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서울의 맛을 찾아서 : 2010년 3월의 일기

  • 최영미│ ymchoi30@hotmail.com│

    입력2010-06-03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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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미 시인이 속초 춘천을 전전하다 15년 만에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시인은 서울 구석구석을 다시 발견하느라 바쁘다. 이방인 눈에 비친 서울 이야기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춘천에서 만 2년하고도 3개월을 살고, 나는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아침부터 대기가 축축하더니, 짐을 싣고 정든 집을 떠날 무렵에 빗줄기가 굵어졌다. 비 오는 날의 심란한 이사였지만 일꾼들을 잘 만난데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일을 치렀다. 나의 새집에서 가까운 곳에 작업실을 차려놓고 수예품 공방을 경영하는 Y가 목욕탕청소를 하고 짐정리를 도와주었다. 현관에 번호 키를 단 뒤에 그녀의 차로 동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마치자, 피곤이 밀려들었다. 나와 함께 이사먼지를 마신 친구들과 근처의 중국집에 가서 거나하게 상을 벌려 먹고 마셨다.

    집 좋더라. 전망도 끝내주고. 글 잘 써지겠다.

    친구들의 덕담에 취해, 술기운에 취해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벽지가 지저분했다. 보일러가 노출된 베란다에서는 폐가스 냄새가 진동하고, 수도를 틀면 한참 기다려야 온수가 나왔다. 청소기를 돌리자 어딘가에 숨어있던 벌레들이 하나둘 나와서 꿈틀댔다. 귀뚜라미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비실비실 장판 바닥에 죽은 듯 누워 있다 내 손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베란다에 가득했던 짐을 치우자, 더러운 모서리가 드러났다. 시커먼 때가 덕지덕지 눌어붙은 창틀은 걸레로 여러 번 문지르고 닦아도 검은 때가 벗겨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서울’에서 드디어 첫날밤을 보낸 뒤에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뜯어보니 사방이 허물투성이였다. 성인이 된 뒤에 내게 걸린 가장 불결하고 불편한 집에서 앞으로 2년을 살아야 한다니. 또 내가 실수했구나. 산이 보이는 경치에 속아, 낭만에 속아 서둘러 계약한 내가 잘못이었다.

    기다려라. 내가 다 먹어줄 테니

    벽지라도 새로 바꾸면 덜 우울해질 것 같아, 주인을 설득해 기어이 도배를 감행했다.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던 날이었다. 여자프리스케이팅 경기를 편안히 새집에서 보려고 일부러 이사날짜를 하루 앞당겼는데, 춘천에서는 잘만 나오던 텔레비전이 서울에 오자 갑자기 바보가 되어, 화면상태가 좋지 않았다. 주말에 이사 뒤처리를 자청하며 후배들이 와인을 들고 찾아왔다. 내 주위에 매우 희귀한 생활인, 지식인의 머리를 가졌으면서도 살림에 밝은 그들의 민첩한 손을 빌려 가구배치를 다시 하고, 욕실에 커튼을 달고 형광등을 바꾸고 현관문에 걸쇠를 달고 베란다에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자상하게 이것저것 수리한 뒤에도 뭐 더 해줄 일이 없냐고 묻던, 그네들 덕분에 나는 새집에 정을 붙이고 낯선 환경에 그럭저럭 적응해갔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서함 만들기였다. 우체국사서함이 있으면 이사할 때마다 출판사들에 새 주소를 알려주는 번거로움도 피하고, 내가 사는 곳이 노출되어 스토커들의 표적이 되는 위험도 물리칠 수 있으니 여러 면에서 편리했다. 거주지의 관할우체국 사서함에는 빈자리가 없어, 혹시나 해서 중앙우체국에 전화했는데, 희한하게도 빈자리가 있단다. 중심이 오히려 한가하다니. 게다가 사용료도 없다는 말을 듣고 나는 횡재한 기분이었다. 뻔해 보이다가도 가끔 뒤통수를 치는 놀라움을 간직한 나라, 인구 천만이 복작대는 거대도시의 예측 불가능성이 나는 좋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대한민국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내 번호’를 만들기 위해, 안심하고 방랑할 최후의 보루를 확보하기 위해, 나는 명동으로 내달렸다.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초현대식으로 지은 우체국건물 안에 들어가 커다란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하고 나는 마치 서울에 처음 온 촌사람처럼 흥분했다. 2층의 사서함에서 꺼낸 무거운 책들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된다! 어릴 적 아버지의 가게 개업식에 가서 ‘움직이는 계단’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흐뭇한, 감동에 젖어 기분이 요상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완벽한 서울내기다. 부모님을 따라 옥수동에서 북한산 자락까지 참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세검정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정든 평창동을 떠나 홍대 앞의 원룸으로, 그리고 서른네 살에 일산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겨 어영부영 12년을 흘려보내고, 속초와 춘천을 합해 3년. 그리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나는 다시 나의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햇수로 따지면 만 15년 만의 귀환인 셈이다.

    이제 다시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며 우아하게 살아야지. 춘천에서 그리고 일산에서 잃어버린 청춘과 아름다움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지난 10여 년간 내 발에 구두가 신겨진 날이 대체 며칠이나 될라나. 예쁜 구두를 신고 시멘트와 유리의 숲을 활보할 나를 상상하며, 우체국을 나와 근처의 백화점에 들어갔다. 나를 서울로 이끈 가장 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도심의 서정을 즐기며 개운한 만두국물을 들이켜기 위해서. 남산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으며 나는 슬펐던가, 기뻤던가. 서울에 오면 반드시 신세계백화점에서 떡만둣국을 먹고, 지하의 식품매장을 구경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빵을 사고, 그리고 배가 꺼질 만하면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핥는 게 정해진 순서였다. 기차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면 백화점을 나와 시청 앞의 프라자호텔 커피숍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척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지나는 행인들을 관찰했다. 광장을 마주한 면이 통유리로 되어, 안에서 밖을 구경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날씨가 차가운데도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유유히 걸어가는 처녀들. 무거워 보이는 여행 가방을 가뿐히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외국인, 분수대에서 서로 물을 끼얹으며 장난치는 소년들의 싱그러운 볼에 매달린 하얀 웃음. 날씨가 따뜻해지면 데모대에 접수되어 어수선한 시민의 광장. 올 때마다 다른 풍경이 지루하지 않은데다 지하철 1호선이 가까워 약속장소로 나는 그곳을 애용했다.

    중앙을 향한 끝없는 허기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달콤한 것이 당기는 날은 광화문까지 걸어가 일민미술관의 카페에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후식을 야금야금 입에 넣었다. 와플에 아이스크림을 곁들일까 과일을 얹을까, 그것이 늘 문제였다. 이미 배가 부르면 혼자 해치우기 부담스러운 와플 대신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보통 시중에서 파는 애플파이는 애플보다 파이가 더 많은데, 일민카페의 그것은 파이보다 사과가 더 들어가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그만이었다. 뜨거운 빵조각과 위에 얹힌 차가운 아이스크림의 기막힌 조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의 변증법적 조화를 내 혀 밑에서 만끽하며,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포크를 휘두르던 어느 날 나는 알았다.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서울’임을…. 그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 서울의 맛을 즐기려 나는 먼 길을 왔다. 이미 배가 부른데도 이순신 장군 근처를 지나면 배가 고팠다. 신발을 벗고 철퍼덕 주저앉아 밥을 먹는 시골의 밥집에는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나는 신발 벗고 들어가 앉는 식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춘천에 있으면 서울이 가고 싶고, 서울에 있으면 춘천이 그리웠다. 저녁 무렵 경춘선 열차에 올라탄 내 손엔 백화점의 식품매장에서 파는 단과자나 김밥 봉지 따위가 쥐어졌다. 달리는 기차에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간식을 먹은 뒤에는 속이 불편했다. 집에 도착해 음식물을 토해내며 나는 다짐했다. 다음에 서울 가면 절대로 과식하지 말아야지. 먹을거리를 아예 사지 말자고 결심하지만 일주일쯤 뒤에 서울에 다시 도착하면, 과거의 아픈 교훈을 잊고 나는 또 식욕의 포로가 되었다. 중앙을 향한 끝없는 허기, 그게 바로 지방문화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나의 뿌리인 도시로 돌아왔다.

    내 발길이 뜸해진 요 몇 년 사이에 국제도시로 변모한 서울이 신기해 관광객처럼 두리번거렸다. 유럽처럼 아기자기하며 개성적인 상점들이 늘어났고, 간판들이 작아지고, 예쁘게 단장한 거리에 외국인이 많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여자들의 대담한 옷차림에서 세계화의 영향이 감지되었다. 웬 화장품가게가 이리 흔한지. 일본관광객들이 몰리는 명동에는 일본에서 인기라는 저렴한 한국산 비비크림을 파는 화장품 체인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내가 들어간 에튀드하우스 매장의 점원들은 젊은 남자가 대세였다.

    베트남 쌀국수를 비롯해 인도 식당, 네팔 식당, 아프리카 요리 전문점…. 돈만 있으면 서울에서도 전세계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기다려라. 내가 다 먹어줄 테니. 앞으로 한 달은 글은 제쳐두고 오로지 식도락을 위해 나의 시간과 정열과 돈을 바치리라. 작정한 나는 특별한 볼 일이 없는데도 거의 매일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2010년 3월과 4월에 나는 하나의 거대한 입이었다. 버스좌석에 앉아 장시간 흔들린 끝에, 귀가해 자려고 누우면 엉덩이뼈가 슬슬 아팠지만, 그래도 나는 외출을 삼가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은퇴한 지난 10여 년간 만나지 못한 지인들에게 내가 먼저 전화했다.

    나는 ‘서울’을 먹었다

    내가 먹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
    崔 泳 美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저서 : ‘서른 잔치는 끝났다’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 ‘흉터와 무늬’`외 다수


    15년 만의 서울 ‘재입성(再入城)’을 기념하여 광화문 한복판에서 ‘브런치’를 사겠다는 후배들과 파리크로아상에서 아침 10시반에 만나 브런치를 먹은 3월6일 이후, 내 달력은 약속을 지키느라 바빴다. 3월 한 달 동안, 춘천에서의 2년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여럿이 어울리다보니 문득 긴장되며 불쾌한 시간도 있었다. 삼청동의 고급 한정식당에서였던가. 강남의 어느 프랑스 요리 전문점에서였던가. 앉은 순서대로 웨이터에게 정식을 주문하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very well done(고기를 아주 잘 익혀주세요)” 을 듣고, 귀가 멍멍해졌다. 아주 섬세한 ‘very’에 찔린 나는, 문명인들 속에 섞인 야만인처럼 촌스럽게 어리둥절 비틀거렸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서울을 떠나 있었던 게 아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사교계에서 내가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임을 깨닫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 부는 밤거리를 홀로 걷는데 뺨에 닿는 공기가 시원했다. 오랜 허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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