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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사람친구’만 많고 애인은 아직…

교수가 된 力士 장·미·란

  • 이영미 | 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남자사람친구’만 많고 애인은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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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장미란은 선수 시절부터 은퇴 후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고려대 체육교육학과에서 학사과정을, 성신여대 체육과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고, 용인대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제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죠. 운동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매달렸어요.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졸업할 때는 그런 특혜 없이 일반 학생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에 어려움이 많았죠. 돌이켜보면 참 열심히 살았어요. 운동하느라 시간이 모자란 탓에 공부가 늘 부족했지만, 그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학교를 다닌 게 목표를 이루게 해줬습니다.”

장미란은 은퇴 후 3년 만에 대학으로부터 월급을 받게 된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은퇴하고 3년간 재단 일에 전념하며 실업자로 지내다 처음으로 직장을 갖게 된 거예요. 안정감이 생기더라고요. 전공을 살려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 데 감사함을 느낍니다. 박사과정을 준비하면서도 교수직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자리를 잡을 줄 몰랐어요. 도와주신 모든 분께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장미란은 올해 스승의 날을 평생 못 잊을 것이라고 한다.  



“아직도 ‘교수님’ ‘선생님’이란 호칭이 익숙지 않거든요. 학생들이 스승의 날에 ‘스승의 은혜’를 불러주는데, 그 상황이 너무 쑥스럽고 무안한 거예요. 제가 정말 그 자리에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학교로부터 발령 소식을 전해 듣고 용인대 인근 아파트를 알아보러 다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 살 집을 구한 것이다.

“늘 부모님이 알아서 다 해주셨기에 제가 할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엄마와 집을 보러 다니면서 전세난, 주택난의 심각성을 실감했습니다. 선수 때는 한 번도 제 월급 통장을 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다 관리해 주셨고, 그런 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고요. 지금은 제가 다 관리해요. 직접 돈을 만지니까 경제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은퇴한 선수들은 새로 배워야 할 게 정말로 많아요.”

용인대 체육과학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스포츠사회학을 전공한 장미란은 전문 분야이자 가장 관심 있는 분야인 ‘국가대표 선수의 은퇴 기대와 심리적 위기감 및 재사회화의 관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은퇴 후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국가대표 출신들의 실제 상황과 자신의 경험을 녹여 논문으로 완성했다.



‘여자 헤라클레스’

‘남자사람친구’만 많고 애인은 아직…

장미란은 아테네 올림픽(왼쪽)에서 은메달,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동아일보]

“체육인들은 은퇴 후에 뭉치기가 어려워요. 다들 먹고살기 바쁜 거죠. 먹고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선수가 훨씬 많습니다. 사업에 손을 댔다가 사기당하기 일쑤이고, 직장에 취업해도 적응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얼굴이 많이 알려진 운동선수는 뭔가를 새로 배우기도 여의치 않아요.

그렇다 보니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 거예요. 주위에 그런 선후배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운동선수들에게 은퇴 전에 전문적인 교육을 지원해 주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요. 선수들이 운동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요.”

그는 이런 현실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단순히 공부하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대학원 박사과정을 거쳐 대학교수로 새로운 인생을 연 것이다. “역도를 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인생의 방향이 은퇴 후에도 이어졌다.

장미란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바벨을 잡았다. 선수로서의 출발은 늦었지만 타고난 신체조건을 앞세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전국 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19세이던 2002년 첫 태극마크를 달고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해 75㎏ 이상급(최중량급)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올림픽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첫 출전이었다. 장미란은 최중량급에서 용상 마지막 시기에 10㎏을 늘려 들어 올리는 데 성공한 중국의 탕궁훙에 뒤져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송진가루에 피범벅이 된 장미란의 손이 중계방송 화면에 잡히는 바람에 금메달을 딴 선수보다 더 큰 감동을 선사했고, 그는 아테네 올림픽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장미란은 국제 대회에서 거침이 없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를 달성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여자 헤라클레스’ ‘세기의 역사(力士)’ 등 최고의 찬사가 뒤따랐다.



“스포츠에 ‘혹시나’는 없다”

‘남자사람친구’만 많고 애인은 아직…

장미란은 “정직한 게 스포츠의 매력”이라고 했다. [조영철 기자]

장미란은 2010년 교통사고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최중량급에서 인상 130㎏, 용상 181㎏, 합계 311㎏을 들어 올려 1위에 올랐다. 유독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던 장미란에겐 여간 값진 금메달이 아니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장미란은 인상 125㎏, 용상 164㎏, 합계 289㎏을 들어 올려 4위에 머물면서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마지막 용상 3차 시기에서 170㎏에 실패한 뒤 장미란은 관중을 향해 큰절을 하고 바벨에 따뜻한 손 키스를 남긴 채 경기장을 떠났다.

“제가 원래 표현을 잘 못해요. 여느 선수들이 쉽게 하는 손 하트도 못 날려요. 그런데 그날은 그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큰절도, 바벨을 향한 손 키스도, 전혀 ‘대본’에 없던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런던 올림픽까지 가기가 정말 힘들었거든요.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그래도 마지막 올림픽이라고 마음 추스르며 안간힘을 다해 버텼어요. 그러다 마지막 시기에 바벨을 떨어뜨리면서 ‘아,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시원섭섭한 감정이 휘몰아쳤습니다. 그냥 그 자리를 떠나기가 싫었어요. 역도를 통해 얻은 게 너무 많은데 그 마음을 어떻게 해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바벨에 손 키스를 한 것 같아요.”

장미란은 경기장을 벗어나 대기실로 향하면서 씁쓸한 마음에 헛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연습이 조금 부족했어도 그동안 해온 게 있으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연습한 것 이상의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 거죠. 그런데 역도는 제가 한 만큼만 결과로 나와요. 아주 정직하죠. 그게 스포츠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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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 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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