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축구냐 민주화 운동이냐

암울했던 80년대의 단상

  •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입력2004-09-07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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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라도나가 혜성처럼 나타난 82스페인월드컵이 열리던 해, ‘사커키드’는 대학입시에 낙방했다.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느라 축구에 대한 열정조차 품지 못하던 시절, 필자는 분데스리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독문학과에 입학해, 민주화 운동과 축구 사이에서 가슴앓이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나의 미래를 걸자’며 ‘사커키드’가 선택한 곳은 대한축구협회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대학가에 학원자율화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던 시절, 고등학교에서는 빡빡머리를 스포츠형으로 바꿔도 좋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내가 다니던 학교는 머리 단속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사회적 혼란(?)을 틈타 머리를 길렀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날 고3 형들이 점심시간에 우리 교실로 몰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대걸레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고, 1학년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바짝 얼어 있었다. 잠시 후 그중 힘깨나 쓸 법한 한 명이 몽둥이로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이 새끼들이 조금 풀어줬더니 꼴리는 대로 막나가? 민주화, 민주화 하니까 이 새끼들이 보이는 게 없나? 누구 맘대로 머리를 길러? 한놈씩 앞으로 나와!” 주먹이 날아올 때마다 신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유없이 맞아야 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한국의 마라도나’ 정해원

    1980년 당시 축구팬들에게 최고의 관심거리는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과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스타 정해원이었다. 특히 정해원이 수비수 6명을 제치고 터뜨린 골은 오랫동안 화제가 됐다. 정해원은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는데, 연세대는 그해 5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충의(육군)와 맞붙었다.

    정해원은 전반 중반 하프라인 부근에서부터 단독 드리블, 50여m를 질주하며 충의팀 수비수 6명과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성공시켰다. 나는 TV로 이 장면을 보았는데 86멕시코월드컵 잉글랜드전에서 아르헨티나의 ‘축구신동’ 마라도나가 터뜨린 두번째 골에 비길 만하다고 감히 자부한다. 정해원은 그 해 가을 아시안컵 북한전에서도 혼자 두 골을 넣어 2대1 역전승의 주역이 됐다. 온 국민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1980년이었지만, 이 시절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도 있었으니, 정해원 이주일 전두환이 그 주인공이다.



    나라 꼴이야 어찌됐든 한창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이 축구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었다. 특히 우리반은 축구광들이 많아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공을 차며 놀았다. 고1 때 놀지 않으면 놀 시간이 없다는 게 우리의 대의명분이었다. 최고의 조직력을 갖춘 우리반은 다른 반들을 모조리 격파, 초봄에 이미 1학년 리그를 평정했다. 가을부터는 2학년 형들과 시합을 벌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을 받아냈다.

    내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우리반에는 오른쪽을 잘 파고드는 녀석과, 키가 큰 안경잡이 공격수가 있었다. 나는 주로 어시스트를 하고 골은 두 녀석이 넣었다. 내가 오른쪽 윙에게 이어주는 패스는 조광래가 차범근에게 넣어주는 패스에 견줄 만했으며, 내가 최전방으로 찔러주는 공간패스는 영락없이 윤정환의 발끝에서 최용수로 이어지는 콤비플레이를 연상케 했다(이렇게 뻥튀기를 해도 되나?). 그야말로 우리 세 사람은 ‘황금의 삼각편대’였다.

    축구시합은 주로 사이다 아니면 라면내기였다. 신나게 공을 찬 뒤 전리품으로 사이다를 마시며 운동장 나무그늘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일이야말로 고등학교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옆 학교 여학생 중에 누가 제일 예쁘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어느 선생은 왕년에 뒷골목 건달이었다는 둥, 어느 반 아무개 녀석이 사창가에 가봤다는 둥.

    공부는 뒤로 밀어두고 날마다 수업 끝나면 공을 차고, 시간만 나면 영화 보러 다니고, 팝송 듣느라 밤을 새고, 집에서는 공부한다고 책 펴놓고는 축구잡지나 뒤적거리고, 이러다보니 성적이 좋을 리 만무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반에서 5등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추락하기 시작해 급기야 고2 가을에는 반에서 40등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때 아버지는 내 성적표를 쫙 찢어버리고는 “당장 학교 그만두고 공장에 나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어머니도 “공부 안 하려면 밥도 먹지 말라”고 꾸중하셨다.

    1982년 고3이 되자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학이야 어떻게든 들어가겠지만, 나의 목표는 고려대가 아니던가. 어릴 적부터 얼룩무늬 호랑이 유니폼을 입고 뛰는 고려대 축구선수들에 반했던 나는 무조건 고려대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3학년 때는 책상 위에 ‘목표 고려대’라고 크게 써붙여 놓고 공부했다. 성적도 차츰 올랐다.

    그러나 5월이 되면서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그해 6월부터 열린 82스페인월드컵이 내 마음을 살살 유혹했던 것이다. 한달 전부터 TV에선 전 경기 중계방송을 예고하고 있었다. 게다가 월드컵을 보름 앞두고 우리집은 흑백시대를 마감하고 컬러TV를 들여놓았다.

    6월 어느날 전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와 벨기에의 개막전으로 스페인월드컵이 시작됐다. 개막전은 저녁에 TV 녹화중계가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아닌가. 나는 고민했다. 대학을 위해 축구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신나게 축구를 보고 더 열심히 공부하느냐. 몇 시간에 걸친 고뇌 끝에 결단을 내렸다. 축구를 보자! 나의 꿈, 나의 사랑, 아르헨티나 축구를 보지 않고서 학력고사 점수 몇 점 더 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 한 경기만 보고 내일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거 아닌가.

    짝꿍과 함께 자율학습에 불참했다. 핑계는 ‘몸살’과 ‘두통’이었다. 자율학습이라 담임 선생님도 쉽게 허락했다. 내 짝은 축구에 별로 관심이 없던 녀석이었는데 내가 워낙 아르헨티나에 대해 환상적으로 이야기를 해놓은 데다 TV에서 월드컵 분위기까지 띄우다보니 마음이 동했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 8시쯤부터 시작되는 개막전을 보았다. 기대했던 대로 아르헨티나팀은 환상적인 경기를 펼쳤다. 특히 이날 월드컵 무대에 첫선을 보인 마라도나는 화려한 개인기를 뽐내며 벨기에 진영을 헤집고 다녔다. 10만 관중도 아나운서도 해설자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옆에서 같이 보시던 아버지도 “허허, 그놈 참 콩알만한 녀석이 잘하네” 하며 연방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사실 마라도나의 플레이는 1986년 멕시코대회에서 완숙의 경지에 다다랐지만, 재기발랄함이나 파워, 탄력 면에서는 오히려 22세였던 1982년 스페인대회 때 더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특히 예선 두 번째 경기인 헝가리전에서 공을 오른쪽에 놓은 다음 왼발을 오른발 뒤로 옮겨 센터링하던 장면은 신기의 극치였다.

    아르헨티나는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기습골을 허용하면서 벨기에에 0대1로 졌다. 개막전에서 전대회 우승팀이 고전한다는 징크스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보면서 잠시나마 입시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짝꿍 녀석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자율학습 팽개치고 축구 보길 정말 잘했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자기도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팬이 되기로 했다면서 “다음에도 또 땡땡이 치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번 유혹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한동안 축구를 잊고 공부에 몰입했지만, 개막전만 보고 열심히 공부하겠다던 결심이 와장창 흔들렸다. 게다가 최강의 전력으로 꼽히던 서독이 약체 알제리에 1대2로 지는 이변이 연출되면서 내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대부분의 경기는 시차관계로 다음날 밤에 녹화로 보여주었다. 차마 컬러TV가 있는 안방으로 넘어가지는 못하고 사촌누나가 지내던 건넌방에서 봐야만 했다. 소형 흑백TV였지만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부모님이 주무시기를 기다렸다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고 사촌누나 방에 살금살금 들어갔다. 물론 아이스크림은 사촌누나의 입을 막기 위한 ‘뇌물’이었다.

    몰래 본 게임이 더 재미있는 건 당연한 일. 스페인월드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서독과 브라질도 훌륭한 팀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프랑스팀이었다. 힘 안들이고 경기를 술술 풀어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패스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작은 덩치임에도 다른 나라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서독이 다이내믹함, 잉글랜드가 파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발재간을 상징한다면, 프랑스 축구는 부드러움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중심에 ‘축구 예술가’ 미셸 플라티니가 있었다. 언제나 셔츠를 밖으로 내놓는 이 곱슬머리 선수야말로 82스페인월드컵을 통해 내가 발견한 최고의 기쁨이었다(포항제철 축구팀은 1982년 월드컵을 단체로 관람했다. 이때 21세의 나이로 참관했던 최순호는 플라티니와 프랑스팀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그가 은퇴한 뒤 프랑스로 축구유학을 떠난 건 스페인월드컵의 추억 때문이다).

    월드컵 결승전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을 세 팀이 있다. 최악의 팀은 역시 1982년 월드컵의 서독팀. 준결승에서 골키퍼 슈마허의 지저분한 반칙으로 승부차기 승리를 낚아챘지만, 실력으로 볼 때 프랑스가 진출해야 마땅했다. 1986년 월드컵의 서독팀도 스타일을 구겼다. 이번에도 준결승에서 프랑스를 꺾었지만 전력상 프랑스가 한 수 위였다. 아마 프랑스가 결승전에 올라갔더라면 아르헨티나의 우승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1990년 월드컵의 아르헨티나. 당시의 구질구질한 승부는 말 안해도 잘 알 것이다.

    대입 낙방과 멕시코 신화

    나는 82스페인월드컵이 끝난 뒤에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푹푹 찌는 여름방학 때도 학교에 나와 공부했다.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엔 뙤약볕 운동장에서 잠깐 공을 차고 샤워를 하면 머리가 맑아졌다. 드디어 학력고사. 잠도 충분히 자고 컨디션도 좋았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2교시에 급하게 수학문제를 풀다가 그만 한 페이지를 그냥 넘기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 객관식이니 그냥 찍는 수밖에. 나중에 확인해 보니 찍었던 수학문제 10개 중 2개가 맞았다.

    나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그날 밤 만취해 난생 처음으로 오바이트를 하고 필름까지 끊어졌다. 다음날 점심 무렵 가까스로 일어났는데, 옆에 어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안아 줘, 엄마!” 어머니의 품에 들어간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음을 추스리고 학원종합반을 다녔다. 1983년 3월2일 토요일. 모든 걸 잊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봄날 오후였다. 오전수업을 마치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연고전 축구 경기를 하는 게 아닌가. 봄철 전국선수권대회 개막경기였는데 축구협회에서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두 팀을 첫판에 맞붙인 것이다. 그때 고려대에는 신연호 김종부 김판근 등 멕시코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신화의 주역들이 신입생으로 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게임을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축구가 좋다지만 어떻게 시험에 떨어진 대학의 경기를 볼 수가 있는가. 게다가 공교롭게도 나랑 같이 공부하던 녀석들은 모두 연대 아니면 고대에 가고, 나만 떨어졌다. 응원단 속에는 친구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순간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범벅이 된 나는 TV를 꺼버리고 방을 뛰쳐나왔다. 그러자 뒤이은 어머니의 목소리. “내년에 합격하면 된다! 그 좋아하는 축구를 왜 안 보노?”

    1983년에도 어김없이 축구가 나를 괴롭혔다. 바로 온 국민을 열광시킨 박종환 축구가 위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박종환 사단이 처음부터 국민적 관심을 끈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이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 첫 경기인 스코틀랜드전에서 0대2로 졌을 때만 해도 일간신문 스포츠면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실릴 정도였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전반전에 일방적으로 몰렸으나 후반전엔 상대를 완전히 압도했다(94미국월드컵 독일전을 연상하면 된다). 경기가 끝나자 멕시코 관중들이 승리한 스코틀랜드를 외면하고 “꼬레아! 꼬레아!”를 외칠 정도였다.

    두번째 경기인 홈팀 멕시코전을 앞두고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은 신연호의 종료 1분전 결승골 덕분에 2대1로 이겼는데, 나는 이 경기가 생중계인 줄 알고 아침부터 난리를 쳤다. 그런데 옆 동네에 살던 사촌누나가 “기룡이 너 참 웃긴다. 두 시간 전에 라디오로 중계한 걸 가지고 왜 그러냐?”고 말해서 허탈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멕시코를 이기고 8강 진출의 가능성이 보이자 매스컴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예선 마지막 경기인 호주전에서 또다시 2대1로 이기자 청소년축구 소식은 9시 뉴스의 톱기사가 돼버렸다. 국제전화로 선수들을 인터뷰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축전이 이어졌다.

    우루과이와의 8강전은 일요일 아침에 열려 온 국민이 지켜보았다. 한국은 일찍이 보지 못한 멋진 경기로 우루과이를 2대1로 눌렀다. 한발 빠른 패스를 구사하다가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붉은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스피드와 기동력이라는 한국축구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최고의 작품이었다.

    브라질과의 준결승전이 열리기 전날 4000만의 관심은 온통 멕시코로 쏠려 있었다. 보름째 단식중인 김영삼씨의 소식은 쏙 들어가 버렸다. 전두환의 우민화정책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던 순간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는 각 반마다 내기가 벌어졌다.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들도 축구 이야기로 한동안 ‘썰’을 풀고 강의를 시작했다. 어느 선생은 칠판에 축구장을 그려놓고 한국선수들을 포지션별로 설명하기도 했다. 수학선생은 자기가 선생님들과의 내기에서 이길 가능성이 몇%인가를 확률 공식으로 따졌다.

    준결승전이 벌어진 날, 나는 학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TV를 봤다. 1대2로 아깝게 졌지만 대단한 선전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패하고도 멕시코 관중들에게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관중들이 운동장을 한바퀴 돌라고 함성을 지를 정도였다. 하지만 진 것은 너무나 열받는 일.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공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학원을 땡땡이치고 뒷산에 올라가 혼자 고함을 지르고 시내를 쏘다니며 분을 삭이고 나서, 저녁이 돼서야 집에 들어왔다.(한국은 비록 4강에 그쳤지만 선수들은 대회 내내 반칙을 하지 않고 깨끗한 플레이를 펼쳤다. 이 때문에 주최측에서는 예정에도 없던 페어플레이상을 주기도 했다).

    1983년부터는 잘 알다시피 ‘슈퍼리그’라는 이름 하에 우리나라에서도 프로축구가 시작됐다. 5개팀으로 출범한 어정쩡하고 무계획적인 프로리그였지만, 어쨌든 프로축구였다. 몇몇 훌륭한 게임도 있었지만 토요일 일요일 연속경기에다 맨땅이나 다름없는 운동장, 시골장터 같은 스탠드 분위기가 싫어 나는 프로축구를 즐기지 않았다. 대학입시에 대한 부담이 가중된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학력고사가 끝난 뒤 나는 고려대 독어독문학과에 지원했다. 분데스리가를 통해 친숙해진 독일의 언어와 문학을 공부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는지 나는 합격했다. 입학을 앞두고 짐을 꾸려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한때 공부를 못하게 발목을 붙잡기도 했던 축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축구는 내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고려대에 입학하면 날마다 축구부 선수들을 볼 줄 알았다. 그런데 한두 달이 지나도록 연습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축구부 기숙사가 본교와 많이 떨어져 있는 데다 학교 운동장이 좁아 아예 경기도 어디에 가서 훈련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학교 대운동장에서 연습게임이라도 하면 몇백 명은 족히 됨직한 재학생들이 스탠드에서 관전했다. 언젠가 한번은 학교 운동장에서 유공팀과 붙었다. 우리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김용세에게 세 골을 먹고 4대0으로 깨졌던 기억이 난다.

    처음 서울로 올라올 때는 이제 모든 걸 잊고 축구구경이나 실컷 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걸, 대학생활이란 것이 좀 바쁜가. 오라는 서클 많지, 고교동기, 중학동기, 향우회 모임에 날마다 술자리다. 하숙집에 들어가서도 동기들과 밤새워 당구쳐야지, 또 교양있는 대학생 행세하려면 책도 좀 읽어야지, 정말이지 한가롭게(?) 축구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1984년 한해 동안 프로축구를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다. 노는 데도 열심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나를 둘러싼 환경이 축구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 무렵은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 4년째를 맞던 시기로 살벌한 폭압정치로 인한 국민들의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외국의 여론도 당연히 좋지 않았다. 그러자 전대통령은 이른바 ‘학원자율화 조치’를 실시해 대학교 안에 상주하던 이른바 ‘짭새’들과 전투경찰들을 철수시켰다. 학도호국단 폐지 등 형식적인 자율권도 몇 개 던져 주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은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전대통령이 아무리 민주화 생색을 내려해도 ‘광주학살’이란 원죄를 모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요일엔 효창운동장으로

    1984년 가을 동대문운동장에서 정기 고연전 축구경기가 열렸다. 고연전 하면 내가 어릴 때부터 선망하던 경기였지만, 그때 나의 머리속에 그러한 낭만은 남아있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시내에서 벌어질 가두시위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어쩔꼬. 경기는 너무나 멋진 명승부였다. 전반에 고대의 박양하가 선취점을 뽑고 앞서 나갔으나 후반 들어 연대의 맹반격이 시작됐다. 골대를 두어 번 맞추더니 종료 10분여를 앞두고 연대가 두골을 뽑아냈다. 최용길의 어시스트로 정동복 김준현이 연속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연대생들은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비록 상대편이었지만 폭발적인 공격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나자 양교생들이 전부 운동장으로 내려와 스크럼을 짜고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어떤 학생은 잔디를 콱콱 밟으며 “이 저주받을 스포츠 우민화의 온상, 썩어 문드러져라!” 하고 소리쳤다. 난 물끄러미 그 학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가 좋긴 하지만 축구장의 잔디를 저렇게 밟아대서야…’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니지. 민주화가 되어 살기좋은 나라가 되면 멋진 잔디구장이 많이 생길거야’하는 생각이 스쳐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다른 대학생 같으면 주말에 어디 놀러가거나 데이트할 생각을 했겠지만 내겐 일요일에 늦잠 자고 일어나 효창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뛰는 내 또래의 대학생 선수들을 보면 알 수 없는 삶의 활력이 느껴졌다.

    대학 2학년이던 1985년에는 86멕시코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전이 한창이었다. 5월의 어느 일요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잠실구장에서 말레이시아와의 경기가 열렸다. 반드시 이겨야 2차 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경기였다.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별로 안 좋은 징조여서 언론에서는 우려의 소리가 높았다.

    집에서 부쳐주는 돈이 다 떨어져 쌀을 살 돈도 없을 때여서 직접 구경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내 자취방엔 TV도 없었다. 다방에 가서 보자니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서울역 대합실이었다. TV 뉴스에서 중요한 경기가 있으면 시민들의 반응을 본다며 가끔 서울역 대합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힌트를 얻었다.

    비록 우리가 이겼기에 망정이지 두 시간 내내 서서 보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한참 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TV 카메라가 와서 찍기 시작했다. 9시 뉴스에 시민들의 모습을 방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고향의 부모님이 혹시나 보면 어쩔까 싶었던 것이다.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열릴 때니까 1985년 6월쯤이었을 것이다. 그날 나를 비롯한 우리 독문과 2학년 몇 명은 변증법 철학 학습토론을 갖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참가자 8명 중 3명이 개인사정으로 모임에 불참하면서 격론이 벌어졌다. 학습을 그대로 강행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고 축구중계 보러 갈 것인가.

    학습 토론을 하자는 쪽의 주장은 이랬다.

    “축구중계가 노리는 목적이 무엇이냐. 국민을 스포츠에 몰입하게 함으로써 정권에 대한 반감을 무디게 하고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자는 것 아니냐. 우리 청년학도가 그런 꾀임에 빠져 이 중요한 시기에 학습을 하지 않는다면 민중에 대한 배반이자 전두환 일당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축구중계 보러 가자는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몇 명이 불참한 상태에서 학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온 국민이 축구를 보고 있으므로 이것은 우민화 정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민족주의, 애국심과 결합하는 것이다. 말로는 민중과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그들이 관심을 갖고 보는 경기를 억지로 외면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당연히 축구 중계 보러가자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를 바랐지만 기회주의적(?) 속성을 발휘하여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싸우다가 저녁시간이 되었다. 나는 일단 밥이라도 먹고 와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식당에 갔는데 마침 TV에서 중계를 하고 있었다. 나의 속셈(?)대로 저녁도 해결하고 중계도 보고, 꿩먹고 알먹고였다. 더구나 당시 고려대에 재학중인 김판근이 결승골을 넣자 우리는 언제 말싸움을 했냐는 듯 “김판근!” “고대!”를 외쳐댔다.

    나는 이따금씩 한국축구의 역사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잡초처럼 질기고 몇 번을 되풀이한 쓰라린 좌절의 역사. 열광적인 환호 속에 파묻히다가도 철저한 무관심 속에 내버려진다. 오늘날 한국 민주화운동의 제단 위에는 수많은 선각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마찬가지로 세계 정상을 향하는 한국축구의 역사에도 수많은 선수들의 한과 열정이 배어 있다.

    벼랑 끝에 몰린 프로축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축구는 조금씩 내 생활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일에 파묻혀 사는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코스 그대로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축구에 대한 열정까지 완전히 꺼진 건 아니었다. 주변에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마저 없어 나는 이따금씩 주말에 혼자서 프로축구를 보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프로축구 경기장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 초반 한국축구는 86멕시코월드컵과 90이탈리아월드컵에 연속으로 출전하면서 외형적으로는 화려하게 포장됐다. 그러나 한국축구를 뒷받침할 프로축구는 완전히 빈사상태였다.

    겨우 200∼300명의 관중이 드문드문 스탠드를 지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잔디보다 모래가 많은 운동장에서 선수들은 오로지 승리를 위해 격투기에 가까운 축구를 했다. 소주 한잔을 걸치고 얼굴이 불그레해진 아저씨들은 찬스를 놓친 선수들에게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운동장 트랙에는 구단이 동원한 밴드와 치어리더들이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 ‘그들만의 응원전’을 벌였다. 심지어 자기 팀이 역전골을 허용하는 참담한 순간에도 앰프에서는 ‘여행을 떠나요.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느 날은 관중들이 응원에 눈길조차 주지 않자 치어리더의 대표격인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관중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분! 박수 좀 쳐주세요. 여러분이 호응해주지 않으면 저 이제 구단에서 잘려요!” 그 애원이 나에게는 마치 벼랑 끝에 놓인 한국 프로축구가 팬들에게 던지는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다.

    그러나 진흙밭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듯이 그 을씨년스럽던 프로축구 판에서도 때로는 명승부가 있었다. 일화와 포철이 우승을 놓고 마지막까지 혈전을 벌이던 1992년 동대문운동장에서의 프로축구 마지막 경기, 포철의 장대 공격수 차상해가 나승화의 멋진 센터링을 받아 LG 골문에 방아찧듯이 헤딩 결승골을 내려꽂는 순간, 포철팬이었던 나는 바바리 코트를 입고 추위에 떨며 서서 보다가 그만 자지러지는 함성을 지르며 껑충껑충 뛰고 말았다.

    초겨울 바람에 담 너머 한양공고의 느티나무 잎들이 동대문운동장 누런 잔디 위에 흩날리던 1994년 11월, 나는 윤상철(LG)과 라데(포철)가 번갈아가며 해트트릭을 기록한 그 날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명보 오빠!”를 외치는 몇 명의 여성팬들을 포함해 불과 500여 명이 지켜보던 그 쓸쓸한 경기장에서 양팀 선수들은 관중 수에 아랑곳하지 않고 젖먹던 힘을 다했다. 나는 그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면서 한국축구의 힘과 기동력, 투지에 매료됐다. 그리고 스탠드 한쪽 구석에 홀로 앉아 한국 축구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다.

    199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에도 PC통신이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엔 기계 만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신문을 보다보니 PC통신 동호인 클럽 중에 ‘축구 동호회’가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는 ‘됐다. 이거다!’ 싶어 당시 한달 월급이었던 거금 100만원을 투자해 컴퓨터를 장만하고 PC통신 설비를 갖추었다.

    1994년 12월20일인가 내가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에 접속하던 날, 내 인생도 새로운 접속을 시도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초고속은커녕 글 한줄 한줄이 천천히 뜨는 통신 속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곳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쏟아낸 한국축구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얘깃거리가 있었다. 나는 나만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외국의 이름없는 선수들을 줄줄 외우는 사커마니아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고, 내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똑같이 털어놓는 젊은이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에 두번째로 놀랐다. 나는 정확히 밤 8시에 접속을 시작해서 새벽 5시에 컴퓨터를 껐다. 겨우 두 시간을 자고 회사에 출근했지만 전혀 졸리지 않았다.

    반복되는 일과와 짜증나는 직장의 인간관계에 지쳐있던 나에게 ‘축구동호회’는 삶의 윤활유였다. 그날부터는 하루하루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회사에서 돌아와 컴퓨터를 켠 순간부터 나는 쾌락의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축구동호회 회원들과는 온라인에서 글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날짜를 정해 함께 축구를 관람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호프집에서 맥주를 들이키며 한국축구의 현실을 개탄하고 ‘축구지사(志士)’의 심정으로 격론을 벌였다.

    모였다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축구 이야기만 하다보니 너무 심하다 싶어 어느 날은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오늘은 절대 축구 이야기 꺼내지 말고 여자 이야기만 하자”고 결정했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여자축구 이야기가 나와 실패하고 말았다.

    이 무렵 위성방송이 본격적으로 수신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이나 남미축구, 그리고 일본 J리그 경기도 TV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진작부터 축구 선진국을 부러워하던 젊은 축구 동호인들에게 위성화면에 비친 세계 최고의 리그경기는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우리보다 축구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온 일본조차도 경기장 시설이나 축구열기, 응원문화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수치스런 것이었다.

    1995년 9월 마라도나가 소속된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팀이 방한하여 우리 대표팀과 경기를 벌이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PC통신에 글을 올려 우리 대표팀 유니폼을 함께 사서 입고 경기장에 가서 응원하자고 제안했다. 경기장에서 자기 나라 대표팀을 응원할 때 선수들과 똑같거나 비슷한 색깔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였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그런 문화가 없었다.

    나의 제안에 호응해 10여 명이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는 스포츠용품 가게에 가서 어깨에 색동 무늬가 있는 아래위 흰색 대표팀 유니폼(그때는 흰색이 주 유니폼이었음)을 구입했다. 며칠 뒤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50여 명의 하이텔 축구 동호회원들은 왼쪽 골대 뒤쪽에 모여 종이가루를 날리며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TV 화면에 잠깐이나마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비록 소수였지만 한국축구 역사상 대표팀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집단적으로 응원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2002년 6월4일 폴란드전이 열리던 날, 나는 부산 스타디움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이 붉은색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수십만의 사람들로 뒤덮인 것을 보면서 ‘한 점의 불꽃이 광야를 불사른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벅차오르는 감격을 이길 수가 없었다.

    1990년대 들어 달라진 우리나라 문화의 특징을 어느 잡지에서는 이렇게 정의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렸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1990년대의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여건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을 해도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달라진 시대상의 반영이다. 음악을 하고자 하는 자신에게 대학입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선언한 서태지의 출현, 고시에 합격하고도 개그맨의 길을 택한 어느 젊은이의 결단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PC통신 축구 동호회 활동을 통해 축구는 자연스럽게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직장생활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어졌다. 더구나 회사의 분위기도 불황으로 인해 갈수록 나빠졌다. 일에 대한 의욕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줄어들었다. 나는 그렇게 무의미하고 안일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내가 좋아하고, 나의 미래를 걸 수 있는 일을 하자!

    1996년 8월 나는 대한축구협회에 원서를 냈고, 운좋게 입사가 확정되어 9월초부터 정식 출근했다. 내가 축구협회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대다수의 주위 분들이 ‘고뇌에 찬 결단’이라며 격려해주었다. 물론 만류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그들은 ‘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사서 고생을 하느냐?’, ‘그 험한(?) 곳에 가서 살아남겠느냐?’, ‘그냥 즐기는 게 좋지, 직접 뛰어들면 오히려 싫어진다’며 신중을 기하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 분들의 말씀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대한축구협회에 들어오고 난 뒤 가장 좋은 것은 축구를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대표팀이 외국에 원정갈 때 가끔씩 동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축구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특히 1997년 5월 일본에서 열린 한일 대표팀 친선경기는 여러 모로 잊을 수 없다. 2002월드컵 공동개최 결정 1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이 경기는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렸는데 경기 시작 수시간 전부터 운동장을 가득 메운 일본 팬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수만명의 관중들이 전부 일본 대표팀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손목에는 일본 축구협회 마크가 새겨진 밴드, 머리에는 머리띠 그리고 손수건과 배지로 온몸을 치장했는데, 그것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축구 마케팅이 과연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직 이런 분야에서 첫 걸음마도 떼지 못한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니 암담할 뿐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스타팅 멤버로 나서는 일본 대표선수들의 얼굴 사진이 전광판에 나오면서 장내 아나운서가 우렁찬 목소리로 선수 이름을 한명씩 부르자 5만명의 관중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런 장면을 처음 본 나에게는 놀라움과 부러움 그 자체였다.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국제축구연맹(FIFA)의 관례였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는 주심의 호각이 울리고 나서야, 경기장 직원이 초등학생이 교과서 읽듯 선수 이름을 읽는 수준이었다(우리나라 프로축구장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한다).

    이런 연출에 충격을 받아 나는 이듬해부터 잠실에서 열리는 대표팀 경기에 그 방식을 도입했다. 이때부터 장내 아나운서로 활약한 성우 박기량씨의 멋들어진 목소리에 맞춰 전광판에 출전선수 이름이 새겨졌다. 이것은 내 자랑 같지만 경기장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한다.

    의욕도 지나치면 해가 되는가보다. 1998년 5월 잠실에서 열린 체코와의 친선경기 때였다. 나는 전광판에 우리나라 선수들의 이름과 사진이 함께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경기 하루 전날 당시 차범근 감독에게 출전선수 명단을 알려달라고 했다. 잠실운동장 전광판이 너무 낡았기 때문에 미리 사진을 구해서 TV 방송사에 넘겨야만 화면제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한국의 차이

    그러자 차범근 감독이 버럭 화를 냈다. 출전선수는 감독이 경기 직전에 결정하는 것인데 경기 하루 전날, 그것도 단지 선수소개를 위해 왜 가르쳐 주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나는 나름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에 물러서지 않고 계속 요청했다. 그러자 차감독이 할 수 없이 알려주었다. 나는 혹시나 경기 직전 차감독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출전선수를 바꾸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다. 이름이 바뀌면 경기 당일에 고칠 수도 없고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엔트리는 하루 전날 가르쳐준 그대로 나왔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날 잠실벌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열광한 것은 물론이다.

    98프랑스월드컵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대회다. 나는 대회 개막을 하루 앞두고 파리 시내 콩코드광장에서 열린 전야제 행사에 나갔다. 행사라고 해봐야 거대한 인형 여러 개가 광장을 행진하는 것이었는데, 그것보다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전부 자기 나라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축제를 즐겼다. 치마를 입은 스코틀랜드, 온 몸에 국기를 감고 다니는 모로코, 셔츠와 모자, 바지, 양말까지 전부 오렌지색으로 맞추고 맥주잔까지 들고 다니는 네덜란드, 그리고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으면서 호나우두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휘젖는 중국…. 그 모두가 축제의 주인공들이었다.

    밤이 어두워지자 파리 시내의 바(Bar)와 맥주집은 세계 각국의 응원단으로 가득하고 골목에서는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축구를 즐겼다. 그 축구란 다름아닌 ‘하늘 높이 공을 차서 올리기’였다. 가령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공을 힘껏 내지르며 “알젠티나!” 하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알젠티나!” 하면서 함성을 질러준다. 그 공을 받은 잉글랜드에서 온 팬이 공을 차며 “잉글랜드!” 하면 역시 모든 인파가 “잉글랜드!” 하며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참가 32개국은 물론 세계의 모든 나라 이름이 다 나왔다.

    축구는 엄마 뱃속의 아기가 발을 내지르는 본능적인 동작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나는 파리 시내에서 공을 힘껏 차며 소리지르고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축구야말로 인간의 본능을 가장 잘 표현한 운동이고, 그래서 인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스포츠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상암동 월드컵 공원에서 가수들 노래로만 2시간 동안 진행한 2002한일월드컵 전야제는 프랑스월드컵에 비하면 진정한 축제의 맛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이었다. 축제는 선수들이나 FIFA 임직원, 가수들만의 것이 아니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축구협회 홍보부 직원이라 축구장에 가면 경기 내용보다 행사진행에 신경을 쓴다. 특히 보도진 관리는 나의 주된 업무다. 운동장에서 제대로 경기 볼 틈이 없어 나는 주로 그 다음날 녹화 테이프로 경기를 보는데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인지라 경기보다는 쓸데없이 운동장 트랙을 왔다갔다 하는 기자들이 없나부터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사진 찍을 생각은 안하고 골대 뒤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나 경기 중에 휴대전화를 들고 건너편 트랙에서 얼쩡거리는 사람을 보면 나는 광분하곤 한다.

    내가 보기에 98프랑스월드컵은 정말 빈틈이 없었다. 사진기자들은 한번 자리를 잡으면 움직이지 못했다. 개막전에서 스코틀랜드가 페널티킥을 얻자 일군의 사진기자들이 그물 뒤편으로 움직이려 했는데, 진행요원이 황급히 달려와 막는 장면도 보였다. 한국에서처럼 운동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기자는 당장 쫓겨날 것만 같았다.

    프랑스월드컵은 TV중계방송의 혁명이기도 했다. 카메라는 클뤼베르트와 지단이 퇴장당하는 장면까지 정확하게 잡아냈다. 나는 프랑스에 온 국내 방송사 중계PD한테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찍을 수 있나. 우리도 저렇게 할 수 있나?” 그 PD 대답이 이렇다. “저건 하루 이틀 교육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다. 몇 년에 걸친 철저한 축구중계 노하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프랑스는 월드컵에 참가하는 32개국이 확정되자 모든 중계 스태프들이 각 나라의 주요선수들을 분석하고, 팀 전술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이걸 대회 직전까지 계속했기 때문에 누가 한국팀의 핵심 수비수이고, 누가 멕시코의 스트라이커인지, 세트플레이에서는 누가 주로 헤딩을 시도하는지까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나라도 17대의 카메라를 쓸 때가 있고, 웬만한 장비는 다 갖추고 있다. 중계방송 요원들의 자질도 프랑스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경험이다. 축구에 관한 감각과 지식을 갖추고 있는 중계인력이 태부족이다. 카메라맨의 경우 어제는 쇼 프로그램을 찍던 사람이, 오늘은 잠실야구장에서 야구 찍고, 내일은 한일전 축구 찍는 식이다.

    98프랑스월드컵 때였다. 6월13일 리옹에서 한국과 멕시코가 만났는데, 나는 경기를 앞두고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프랑스 월드컵조직위원회는 경기에 앞서 두 나라를 대표할 만한 음악을 틀어주었는데, 먼저 한국노래가 나왔다. 곡목은 DJ DOC가 부른 ‘DOC와 함께 춤을’. 경쾌한 리듬에 워낙 히트한 노래라 한국응원단 모두가 따라 할 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스피커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잠시후 멕시코 관중을 위한 노래가 나왔는데, 바로 ‘라밤바’였다. 그러자 운동장이 갑자기 거대한 녹색 물결로 출렁거렸다. 스탠드 곳곳에서 멕시코 응원단들이 발을 구르고 어깨를 흔들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그때 멕시코가 빈부격차가 심하고, 외채도 많다지만, 응원문화 만큼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제 꽹과리는 그만

    내가 응원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가 있다. 6월25일 파리에서 벨기에전이 열렸는데, 내 앞자리에 앉은 한국사람은 농악대 복장을 하고 90분 내내 꽹과리를 쳐댔다. TV로 보면 그의 모습이 그림이 될지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축구를 보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소음이다. 처음엔 외국인 관중들도 금속성 소리를 내는 꽹과리에 호기심을 보이다가 조금 지나자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축구장의 응원은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하는 것이지, 자국의 전통악기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제 ‘사커키드’의 이야기를 마쳐야 할 때가 됐다. 월드컵 유치가 결정되고 온 국민이 환호에 젖어 있던 때, 월드컵 ‘D-000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02 한일월드컵이 중반을 넘어섰다. 축구 이외의 어떤 스포츠가 이토록 전세계 인류를 열광케 할 수 있을까. 축구 말고 그 무엇이 새벽 3시가 되도록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광화문, 종로에서, 대학로, 신촌에서, 한강변에서 그토록 응원의 함성을 지르도록 할 수 있을까. 이런 광적인 축구 열기를 보고서도 “다른 종목과의 형평성 때문에 축구만 특별히 배려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위정자들이,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월드컵 기간 중에 축구에 쏟는 관심의 10분의 1만이라도 평소 한국축구에 쏟는다면 한국축구는 30년 안에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리라 나는 확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대표팀의 성적에만 관심을 쏟고 있지만, 진정한 축구팬이라면 월드컵 이후의 한국축구를 걱정해야 마땅할 것이다. 월드컵은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이벤트지만, 한국축구는 늘 호흡하는 공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지금도 먼지가 풀풀 날리는 맨땅 운동장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태극마크의 꿈을 키우는 ‘사커키드’들, 그리고 운동장 스탠드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선수들을 성원하는 ‘사커마니아’들의 앞날에 행운이 함께 하길 빈다. 그들이 있기에 한국축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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