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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종횡무진 공간 읽기 ③

캐리비안베이

리얼보다 더 리얼한 인공의 낙원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캐리비안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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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렁이는 파도, 짜릿짜릿한 슬라이드, 가무잡잡하게 선탠한 비키니 미녀들과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남자들…. 워터파크의 대명사 격인 ‘캐리비안베이’가 자동적으로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다. 카리브해를 모방했다는 이 거대한 물놀이장은 실제 바다보다 더 리얼하지만 자연이 주는 불편함은 말끔히 상쇄된, 복제된 바다이자 인공의 낙원이다.
캐리비안베이
중세의 시인 단테는 33세 되던 해의 성(聖)금요일 전날 밤, 갑자기 길을 잃고 숲속을 헤맨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하룻밤을 보낸 뒤 마침내 아침 해가 비치는 언덕 위로 오르려 했으나 이번에는 세 마리의 야수가 길을 가로막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단테. 이때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단테를 구해준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으로 간다. 중세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신곡’의 도입 부분이다. 마침내 지옥으로 들어가는 단테. 그 문 위에는 어두운 빛깔로 무시무시한 말이 적혀 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향해 간신히 입을 연다. “스승이여, 저 뜻이 제겐 무섭습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만토바의 다정한 영혼’으로 불리는 현자(賢者)는 단테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넨다.

“여기선 온갖 의심을 버려야 하고 온갖 주저함은 죽어 마땅하도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절망을 버릴지어다

자, 이제 캐리비안베이로 떠나보자. 온갖 의심과 주저함을 버리고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타고 질주해보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그 골짜기 안에 ‘지옥’이 아니라 ‘낙원’이 있다. 캐리비안베이는 홈페이지에 스스로를 ‘365일 즐거운 물의 나라’라고 표현한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이라든지 ‘알고 즐기면 더 재미난’ 같은 수식어가 홈페이지 구석구석을 장식한다. 이 ‘즐거운 나라’의 모국인 에버랜드도 ‘365일 꿈과 모험이 가득한 축제의 나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일종의 관습적인 광고문구이지만, 만일 정색을 하고 이 문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용인시 포곡읍의 한 골짜기는 대립과 투쟁과 살벌한 생존경쟁이 엄연한 이 한반도에서 유일무이한 지상낙원이다. ‘꿈과 모험이 365일 가득한 온 가족의 즐거운 나라’, 바로 캐리비안베이다.

캐리비안베이로 향하는 첫 번째 관문, 영동고속도로 마성톨게이트는 ‘온 가족의 즐거운 나라’로 향하는 문답게 테마파크의 조형성을 보여준다. 톨게이트의 공식 이름인 ‘마성’이라는 글씨가 투박한 서체로 찍혀 있고 그 위로 수십 년 동안 한반도의 대표적인 테마파크로 군림해온 에버랜드의 총천연색 로고(더욱이 전환사채 문제로 TV 9시뉴스에서도 자주 보았던)가 당당하게 세워져 있다. 휴가철 곳곳의 인산인해와 땡볕 아래에 꼬리를 문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 행렬을 빠져나온 여행객으로서는 이 인상 깊은 톨게이트 조형물이 마치 저 중세의 시인이 기록했던 음울한 문장을 가볍게 패러디한 듯싶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절망을 버릴지어다.”

사실 이 마성톨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거의 모든 차량은 흡사 정치적 신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 세상잡사 모든 번잡한 약속과 스트레스와 두려움과 절망을, 잠시나마 말갛게 잊어버린 채 ‘365일 즐거운 물의 나라’로 망명을 떠나는 것이다. 이 물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온갖 의심과 온갖 주저함’을 버려야 한다.

문제는 비용!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 그러나 이 역시 ‘숫자의 마력’ 속에 갇혀 버린다. 이 나라에 입국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지만, 그 누구도 현찰을 꺼내서 입국 수속을 밟지는 않는다. 다양한 종류의 카드와 할인 방법과 쿠폰이 현찰을 대신한다. 사실 이 나라는 현실의 모든 것을 ‘대신’한 ‘유사 현실’이다. 저 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가 용인시 골짜기에 있을 리 만무하건만, 어쨌거나 신국(神國)의 명칭은 캐리비안베이다.

현실의 바다에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도 차량으로 서너 시간을 더 달려가야 하지만 이 신국 안에는 ‘유사 바다’가 조성되어 있고 심지어 적절한 크기의 백사장도 설치되어 있다. 현찰을 대신하는 수많은 카드와 쿠폰과 할인 방법은 결국 한 달 후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건만, 입국 과정에서 그것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제의 현실과 곧 다가올 미래의 현실만 잠시 잊어버린다면, 그러니까 ‘온갖 의심과 온갖 주저함’을 버리기만 하면, 캐리비안베이는 짜릿한 쾌락의 성소로 변한다.

“색다르고 다양한, 젊고 세련된, 그런 공간이 바로 캐리비안베이”라고 취재진을 안내한 삼성에버랜드 홍보팀 정순지 주임은 말한다. 입사 5년차인 정 주임은, 이 ‘인공낙원’에 입사하기 전, 해마다 여름이면 캐리비안베이를 찾은 마니아였다. 지금은 이 공간이 ‘직장’이 된 관계로 예전처럼 맘껏 즐길 수만은 없는 처지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캐리비안베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젊고 세련된’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고 한다. 가족 단위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워터파크이지만 초기에 형성한 ‘젊고 세련된’ 이미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아이들 손을 잡고 온 부모들 역시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일부러 선택한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최초의 테마파크는 디즈니랜드

캐리비안베이는 1996년 개장했다. 해적들이 출몰하던 중세 시대의 카리브해라는 테마를 다양하게 변주한 물놀이시설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는 국내 최초의 워터파크다. 연면적 3000평(9918㎡)에 약 6600t의 물을 담고 있다. 이곳의 유수풀은 550m에 달하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강원도 홍천에 오션월드가 등장해 이 나라의 워터파크를 양분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최초’와 ‘최대’의 프리미엄은 캐리비안베이가 갖고 있다. 그 두 가지 사실이 ‘최고’를 입증하는 것이냐 하면, 이는 이용자의 주관적 기호와 인상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으므로 잠시 배제할 수밖에 없는데, 어쨌거나 캐리비안베이가 테마파크 역사에 커다란 분기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휴양레저 문화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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