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작곡가 정풍송의 쇠고기야채볶음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맛~

  • 글: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사진: 김용해 기자 sun@donga.com

    입력2005-04-22 17: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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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詩)는 정적(靜的)이다.
    • 그 시에 호흡을 불어넣는 게 멜로디고, 그렇게 시는 노래가 된다.
    •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가슴 저리게, 어떤 이에게는 열정을 사르며 다가간다.
    • 시처럼 고기도 제 맛이 나려면 야채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요리가 된다.
    작곡가 정풍송의 쇠고기야채볶음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우리가 울었던 지난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우리가 미워한 지난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

    가수 한상일씨가 부른 노래 ‘웨딩드레스’다. 1970년에 발표된 이 곡은 35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에게서 불려진다. 40대 이상 중에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간첩’이다. 노랫말도 좋지만 나직하게 흥얼거려보면 곡의 흐름이 기분을 은근히 좋게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으며 명곡으로 꼽히는지 모른다.

    대중가요 작곡가 정풍송(鄭豊松·64)씨도 자신이 만든 노래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곡으로 주저 없이 이 노래를 꼽았다. 1967년 ‘아카시아의 이별’로 데뷔해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용필의 ‘허공’ ‘미워 미워 미워’, 홍민의 ‘석별’, 조영남의 ‘옛 생각’ 같은 히트곡을 포함해 무려 2000여 곡을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남다르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해 공들여 만든 곡은 아니다. 1969년 가을 어느 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정씨의 손에는 영화대본 한 뭉치가 들려 있었다. 당대 최고의 배우로 꼽히던 신성일과 윤정희가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로 돼 있던 ‘먼데서 온 여자’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택시 안에서 대본을 읽던 정씨는 스토리에 빠져들었고, 남녀 주인공이 손을 맞잡고 춤 추는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멜로디 한 소절이 떠올랐다. 멜로디는 자연스레 콧노래로 나왔다. ‘따라라~따라~따라라~라~’.

    작곡가 정풍송의 쇠고기야채볶음

    정풍송씨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 몰려든 지인들. 왼쪽부터 아들 재윤, 정풍송, 가수 설운도, 국회의원 김춘진(열린우리당), 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장응수 변호사.

    “좋은 곡은 일부러 만들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더군요. 여행을 하거나 잠을 잘 때도 문득 어떤 멜로디가 떠오르면 곧바로 메모합니다. 그런 곡일수록 히트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웨딩드레스’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만든 곡이 아니라, 신이 있다면 내 손을 빌려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니까요.”



    가난하고 힘든 어린 시절을 겪어서인지 정씨는 반골 기질이 강하다는 게 가까운 친구와 지인들의 평가다. 1979년 10·26사태로 봄이 오는가 싶더니 이내 12·12쿠데타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의 등장에 정씨는 참담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만든 곡이 조용필의 ‘허공’이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당신(민주화)….”

    지난해에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바치는 헌정음반을 내기도 했다.

    작곡가 정풍송의 쇠고기야채볶음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자 김수환 추기경이 이를 걱정하는 발언을 했다가 폄훼당하는 것을 보고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두루 존경받는 몇 안 되는 분인데….”

    정씨는 나이 마흔에 열세 살 연하인 김도선씨와 늦깎이 결혼을 해서인지 무척이나 가정적이다. 아들 재윤은 대학에 다니다 공익근무를 하고 있고, 딸 희윤은 올해 대학에 갓 들어갔다. 자녀들이 결혼해서 손자를 안은 친구들에 비하면 한참 늦었지만 정씨는 행복하다. 그래서 가끔은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한다. 몇 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배운 ‘쇠고기야채볶음’이 정씨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요리다.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전날 밤에 쇠고기 등심(스테이크용)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양념에 재워야 한다. 이때 들어가는 양념은 참기름과 소금, 후추 그리고 키위즙이나 배즙이다.

    야채는 브로콜리와 양파, 파프리카를 준비하는데, 브로콜리는 소금을 조금 넣은 끓는 물에 살짝 데쳐 4등분하고, 양파는 깍뚝썰기, 파프리카는 속을 발라낸 후 굵게 채 썬다.

    준비된 쇠고기와 야채를 볶을 때는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쇠고기를 적당히 익을 때까지 볶은 다음에 진간장을 넣는다. 진간장은 양조간장보다 느끼한 맛을 크게 줄여준다. 그 다음 야채를 넣고 볶는다. 그리고 참기름, 후추, 통깨, 다진 파와 마늘을 넣으면서 간을 조절한다. 양념을 가장 나중에 넣는 이유는 양념 본래의 맛을 그대로 살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실제로 적당히 간이 배 담백한 쇠고기와 풋풋한 야채 속에 다양한 양념의 맛이 살아 있다. 정씨가 보기에 요리와 음악은 닮았다.

    작곡가 정풍송의 쇠고기야채볶음

    정씨 부부와 지인들이 요리를 맛보고 있다. 정씨와 장응수 변호사는 초·중학교 동창이고, 김춘진 의원과 설운도씨는 정씨와 절주운동을 함께하면서 절친해졌다.

    “신선한 재료와 다양한 양념이 잘 섞여야 요리가 제 맛이 나듯이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작곡은 반음까지 12개의 음을, 편곡은 갖가지 악기를 얼마만큼 잘 배열하고 연주하는가가 관건이거든요.”

    그의 말을 빌리면, 정씨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요리’는 딱 한 종류다. 아직 우리만의 대중가요를 장르로 구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 대신 통칭하는 ‘트로트’라는 요리다. 하지만 이제 음식의 폭을 크게 넓히고 싶은 게 그의 희망사항.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접목도 그 일환이다. 2001년 그가 전곡을 작곡하고 테너 임웅균씨가 노래한 ‘테너 임웅균의 클래식가요’를 내놨지만 아직은 미완의 단계다. 요즘은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소프라노 고예정씨와 음반작업 중이다. 과연 어떤 요리가 탄생할지 주목된다.

    ‘나는?’

    인생은 끝도 없는 나그네길.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가나.뒤돌아 보면 내가 저만큼 갈 곳 몰라 서성이는데.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

    -김수환 추기경 헌정음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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