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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4대 사화(士禍) 버텨낸 강철 신념, 불꽃 의지

거가(居家) 선비 유계린의 ‘거가십훈’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4대 사화(士禍) 버텨낸 강철 신념, 불꽃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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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나라 황제는 최부를 만나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상중(喪中)의 죄인이라는 이유로 알현을 거절했다. 당혹한 명나라 조정은 강압적 방법을 써서 황제와 그의 대면을 성사시켰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 ‘표해록’이다. 요컨대 이 책은 개인의 권력과 명예보다 예법을 앞세우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관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동시대의 중국, 일본 유학자들보다 훨씬 더 성리학 근본주의에 가깝다는 점에서 후세의 관심을 끌 만하다.
연이은 사화로 장인과 스승을 한꺼번에 잃었을 때 유계린의 나이는 20대 초반에 불과했다. 그의 상심은 깊었다. 그로 말미암아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저 고향인 해남의 성내를 서성일 뿐이었다. 유계린이 자신의 호를 ‘성은(城隱)’, 즉 성안에 숨어 지내는 이라고 자처한 데는 이런 기막힌 사정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유계린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다짐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거가십훈(居家十訓)’을 짓고 몸소 이를 실천했다. 그에겐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부디 자손들이 성리학자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그 덕목을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해 가문을 재건하고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주인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훗날 유희춘은 작고한 아버지 유계린을 그리워하며, 아버지의 “언행과 문장은 순수하고 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유희춘은 아버지의 탁월한 행적이 후대에 전해지지 못할까봐 조바심을 냈다. 그래서 “두려워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님이 집안에서 독실히 실천하신 ‘거가십훈’을 기록”했다.
‘거가’란 벼슬을 멀리하고 집안에 머문다는 뜻이다. 유계린은 김굉필, 최부 등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학자답게 성리학적 이념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에 힘썼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십훈’이다.
유계린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선비의 기상을 잃지 않고자 했다. 또한 부당한 사적 ‘욕심을 차단하기(窒慾)’에 노력했다. 일상사를 처리할 때도 성리학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관계를 멀리하고 순리대로 결정할 것을 다짐했다. 대인관계에선 상대방의 됨됨이를 미리 알아볼 줄 아는 능력(知人)을 갖추고자 했다. 초야에 묻힌 선비로서 매사에 한층 더 관대하고 진실하기를 자신에게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대의에 따른 결단이 필요하다면 누구보다 과감하기를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필자가 보기에 ‘거가십훈’의 요체는 4가지다.
첫째는 효(孝)를 실천하는 생활이다. 유희춘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며, 아버지의 효성과 상중 예법에 감복했다.

선친이 23세 되던 경신년(1500),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셨다. 선친은 순천(順天)에서 여막(廬幕)을 지키며 애통해하고 사모함이 지극하셨다. 소상(小祥)을 마치고 일이 있어 부득이 해남을 왕래하셨다. 그때 어머니(탐진 최씨)와 한 방에서 13일을 같이 지내셨으나, 예(禮)로써 멀리하셨다. 작별할 때가 되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열흘 넘게 머무셨으나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으니, 더욱 슬픕니다.” 선친은 민망히 여기며 길을 재촉하셨다. 우리 집 여종 눌비가 그때 방에 함께 있어서 전후사정을 잘 알았다. 눌비는 늙을 때까지도 그때 일을 자주 말했다. “앞뒤로 듣고 보아도, 우리 주인님(유계린)만큼 공경할 만한 분이 안 계십니다.”





묵묵히 齊家하며 공부

둘째, 유계린은 ‘제가(齊家)’, 즉 집안을 원만하게 다스리는 데도 심혈을 쏟았다. 유희춘은 몇 가지 일화를 들며 아버지에게 존경을 표했다. 유계린처럼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선비에게 ‘제가’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선친은 부부 사이에도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예를 갖추셨다. 그러나 애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35년간 함께 사셨는데, 한 번도 첩을 사랑하신 적이 없으셨다.

하나뿐인 아우 계근(桂近, 유희춘의 숙부)과 우애가 깊으셨다. (…) 올벼가 나오는 논(早稻田)을 그에게 다 주셨다. (선친에게는) 누이가 두 명 있었는데, 조모께서 생전에 몹시 사랑했다. 그 점을 고려해 선친은 동기간에 재물을 나눌 적에 좋은 전답과 노비는 다 그들에게 양보하셨다.

자식 사랑도 고르게 하여 편애함이 없으셨다. 새끼에게 먹이를 고루 나눠주는 뻐꾸기의 사랑이 있었다.

노비들도 아끼셨다. 그들의 나쁜 점은 미워하셨지만 장점을 알려고 노력하셨다. 자상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몸에 배셨다. 그런 선친이 작고하시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노비들이 넋을 놓고 곡성을 터뜨려 마치 자기네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하였다. 마을에 사는 백성들 중에도 우리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고 탄식하며, ‘덕인(德人)이 돌아가셨다’고들 하였다.
 
셋째, 유계린은 함부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자손만대의 안전을 위해 고향인 해남 땅을 떠나려고 했다. 재산이 넉넉하면 벼슬에 연연할 이유가 없고, 해남처럼 왜구의 침입이 염려되는 곳은 자손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떠나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훗날 유희춘이 담양 대곡(大谷)으로 집을 옮기고, 상당한 전답을 마련해 생계의 안전을 꾀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다.
넷째, 유계린은 가문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에 힘썼다. 그는 기억력이 출중했고 “문리(文理)가 투철”했다. 유희춘의 증언은 이러하다.

고문(古文) 중에 까다로워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나 의미가 애매한 어려운 부분도 대나무를 쪼갠 듯 명쾌하게 이해하셨다.

고을의 여러 자제들이 와서 (선친께) 수업을 받았다. 십수년 동안 그들을 지도했으나 조금도 게을러지지 않으셨다. 아동에게 글을 가르침에 반드시 먼저 강령(綱領), 즉 대의를 알려주고 그 문맥과 이치를 펼쳤다. 그런 가르침 덕분에 작고한 형님(유성춘)도 어릴 적부터 문의(文義)에 밝았고, 글 또한 잘 지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유희춘도 문장 분석력이 탁월해 당대 최고의 경학자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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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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