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우로 갈려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 같은 전쟁을 겪은 후,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평범한 봉급쟁이로 변신했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시계추 같은 생활이 시작됐다.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친구를 사귀는 일도 드물었다. 집은 아버지에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던 것 같다.
1988년 나의 연세대 석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아버지 윤병철과 어머니 김숙.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우리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분들의 세대가 살아온 삶과 비교해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우리의 삶이 희로애락이 짧게 교차되는 ‘시트콤’ 같다면 아버지 세대의 삶은 장강처럼 유유히 흘러온 ‘대하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윤병철(尹炳哲)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1921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몰락한 선비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김숙(金淑)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1920년생이다. 우리 형제는 7남매인데 내 위로 형이 세 명, 아래로 여동생이 세 명 있다.
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태어나 전후의 폐허와 가난, 그리고 무질서를 모두 체험하였고 산업화 과정을 거쳐 최첨단 디지털 시대의 혜택까지 누리고 있다. 물론 나의 부모는 혹독했던 식민지 시대와 끊임없이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던 전쟁을 뚫고 나온 분들이다.
나이 숫자만큼 회초리 들어
인간은 인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특히 부모는 유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식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몇 년 전 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어머니라고 쓴 적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모나 성격, 생활태도 면에서 크게 달랐다. 어머니는 체구가 크고 성격이 활달해서 사교적이며 유머감각이 있는 분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체구가 아담하고 성격이 깐깐하며 완고한 데다 사람 사귀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평생 봉급생활자로 살아오면서 7남매를 키워왔으니 가정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게다가 교조적이고 엄격한 성격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형제들 중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하기라도 하면 모두가 아버지 앞에서 종아리를 걷고 나이 숫자만큼 회초리를 맞곤 했다. 형제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 정도로 엄한 아버지였기 때문에 다정다감하게 대화할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도 우리 남매들이 신나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의 유머와 재치, 칭찬과 위로가 집안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곤 하였다.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너희들이 어렸을 적에 웬 도인이 우리집을 찾아왔기에 쌀을 퍼주었더니 그 도인 말씀이 ‘앞으로 자식들 중 한 명은 반드시 왕이 될 테니 잘 기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힘들어도 자식들이 잘될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다 참을 수 있어. 그런데 너희들 중에 누가 왕이 될까?”
나는 이 이야기를 수백 번도 넘게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이 말씀은 우리 형제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 그대로 아버지한테 야단맞고 어머니로부터 위안받으면서 자라온 것이다. 어머니는 10년 전 7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고 그 때 나는 울면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도 무섭고 어려운 아버지
우리 형제들은 지금도 아버지를 무서워한다. 어려워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다소간 심리적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내가 어머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혼자 사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치 대하드라마의 비극적 주인공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업학교를 마친 후 시험을 치러 군청 공무원이 되었다. 선비정신을 강조해온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관존민비 사상이 여전히 남아 있고 아직 유교사상이 의식을 지배하던 시절이라 박봉의 말단 공무원이었음에도 아버지는 공직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6·25 전쟁이 터지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는 일이 발생했다.
공산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된 것이다. 하루하루 초조함 속에 사형 집행 날짜만 기다리던 아버지는 당시 인민위원회 간부로 있던 외할아버지 친구의 아들을 만나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밤중에 몰래 풀어주는 바람에 허겁지겁 집으로 오다가 검문에 걸려 다시 잡혀 들어가게 됐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셨다 한다. 그러나 갇혀 있던 동안 아버지는 모진 구타와 고문을 당해 지금까지도 곳곳에 흉터가 남아 있다. 불행히도 아버지를 살려주었던 사람은 수복 이후 좌익활동을 이유로 처형됐다고 한다.
이처럼 우파라고 죽이고 좌파라고 처형하는, 지옥 같은 전쟁을 겪고 난 후 아버지는 직업을 바꿨다. 지금은 한전으로 통합된 ‘남한전기’에 들어가 평생 봉급생활을 한 것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위 관리자로 근무하면서도 아버지도 성실하게 집과 직장을 오가는 시계추 같은 생활을 하였다.
지금도 어렸을 적 아버지 출근시간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 4형제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5부자 출동’이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앞서 나가시면 아들 4형제가 까만 교복차림으로 그 뒤를 따랐다.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지만 5부자가 함께 걸어나가다 보면 왠지 모를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체격 좋고 괄괄한 성격의 형님들 덕분에 항상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퇴근 후에도 아버지는 언제나 뒤도 안 돌아본 채 곧장 집으로 오셨다. 이런저런 약속도 있으셨을텐데 희한하게도 다 뿌리치고 집으로 오시는 것이었다. 일찍 들어오셨다고 해서 집안일을 돕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마당 화단에 물을 뿌리는 정도였고, 그 밖에는 늘 조용히 앉아계셨다. 술은 원래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취해서 집에 돌아오시는 날은 일년에 몇 번 정도로 손꼽을 정도였다. 집에 와서 자식들에게는 늘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만 하셨다.
낭만도 희망도 없어 보이던 분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게 집은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던 것 같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그일 이후 아버지는 사람들을 가려서 사귀셨고 경계심 또한 다소 커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 중의 하나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유를 충분히 알 만하다. 6·25전쟁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나 믿고 지낸 사람들이 서로 밀고하고 죽이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생활습관 또한 전쟁이 남긴 비극인 것이다.
아버지의 생활 철학은 ‘안전하게 살자’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복잡한 일에는 끼여들지 않았고 아무하고나 사귀지도 않았다. 그뿐인가. 무엇이든지 불확실한 것은 건드리지도 않았으며, 공짜를 바라는 것은 사고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내가 살아남아야 처자식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분명했던 아버지는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었던 그 가난했던 시절에도 돈봉투 한 번 들고 오는 법이 없었다.
처자식 잘 먹이고 입히고 싶은 마음이야 없었겠는가만 돈에는 누구보다도 엄격했다. 한창 자라나던 시기의 우리 형제들이 보기에 아버지는 한마디로 재미도 없고 낭만도 없고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런 분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나에게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결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데다 부부간에 애정표현도 안 하는 것은 물론,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없고 고스톱도 안 치고 담배도 안 피우는 아버지. 어린 내 눈에는 차라리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백구두를 신는, 겉멋이 든 건달 같은 아버지가 부드러워보였다.
공부를 해서 출세를 하든지, 장사나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든지, 아니면 친구들하고 화끈하게 놀든지, 그것도 아니면 마누라와 자식 데리고 놀러라도 다니면서 사는 듯이 살아야지 왜 저렇게 소심하게 기계적으로 살아갈까 하는 것이 청소년 시절 내내 나의 불만사항 이었다. 오늘날까지 내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봐도 이 시절 아버지가 보여준 반면교사 효과가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反面敎師 효과
나는 공군장교로 군 생활을 마친 후 당시 최고의 인기 직장이던 종합무역상사 기획실에 근무하다가 일찌감치 사표를 내고 지식산업에 뛰어들었다. 평생을 봉급쟁이로만 살았던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들 일이라면 발벗고 뛰어다녔고 사교모임에도 자주 나갔다. 남이 뭐라고 하든 간에 아내 자랑을 하고 다녔고, 적극적으로 애정 표현도 하면서 살고 있다. 아들 딸에게는 싫은 소리를 잘 안 하는 편이고 유머와 농담도 자주 한다.
아들 딸이 어렸을 때는 퇴근 무렵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들을 등에 업고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씩 돌아다니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맹렬하게, 열정적으로, 다정다감하게, 긍정적으로’와 같은 덕목들이 내 생활신조였다. 물론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오히려 아버지는 이와는 정반대로 살아오면서 결과적으로 나를 각성시킨 것이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어느 정도 벗어던진 것은 군에 입대할 무렵이었다. 촌놈이 공부 열심히 해 고려대에 입학했을 때도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던 아버지는 내가 공군장교 시험에 합격하고 소위로 임관하자 얼굴빛이 달라졌다. ‘드디어 우리 집안에서 국군 장교가 나왔다’며 마치 장군이라도 탄생한 것처럼 기뻐하셨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의 삶에서 6·25가 준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만 만나면 술잔을 앞에 놓고 6·25 때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곤 하셨다. 물론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 나라를 잘 지켜야 한다.”
“학생은 공부 열심히 하고, 군인은 나라 잘 지키고, 사업가는 수출 잘 하면 된다.”
이런 ‘교조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가 겪었던 그 시대의 고통을 짐작하게 됐고, 어려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생활태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TV뉴스를 보다가 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만 나오면 아버지는 늘 불안해하셨다. 1980년대 초 학생데모가 늘어났을 때는 아예 해외로 이민 가자는 말도 꺼내셨다. 전쟁이 또 나면 다 죽는다는 것이었다.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면 일부러 사복을 입지 않고 군복을 입었다. 아버지가 군복입은 모습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7남매 중 나를 유독 좋아하셨다. 거의 편애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마도 20대 후반 이후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데모 심해지자 “이민 가자”
아버지는 자식들을 만나면 늘 시국 현안을 놓고 흥분하시곤 했는데, 다른 형제들은 대개 아버지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토론에서 논리적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심리적 불안감을 털어내려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늘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주고 박자까지 맞춰드렸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할 때만큼은 늘 신바람이 났었다. 반면 형님들은 이런 말을 해서 아버지의 화를 돋우곤 하였다.
“아버지, 애들이 데모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없어요.”
나도 아버지의 견해가 다 맞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심리적 에너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한번도 아버지의 의견을 반박한 적이 없다.
효도란게 무엇인가.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 이것이 가장 간결한 효도의 개념 아닌가.
내가 효도하는 길은 마음껏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도 없는 아버지가 열변을 토해 내도록 도와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막내아들만 만나면 늘 말씀이 많아지신다.
자식이 철들면 부모가 늙는다고 했던가. 이제 아버지 연세도 8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분석을 좋아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나지만 아버지 앞에서만큼은 이성적 욕구를 잠재우고 감성적인 태도로 앉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버지는 이제 마음속으로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는 분이다. 나는 요즘 아버지 연배가 되는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한 분 한 분이 대하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오신 분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한 분들이다. 그래서 특별히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 아니라면 우리나라의 모든 노인들은 국민훈장을 받을 자격을 가진 분들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10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의 생활태도는 여전히 엄격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규칙적인 일과를 정해놓고 이를 실천하며 사신다. 달라진 게 있다면 어머니에 대한 재평가다. 아버지는 요즘 들어 유난히 어머니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네 엄마처럼 훌륭한 사람은 없었다” “네 엄마 덕에 그동안 집안살림 꾸려왔다” “네 엄마가 참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같은 이야기다. 그러면 자식과 며느리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살아계실 때 잘 하셨으면 좋았죠.”
나는 강의와 방송 등 바쁜 일정 때문에 용인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자주 들르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씩 산소에 가보면 늘 꽃이 놓여 있다. 아버지가 다녀가신 것이다. 나는 산소 앞에 앉아서 가만히 어린 시절을 회상해본다. 늘 생각해온 것처럼 어머니는 나에게 많은 장점을 남겨주고 아버지는 나에게 과연 반면교사 역할만 한 것일까.
“바람피우기는 틀렸어”
요즘 나는 아버지가 고맙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아버지가 반면교사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거울 역할을 한 것도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고스톱은 안 친지 오래 돼서 이제는 규칙도 잊어버렸다. 금전적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고 공짜는 더더욱 싫어한다. 룸살롱은 질색이고 노래방도 별로다.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이어받은 셈이다.
사회생활의 범위가 넓고 방송국 출입도 잦다 보니 이런저런 여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지만 아내는 남녀문제만큼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시아버지의 행동을 보면 나 역시 바람피우기는 틀렸다는 것이다.
디지털 투명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MQ(도덕성지능지수·Moral Intelli- gence Quotient)가 높아야 하는데, MQ는 IQ와 달리 유전적 영향보다는 후천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 하버드대 로버트 콜스 교수의 주장이다.
특히 MQ는 부모나 교사, 선배, 상사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아버지로부터 MQ훈련을 단단히 받은 셈이다. 나는 요즘 뒤늦게 아버지에게 작은 효도를 하고 있다. 6년간 진행해온 KBS 제1라디오 일일 시사 프로그램 ‘생방송 오늘’에 이어 지난해부터는 교통방송에서 ‘윤은기의 굿모닝서울’이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매일같이 진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 방송의 열렬한 애청자다. 방송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목소리가 탁하거나 쉰 듯하면 곧 전화를 걸어 감기에 걸렸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경동시장에 가서 한약재를 사서 보내주시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깐깐하고 차갑던 옛날의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버지의 회초리를 맞으며 그 손에 힘이 빠진 것을 알고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는 옛 선비의 마음을 이제는 나도 이해할 것 같다.
요즘도 한 달에 한두 번 함께 외식을 하면 아버지는 옛날 이야기를 꺼내신다. 이제는 하도 들어서 다 외우고 있는 스토리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이야기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결국 아버지가 때로는 반면교사로서 또 때로는 삶의 거울로서 오늘의 나를 만든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산소에 심어진 국화꽃
친구들은 나를 ‘자수성가형’이라고 말한다. 정말 악착같이 열심히 노력하더니 성공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20대 이후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보다 3배 이상 일했다고 자부한다. 적게 자고 열심히 일했고 수많은 책을 보고 2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다. 10년 이상 수십 편의 방송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활동했고 수십만 명의 학생, 직장인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강의를 해왔다.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대학시절부터 학비는 벌어서 다녔고 군대생활도 봉급을 받아가면서 했다. 부모로부터는 단 한 푼도 상속받은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수성가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부모님은 분명 내게 유산을 물려주셨다. 물질적 유산이 아닌 정신적 유산이다.
그동안 나는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생길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나이가 한 살씩 먹어가면서 이제는 아버지의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나의 인생, 나의 드라마 속에 아버지가 더욱 큰 배역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추석 연휴가 끝난 후 용인에 있는 어머니 산소를 혼자 찾았다. 언제나처럼 국화가 새로 심어져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내가 태어난 것이나 살아온 일도, 또 앞으로 살아갈 일은 모두 한 편의 드라마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한 아버지는 이 드라마의 제작자이자 출연자인 동시에 연출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