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자연 닮고자 했던 사랑방 주인의 마음으로 우리 가구 만듭니다”

전통 비례미와 사대부 정신 담는 小木匠 박명배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입력2012-11-21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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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내 가구와 기물을 만드는 소목장 박명배(朴明培·61)의 출발은 서양 목공예였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전통 가구의 정신을 충실히 잇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다. 그가 말하는 우리 전통 가구의 정수는 지나친 장식을 배제하고 나무 자체의 자연미를 최대한 살린 조선시대 사랑방 가구다. 사랑방의 주인이었던 사대부의 고고한 기품과 풍류를 담은 가구를 만들어내는 박명배 명장의 세 번째 전시회가 최근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 그는 자연과 장인의 솜씨가 어우러진 예술작품을 선보였다.
    “자연 닮고자 했던 사랑방 주인의 마음으로 우리 가구 만듭니다”
    박명배의 작품을 보는 사람은 하나같이 ‘현대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가 만든 전통 가구는 현대 이탈리아 가구처럼 간결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정갈한 그의 사방탁자를 본 사람이라면 미니멀리즘을 동양적으로 해석한 ‘젠(禪)’스타일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 그의 작품은 어디까지나 ‘조선시대 사대부’ 스타일이다.

    “우리 전통 가구의 정신을 가장 잘 담은 가구를 고르라면, 역시 사랑방 가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으니까요. 우리 가구에는 안방 가구든 사랑방 가구든 모두 소박하되 초라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품격 있는 삶을 추구했던 조선시대 사대부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아름다운 목리(木理)와 간결한 선의 조화

    그가 만든 가구가 단순하고 절제된 선과 형태를 보인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단순하고 엄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화장판(가구 앞면을 차지하는 장식면)으로 고른 나무의 재질을 보면 다른 어떤 소목의 작품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목수들은 모두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를 사랑하지만 특히 그는 오묘한 문양을 지닌 귀한 느티나무 용목을 많이 쓴다. ‘목수에게 용목이 없으면 속 빈 강정’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만큼 화려한 무늬의 용목을 그는 사랑하고, 꼭 용목이 아니어도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나뭇결(목리·木理)이 잘 살아 있다.

    “왜 목리에 집착하느냐고요? 목리는 자연 그대로잖습니까.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보다 싫증이 안 나겠지요. 특히 우리 가구는 조각이나 장식도 하지 않고 목리 자체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때문에, 목리를 잘 살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지요.”



    그러므로 목리를 어떻게 아름답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목수의 안목이요 솜씨가 된다. 전통 가구의 틀이 비록 정해져 있다 해도 이 목리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기에, 그 목리를 선택하고 표현하는 데 따라 오히려 목수의 개성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전통 가구다.

    그의 개성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목리와 간결한 선에 있는 것 같다. 그의 가구는 유독 밝고 환한 색이고, 화장판의 무늬는 모두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잔잔하며 때로 무척 화려하다. 그런데 그 화려함은 아주 단정한 선 안에 들어 있다. 절제된 선(線) 속에 담긴 화려함.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감탄하고 때로 신비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화려함과 절제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은 화려해서 절제미가 더 돋보이고, 절제되어 있어 화려함이 더욱 빛나는 역설(逆說)을 담고 있다. 그 역설이 주는 오묘한 아름다움의 원천은 무엇일까.

    “바로 자연이죠.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인위적인 것을 멀리하고 늘 자연을 닮으려고 했잖습니까. 사람의 기술과 치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자연을 따라가지 못하듯 가구에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살리려다보니 이런 형태가 된 것이지요.”

    그렇다. 그의 작품은 꼬장꼬장한 기골에 가슴으로는 풍류를 사랑했던 조선의 선비와 닮았다.

    미대 교수 공방서 목공 기초 닦아

    목수로서 그의 출발은 여느 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마을 서당에도 좀 다니고 비정규 학교에도 기웃거리면서 집에서 농사를 돕고 지냈다.

    “열여덟 살쯤 되고 보니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서울에 올라와 삼촌 댁에 머물다 목수인 인척 형의 권유와 소개로 공방에 들어가게 됐어요.”

    이 대목부터 그의 목공 인생은 여느 목수와는 조금 다른 경로를 거치는데, 그때 들어간 곳은 가구점이 아니라 당시 서라벌예대 최희권 교수의 개인 공방이었던 ‘오뉘(오누이) 아틀리에’였다. 그는 이곳에서 최 교수와 대학생들의 작품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게 된다. 상업적으로 제작해 파는 가구가 아니라 목공예 ‘작품’을 먼저 접하게 된 것이다.

    “자연 닮고자 했던 사랑방 주인의 마음으로 우리 가구 만듭니다”

    아래는 반닫이, 위는 책장인 느티나무 반닫이 장. 튼튼한 짜임새와 거멍쇠 장석으로 견고한 느낌을 준다.

    “아마 요즘 공예과 교수나 학생들은 다들 제 손으로 작업할 거예요. 여성도 목공을 하는 시대니까요. 하지만 예전에는 교수나 전공자들은 디자인만 하고 작업은 공방에서 해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 선생님 자신도 매년 작품을 만드셨고, 대학생들의 졸업 작품도 많이 들어와서 다양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지요.”

    혼자 하다 잘 안 되면 들고 오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아예 처음부터 디자인만 던져주고 모두 공방에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공방은 서라벌예대 학생 작품만 받은 것이 아니라 홍익대, 서울대 미대 학생들의 작품도 받았는데, 학교마다 작품 경향이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순수 목공작품이 있는가 하면 유리나 창살, 염색한 천 등 다양한 재질을 덧붙여 조형 작품을 만드는 학생도 있었지요. 그래서 나무뿐 아니라 쇠도 다루고 조각에다 칠도 해야 했어요.”

    ‘손으로 만드는 것이면 뭐든 좋았다’는 어린 박명배는 공방의 막내였다. 공방에는 최 교수를 비롯해 훌륭한 사형(師兄)이 여럿 있었다. 서라벌예대 졸업생도 있었고, 솜씨 좋은 목수, 아이디어가 풍부한 사람까지. 막내인 박명배는 심부름을 도맡았고, 사형들이 맡은 작품을 거들면서 대학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많은 도안을 보고, 그리고, 또 도안대로 만들다보면 실력이 금세 늘지요. 그런데 가르치고 배우는 데는 공식이 없어요. 목공 기법도 목수라면 다 같은 기법을 쓰지 특별한 기술이 따로 있습니까. 다만 사형과 스승이 작품을 기획하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 보면서 그 가운데서 내 것을 찾아가는 거지요. 그러니 어느 선생에게 무엇을 배웠다는 ‘계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 어떤 철학을 세워나갈 것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자세가 달라지니까요.”

    이렇게 목공의 기본을 충실히 익힐 수 있었던 아틀리에는 1971년 최 교수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주로 서양 가구, 조형 작품 위주로 작업해왔던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방향을 바꿔 전통 공예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서양식 가구나 조형 작품을 다루는 현대 공예는 작가 기질이 강한 대학 출신이 많이 하니 제가 그 가운데서 빛을 발하기는 힘들죠. 그래서 전통 공예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겁니다.”

    그는 몇몇 전통 목수 밑에서 일하다 마침내 허기행 선생 아래에 들어가 전통 목공 기술을 익혔다. 우리 목공품은 못을 쓰지 않고 목재에 끌로 홈을 파고 서로 짜 맞추어 잇는다. 허 선생은 일제강점기 끌구멍 파기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솜씨 좋은 목수였는데, 그는 70~80가지에 달하는 전통 짜맞춤(결구·結構) 방식을 허 선생에게서 배웠다.

    사대부 정신 일깨운 최순우 선생

    “자연 닮고자 했던 사랑방 주인의 마음으로 우리 가구 만듭니다”

    전통 대패의 날을 가늠하는 박 명장. 그는 도구도 직접 만들고 매우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그래야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목공의 기본은 알고 시작한 것이어서 별로 힘들지 않더군요. 물론 기술이라는 것이 배워서 금방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니라 결국 손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지만 몇 년 정도 하니 혼자 할 수 있겠더라고요.”

    기술을 다 익힌 그는 이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작은 가구점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던 그는 곧 자신의 공방을 냈다. 1981년, 그의 나이 서른 무렵 드디어 독립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그의 인생에 큰 전기를 마련해준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당시 국립 중앙박물관장이던 고(故) 최순우 선생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대부 정신을 추구하게 된 것도 최순우 선생을 만나고서다. 만약 최 선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쩌면 기술은 뛰어나지만 평범한 장인에 머물렀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타고난 탐구심과 진취성으로 결국 비범한 명장이 되었겠지만, 전통 목공예의 철학을 정립하는 데 더 긴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최순우 선생은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 등 현재 우리 미술사학계의 주역들을 키워낸 큰 스승이기도 하다. 이런 큰 인물을 무명의 목수가 어떻게 만났을까.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한데, 최 선생님을 만난 것을 보면 제가 정말 인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와 최 선생의 만남을 주선한 이는 그의 공방에서 단골로 가구를 맞추던 사람이었다. 중앙박물관 학예사인 그이는 젊은 목수 박명배의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지 박물관장에게 ‘젊은 친구가 일을 열심히 잘하니, 귀엽게 봐주십사’ 하는 뜻에서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저는 최순우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당시엔 몰랐죠. 그래도 중앙박물관장님을 뵈러 가는데 그냥 갈 수 없어 연상(硯箱·벼루 담는 상자)을 만들어 갖고 갔어요. 그런데 최 선생님은 마음에 안 드는지 한참 살펴보시다 여기저기 수정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자연 닮고자 했던 사랑방 주인의 마음으로 우리 가구 만듭니다”

    책장과 느티나무 좌등. 상단과 하단에 머름간을 둔 책장은 비례미와 대칭미가 뛰어나다. 좌등은 울거미(테)를 만들고 10여 년에 걸쳐 지켜보며 조금씩 작업해서 완성한 명품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비례가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한다. 우리 목공품에서 알맞은 비례가 주는 아름다움(비례미·比例美)은 매우 중요한데, 당시 박명배는 우리 전통 비례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최 선생의 지적대로 고쳐서 다시 만들어갔고, 이번에는 최 선생이 만족해 ‘내 이걸 구입함세’ 하며 흔쾌히 연상을 사주었다. 이후 중앙박물관장과 젊은 목수는 자연스럽게 스승과 제자가 되었고, 특히 청와대에 우리 전통 안방을 꾸미는 일을 맡게 되면서 그는 최 선생의 치밀한 가르침을 받았다.

    “청와대라면 과거 왕실 격인데, 나무 재료부터 디자인, 비례, 형식까지 모두 그에 걸맞은 격(格)을 갖추어야 했어요. 제가 도면을 그려 가면 최 관장님이 꼼꼼하게 검토하시고 우리 전통 가구의 비례며, 사대부 정신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지요.”

    실제로 그는 우리 전통 가구의 원형을 만들어낸 이는 사대부와 목수였다고 생각한다.

    “관아에서 공인들을 12공방에 소속시켜 관리하던 시절의 공예품이 가장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았겠지만, 조선시대 후기 12공방 체제가 무너지면서 개인 공방이 늘어납니다. 그때부터 목수들은 사대부의 주문에 따라 가구와 목물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지금 남아 있는 전통 목공예는 사대부와 목수의 합작품인 셈이지요.”

    사대부들은 곧잘 목수를 불러 자신의 집에 맞는 크기와 디자인의 가구를 주문했다. 그래서 가구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었고, 목수 역시 그 기간 생계를 보장받으면서 자신의 기술을 마음껏 발휘해 격 있는 가구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 전통 가구에서 격이란, 사랑방 가구는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절제된 형태로, 또 안방 가구는 따뜻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는 최순우 관장에게 우리 전통 가구의 비례에 대해서도 처음 배우게 됐다. 우리 가구는 앞면인 화장면을 울거미(테)로 여러 면으로 분할하고, 나뉜 면(복판 또는 알판)에는 때로 다른 목재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면을 나누는 첫 번째 이유는 여름과 겨울 습도 차가 큰 우리나라에서 통널(판재를 나누지 않고 통째로 쓰는 널빤지)을 쓰게 되면 나무가 잘 뒤틀리기 때문이다. 뒤틀림을 막기 위한 기능적인 고안이 바로 면 분할이지만, 면을 나눔으로써 아름다운 비례를 만들어내므로 어떤 비율로 분할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자연 닮고자 했던 사랑방 주인의 마음으로 우리 가구 만듭니다”

    11월에 열린 그의 세 번째 전시회.

    명장의 불문율, ‘자 대기 없기’

    그의 가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래쪽 분할 면(특히 머름간)은 아래위 폭이 넓고 위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진다. 금방 눈에 띄는 차이는 아니지만, 이런 미묘한 변화가 아름다운 비례미를 연출한다.

    “우리 가구는 기능적인 면과 미적인 면이 절묘하게 조화돼 있어요. 우선 기능을 고려하고 이에 맞게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죠. 가끔 자기 멋대로 디자인해서 만들어달라는 분이 있는데, 대개 이런 비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주문이기 때문에 거절하는 편입니다.”

    최순우 관장에게 배운 것 중 또 하나가 1대 1 도면 그리기다. 대개 목수들이 전통 가구를 짤 때 기준목이라는 게 있어서 가구의 기준이 되는 선을 표시한 막대기를 한번 마련하면 이에 맞춰 도면 없이도 얼마든지 같은 치수의 가구를 짜낼 수 있었다. 일종의 편법인 셈이다.

    “그런데 최 선생님은 제가 짤 가구를 모두 도면으로, 그것도 축소한 것이 아니라 1대1의 비율로 그리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그린 도면을 벽에 붙여놓고 비례가 잘못된 것이 없는지 살펴보고 고쳐서 다시 그리고, 그렇게 일곱 번만 하면 제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도면을 완성할 수 있더라고요.”

    그는 지금도 자신이 구상하는 가구의 도면을 1대 1 크기로 그려놓고 수없이 고쳐 가장 아름다운 비례를 한 치 오차 없이 얻어낸다. 그의 가구가 아름다운 비례미를 자랑하는 것도, 그리고 좀처럼 뒤틀림이 없는 것도 바로 이런 꼼꼼한 도면작업 덕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가르치는 제자들에게도 그는 1대 1 도면 그리기를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공방에는 ‘자 대기 없기’가 불문율이다. 만들고 싶은 표본이 되는 가구에 자를 대어 치수를 재는 것을 금한 것인데, 어떤 가구든 눈으로 보고 도면을 그리면서 스스로 그 비율을 알아가야지 그냥 자 대고 치수를 얻어버리면 실력이 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인 ‘공간책장’(중간에 문을 달고 아래위는 빈 공간을 마련한 책장)은 일본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관에 있는 책장을 재현한 것인데, 그는 텔레비전에 소개된 이 책장을 화면 캡처해서 그 책장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머리 높이를 기준으로 책장의 크기와 비율을 재현해냈다. 이렇게 눈으로 보고 도면 작업을 하는 버릇을 들여야, 어떤 기물이든 척 보고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그의 공방 사무실에는 지난 수십 년간 그려온 도면이 쌓여 있다. 때로 20년 전에 그린 도면을 꺼내 작업하기도 한다.

    “무언가 만들기로 결심이 서면, 그에 관한 자료는 다 뒤져봅니다. 박물관도 찾고 인사동에도 가고, 여러 책을 보면서 스케치를 하지요. 그렇게 해서 도면을 열 개 정도 마련해서 제일 나은 것을 고르는 겁니다.”

    평소에도 책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가구와 기물을 끊임없이 스케치하는 그는, 그렇게 스케치한 것을 보면 ‘어제 안 보이던 것이 오늘 보이고, 어제 괜찮게 보였던 것이 오늘은 달리 보이는’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 장을 스케치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확대해서 다시 그려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디자인을 서서히 완성해나간다. 그의 그토록 깔끔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홀로서기 20여 년 만에 중요문화재로

    “자연 닮고자 했던 사랑방 주인의 마음으로 우리 가구 만듭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관의 책장을 재현하기 위해 그린 도면 앞에서. 오른쪽 사진은 텔레비전 화면을 캡처한 것으로, 이를 보고 크기와 비율을 재현해냈다.

    1984년, 최순우 관장은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에게 큰 가르침을 준 스승이 떠나자 그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홀로서기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 일환으로 1986년부터 공모전에 나가기 시작해 1989년 동아공예대전에서 대상을,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가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은 낙송(烙松) 기법을 써서 만들었는데, 소나무를 인두로 지져 독특한 색감을 낸 것이었다.

    “원래 오동나무를 인두로 지지는 낙동(烙桐) 기법이 있어요. 오동나무를 인두로 지진 후 짚이나 솔로 비벼 벗기면 무른 부분은 타서 검게 패고, 단단한 부분은 적게 타서 덜 파여 굴곡진 무늬가 생기죠. 그 무늬가 참 질박해서 오래 쓸수록 정감이 갑니다.”

    낙동 기법으로 책장을 만들면 그런 질박함으로 한결 의젓하고 품위가 있다. 그는 ‘오동나무를 지질 수 있다면 소나무는 왜 안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소나무를 지져 작품을 냈고, 덕택에 대통령상을 거머쥘 수 있었다.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타면 이듬해 무형문화재가 될 자격을 얻는데, 제 나이가 어려서 안 됐어요. 그땐 소목 부문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네 분 계시기도 했고요. 10여 년 동안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나서 설석천 선생님이 보유자가 되셨고, 저는 또 10년 가까이 기다려 설 선생님이 연세가 들어 명예보유자가 되면서 2010년에 겨우 보유자가 됐어요.”

    대통령상을 타고 무려 18년을 기다린 셈인데, 이제는 지방무형문화재가 아닌 중요무형문화재 소목 부문에서 그가 유일한 보유자다. 그러나 보유자가 되기 전 이미 그의 실력은 인정받은 것 같다. 일찍이 1985년 로마 교황청 박물관 한국관에 들어가는 가구 일습을 비롯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워싱턴DC, 독일 베를린, 일본 오사카, 벨라루스 등지의 한국문화원에 있는 사랑방 가구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1996년 운현궁을 복원할 때 사랑방과 안방 가구 등 모든 가구를 만드는 일을 총괄한 것도 그였다.

    “운현궁에 들어가는 가구는 두세 달 만에 100여 점을 만들어야 했기에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목을 다 동원했지요. 목수들에게 도면을 받아 균형을 맞추고 백골 상태로 완성한 다음 칠은 한 종류로 통일했는데, 그래도 역시 작품이 제각각이라는 느낌을 주는 건 어쩔 수 없습디다.”

    관에서 예산을 집행하는 방식이 이래서야 제대로 된 복원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 같다. 또 청와대에 전통 방(1985년과 다른 방)을 꾸밀 때 그도 응모했지만 결국 현대 디자이너가 책임을 맡고 전통 소목에게는 하청을 주는 것을 보고 그는 꽤 실망한 듯하다. 전통 가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풍토는 아직 품격 있는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제 작품 가격을 말해주면 사람들은 다들 놀라는 표정을 짓습니다. 소반이나 작은 기물을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2년 걸렸다고 하면 기가 막힌 표정을 짓기도 하고요.”

    그가 2년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손으로 만드는 시간이야 얼마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기물을 구상하면서 나무 재질을 결정하는 순간, 재료가 되는 나무를 골라 실내에 들여와 2년을 두어야 하니 아무리 작은 작품도 최소한 2년의 시간은 들어가는 셈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외국 명품 브랜드에는 큰돈이 들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도, 우리 명장의 작품에는 조금 인색한 듯하다. 그는 억울하지 않을까.

    “50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3000만 원씩 해요. 작년과 재작년 나무를 잘못 사서 앉은자리에서 6000만 원을 날린 적이 있습니다. 또 좋은 나무를 만나도 7년씩 말리다 보면 휘는 부분이 생기고, 자르고 깎고 하면 쓸 수 있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죠. 그런 재료로 몇 년씩 걸려 만듭니다. 경매에서 4억 원에 팔린 고가구를 그대로 재현해낸 작품은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값인데도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솔직히 수공비는 한 푼도 안 친 셈인데 말이죠.”

    나무만 3000만 원, 건조에 7년

    그의 공방 마당에는 원목 더미가, 창고에는 켠 상태의 목재가 가득가득 쌓여 있다. 공방 안에도 나무가 그득하다. 나무를 베어 실외에서 3년, 목재로 켠 뒤에 다시 3년, 그리고 실내에서 2년 더 건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재료를 준비하는 시간만도 7년이 걸리는 셈이다. 이렇게 나무가 산처럼 쌓여 있어도 새 작품을 구상하면 또 그에 꼭 맞는 나무를 찾아 헤매게 되고, 좋은 나무를 만나면 안 사고는 못 배긴단다. 그래서 그는 ‘개미처럼 일해 나무 사는 데 다 갖다 바친다’며 웃는다. 그가 가진 나무 값만 치면 수억 원대 부자지만, 그가 작품으로 안정되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2007년 두 번째 전시회부터다.

    “1990년대부터 목공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기 시작했고, 두 번째 전시회에서 작품이 다 팔리더군요. 이제 대중의 인식이 나아지고 있지만 조만간 ‘이케아’가 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무형문화재니까 끝까지 전통을 따라야 하지만, 제자들은 이케아 같은 조립가구도 시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 가구라고 해서 조립가구로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신세계백화점에서 제프 쿤스의 작품을 수백억 원 주고 들여와 옥상에 설치했고, 리움박물관에서도 루이즈 부르주아의 설치 작품 ‘거미’를 수백억 원에 들여왔죠. 제프 쿤스 덕택에 백화점 매출액이 15% 늘었다는 기사를 읽고, 대중이 이렇게 예술작품에 자극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 앞날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풍선이나 장난감 같은 평범한 물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드는 제프 쿤스의 작품은 흔히 ‘키치(통속예술에 영합하는 작품을 일컫는 말)’로 불리지만, 현존하는 작가 가운데 작품 값이 가장 비싼 편이다. 이런 작품에 대중이 열광할 수 있다면, 전통 가구를 명품으로 인식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희망을 그는 품어본다. 그 희망에 전통 목공예에 몸담은 제자들의 앞날이 달려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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