그는 한 시대의 아버지였다.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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