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크라잉게임’과 마가리타

“내가 죽거든 그녀에게 마가리타 한 잔을…”

  • 김원곤│서울대 흉부외과 교수│

    입력2010-04-30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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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발머리 여장 게이가 노래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 ‘크라잉게임’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관계를 다루는 동시에 동성애와 인종문제까지 아우르고 있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붙잡힌 영국군이 마지막까지 그리워한 연인이며, 나중에 IRA 조직원과 사랑에 빠지는 여장 게이는 마가리타라는 예쁜 이름의 칵테일을 좋아했다.
    ‘크라잉게임’과 마가리타
    영화 ‘크라잉게임(The Crying Game)’은 1992년 아일랜드와 영국이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영국의 해묵은 난제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IRA)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 닐 조던(Neil Jordan)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정치적 문제를 떠나 동성애와 인종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 현상을 심층적으로 다룬 수작(秀作)이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아일랜드와 영국 출신이 대다수다. IRA 단원인 퍼거스 역의 스티븐 레아가 아일랜드 출신이고, IRA의 여자 조직원으로 나오는 주드 역의 미란다 리처드슨은 영국 배우다.

    영화의 핵심 배역인 여장 동성애자 딜을 연기한 제이 데이비슨은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영국에서 자랐다. 제이 데이비슨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1994년 영화 ‘스타게이트(Stargate)’에서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라(Ra)’역으로 또 한 번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으나 그 뒤로는 영화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않았다

    IRA를 다룬 또 하나의 명화 ‘아버지의 이름으로’와 함께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의 역사와 정치적 관계를 알아야 한다. 17세기 이후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일랜드가 1922년 독립하자 뿌리 깊은 종교문제가 전면에 대두됐다. 개신교도가 수적으로 많은 북아일랜드 6개 주가 가톨릭 주도의 아일랜드공화국 신정부를 거부하고 영연방에 잔류함으로써 분란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이 무력으로 북아일랜드 지역의 통치를 기정사실화하자 아일랜드계 과격조직인 IRA가 1969년부터 영국에 대한 테러활동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69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다행히 꾸준한 노력이 결실을 보면서 1998년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가 중재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의 결과로 북아일랜드 강경 개신교도 정당인 민주연합당과 가톨릭 원주민 정당인 신페인당은 화합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2005년에 IRA가 무장해제를 선언했으며, 2007년에는 공동 자치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최근 RIRA(Real Irish Republican Army)와 같은 강경 반정부 테러 조직이 부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개구리와 전갈 이야기

    영화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파견 나와 있던 영국군 흑인병사 조디(포레스트 휘태커 분)가 주드의 미인계에 넘어가 IRA 일당에게 납치되면서 시작된다. 조디를 납치한 일당은 영국 정부에 감옥에 갇혀 있는 IRA 간부들을 사흘 안에 풀어주지 않으면 조디를 처형하겠다고 통고한다. 영화의 주인공 퍼거스는 IRA의 일원으로서 조디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천성이 여린 퍼거스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조디에게 동정심과 함께 인간적인 정을 느낀다. 서로 어느 정도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자 조디는 퍼거스에게 자신의 여자 친구 딜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기가 죽거든 딜을 찾아가 자기의 사랑을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말을 들은 퍼거스는 감시병인 자신에게 굳이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를 되묻는다. 그러자 조디가 개구리와 전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개구리와 전갈이 살고 있었어. 어느 날 전갈이 강을 건너고 싶은데 자신은 수영을 할 수가 없었지. 마침 개구리가 옆에 있어 자기를 등에 태워 개울을 건너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러자 개구리는 전갈이 자기를 쏠까 두렵다고 말했지. 전갈은 그러면 둘 다 강에 빠져 죽는데 그렇게 하겠느냐고 반문했어. 개구리는 전갈의 논리를 받아들여 전갈을 태우고 출발했지. 그런데 강 중간에서 전갈이 그만 개구리 등을 독침으로 찌르고 만 거야. 개구리는 둘 다 죽게 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전갈에게 기가 막혀 했어. 그러자 전갈이 대답했지. “어쩔 수 없어. 그게 나의 천성인 걸….”

    그러면서 퍼거스에게 “당신은 전갈과 달리 타고난 천성이 어질기 때문에 반드시 나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윽고 영국 정부가 조직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거절하자 조디에게 운명의 시간이 닥쳐온다. IRA 조직의 상부는 퍼거스에게 조디를 처형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조디는 죽음을 모면하고자 필사적으로 탈주하고, 어이없게도 IRA 은신처를 공격하러 온 영국군의 차량에 부딪혀 죽고 만다.

    “내 천성이 그런 걸”

    ‘크라잉게임’과 마가리타
    영국군의 공격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퍼거스는 영국 런던으로 도피해 건설노동자로 일한다. 그리고 어느 날 조디와 약속한 대로 미용원을 운영하고 있는 딜을 찾아간다. 딜은 밤이면 메트로라는 술집에서 여가수로 일하고 있었다. 딜이 ‘크라잉게임’을 매혹적으로 부르는 장면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퍼거스는 딜을 만나면서 뿌리치기 힘든 묘한 매력에 이끌린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둘의 관계가 무르익어가던 어느 날, 퍼거스는 딜이 여장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는 사이 딜도 퍼거스를 진정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퍼거스의 옛 애인 주드가 나타나면서 일이 꼬인다. 급기야 퍼거스의 현재 애인이자 조디의 옛 애인인 딜이 퍼거스의 옛 애인이자, 조디를 유혹해 납치한 주드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퍼거스는 딜을 위해 살인죄를 덮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딜은 퍼거스를 면회하면서 자기를 위해 왜 그런 희생을 했느냐고 묻는다. 퍼거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천성이 그런 걸(It′s in my nature).” 그러고는 조디가 들려줬던 개구리와 전갈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관객과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스티븐 레아)과 남우조연상(제이 데이비슨)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각본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에는 칵테일 하나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등장한다. 데킬라 베이스의 그 유명한 칵테일 마가리타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 전반부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조디는 퍼거스에게 딜과의 추억담을 들려주면서, 만일 자기가 죽거든 딜을 찾아가 술집 메트로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마가리타를 한 잔 사주라고 부탁한다. 조디가 죽은 후 딜이 일하는 술집에 찾아간 퍼거스는 딜 앞에 마가리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튿날 메트로에 다시 찾아가자 바텐더가 “이제 단골이 되어간다”고 농담을 하면서 퍼거스에게 미니우산이 꽂힌 마가리타를 한 잔 서비스로 건넨다. 그런가 하면 영화에서 딜을 연모해 쫓아 다니는 사내 앞에도 어김없이 마가리타가 놓여 있다.

    데킬라와 오렌지 리큐어, 라임주스

    그러면 칵테일 마가리타는 어떤 술일까? 마가리타는 데킬라 베이스로는 가장 잘 알려진 칵테일로 데킬라와 오렌지 리큐어, 라임주스 3가지 주요 재료로 만든다. 데킬라는 ‘신동아’ 2009년 9월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멕시코 선인장 아가베를 주재료로 한 멕시코의 상징적인 증류주다.

    마가리타에는 데킬라 중에서도 비숙성 제품인 블랑코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이 제품이 아가베 향을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에 마가리타에서도 데킬라의 개성을 보다 뚜렷하게 발산한다. 간혹 약간 부드러운 맛의 마가리타를 원할 때는 1년 이하 숙성 제품인 레포사도를 넣기도 하나, 장기 숙성제품인 아네호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맛만 고려할 때는 100% 아가베 제품이 선호되나, 가격 때문에 일반적인 바에서는 믹스토(50% 이상 아가베 함유) 제품이 주로 사용된다.

    오렌지 리큐어에는 다양한 제품이 있는데 이론적으로는 어느 것이나 마가리타 제조에 사용될 수 있다. 그중 트리플섹(triple sec)이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값도 저렴하다. 코인트루(cointreau)나 그랑마니에(Grand Marnier) 같은 술은 값이 비싸다.

    ‘크라잉게임’과 마가리타
    라임주스는 신선하게 갓 짠 것이 가장 선호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라임을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레몬으로 대신해도 무방하다. 자몽 같은 다른 종류의 과일을 사용한 변형 마가리타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마가리타의 세 가지 핵심 재료 외에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소금이다. 소금은 칵테일 잔의 테두리를 장식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마가리타를 마실 때 자연스럽게 같이 입에 들어가 마가리타에 운치와 맛을 더한다. 칵테일 잔 테두리에 소금을 바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라임 또는 레몬 조각을 잔 테두리에 문지른 다음 소금그릇에 넣고 잔을 돌리는 것이다.

    마가리타의 3가지 성분을 혼합하는 비율은 여러 가지다. 가장 전통적인 레시피는 데킬라, 오렌지 리큐어, 라임주스를 3대2대1의 비율로 혼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입맛에 따라 2대1대1, 3대2대1, 1대1대1 등으로 비율을 달리할 수 있다. 라임의 비율이 높을수록 신맛이 강하다.

    혼합이 끝나면 보통 얼음과 함께 셰이커에 담아 흔든 다음에 서빙한다. 물론 대량으로 만들 때는 그냥 저은 다음 내놓을 수도 있다. 얼음을 갈아서 넣어 마시면 특별히 ‘프로즌 마가리타(Frozen Margarita)’로 부르기도 한다.

    휴양지에서 만든 술

    그러면 이 칵테일에 마가리타라는 매력적인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가리타는 워낙 유명한 칵테일이니만큼 그 유래를 놓고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미국 댈러스 사교계에서 유명했던 마가리타(Margarita Sames)라는 부유한 여인의 이름을 땄다는 게 가장 유력하다.

    1948년에 마가리타는 남편과 함께 휴양 차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머물고 있었다. 부부는 댈러스에 사는 친구 몇 사람을 아카풀코에 초대하기로 했다. 당시 그들이 머물고 있는 집은 수리 중이라 현지 지인의 집을 빌려 파티를 하기로 했다. 매우 호화로운 저택이었는데 수영장이 있고 그 옆에 전용 바도 마련되어 있었다. 마가리타는 손님들에게 점심 식사 전에 대접할 새로운 칵테일을 만들고 싶었다.

    당시 35세의 마가리타는 럼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을 만들어보려고 했으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자 자신이 좋아하는 데킬라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멕시코에서는 데킬라를 라임과 소금을 안주 삼아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는 했으나 칵테일용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마가리타는 프랑스산 오렌지 리큐어인 코인트루를 맛보고 마음에 들자 데킬라와 혼합해보기로 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적정 혼합비율을 찾고, 라임주스를 섞어 맛의 균형을 잡았다. 소금으로 잔 테두리를 둘러 술에 활력을 가미하니 비로소 근사한 칵테일이 완성됐다. 마가리타가 찾은 혼합비율은 데킬라, 코인트루, 라임주스 각 2대1대1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여러 해 동안 이들 부부는 손님을 접대할 때마다 이 칵테일을 내놓으며 ‘마가리타의 술(Margarita′s drink)’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빌이 마가리타를 위해 전용 샴페인 글라스를 선사하고 그 잔들에 그녀의 이름 마가리타를 새긴 이후 이 칵테일은 ‘마가리타’라는 정식 이름을 갖게 됐다. 이후 마가리타 부부의 지인들을 통해 마가리타 칵테일이 널리 알려지고, 여러 호텔과 바에서 호평을 받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마가리타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칵테일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최대의 칵테일 소비국인 미국에서 마가리타는 마티니를 제치고 가장 많이 팔리는 칵테일이다. 오늘, 마가리타 한 잔을 마시며 ‘크라잉게임’의 선율을 떠올려보는 것도 애주가들에게는 또 하나의 낭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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