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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천문과 풍수 녹아든 녹색의 장원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古宅

  • 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cyh062@wonkwang.ac.kr

천문과 풍수 녹아든 녹색의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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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만평의 집터에 50만평에 달하는 장원(莊園)을 가진 윤선도 고택에서는 호방함과 소요유(逍遙遊)의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더욱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라는 ‘유교적 만다라’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고산 고택은 천문과 지리에 해박한 옛 사람들의 지혜도 엿볼 수 있다.
진(晉)나라 때 장한(張翰)이란 인물은 낙양에서 벼슬살이하다가 가을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그는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당장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소슬한 가을 바람이 불 때면 나도 살며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누군가 그 돌아갈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녹색(綠色)의 장원(莊園)’이라고 대답하련다.

내가 생각하는 녹색의 장원은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 고택이다. 윤선도 고택은 그야말로 녹색의 장원이라고 불릴 만한 격(格)을 갖춘 집이다.

그 격은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터에서 전해지는 호방감에서 나온다. 그동안 답사해본 남한의 100여군데 명택 중에서 가장 호방한 터에 자리잡은 집을 꼽아보라면 나는 단연 윤선도 고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집터 자체의 규모만 따지면 1만여평 되지만, 집터를 둘러싼 ‘전체의 터’는 어림잡아 50만평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여기서 말하는 전체의 터라는 것은 사신사(四神砂), 즉 청룡(靑龍, 동방) 백호(白虎, 서방) 주작(朱雀, 남방) 현무(玄武, 북방)가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면적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윤선도 고택은 사신사(四神砂) 내의 면적이 무려 50만평에 달하는 정원을 가진 장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호방함만을 놓고 볼 때 이 집은 호남을 대표하는 고택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호방한 고택은 입지 조건상 넓은 평야지대가 많은 호남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이름난 고택이 많기로는 단연 영남이 앞선다. 그러나 영남은 호남에 비해 산들이 많고 들판이 좁아서 집터가 오밀조밀한 짜임새가 있는 데 비해 호방한 맛은 적다. 거꾸로 호남은 평야가 많아서 짜임새는 적지만 상대적으로 호쾌한 터에 자리잡은 집이 많다.

근세에 회자되었던 “경상도 부자는 3000석을 넘기 어렵지만, 전라도 부자는 1만석이 넘는다”는 말도 영·호남의 지리적 차이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윤선도 고택은 평야가 많은 전라도 지역에서 만석꾼 집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고택임이 틀림없다.

남도의 예술과 학문의 요람

예술은 식후사(食後事), 밥 먹고 난 뒤의 일이라고 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미를 추구하겠는가! 예술뿐만 아니라 학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해남 윤선도 고택에서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배출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흔히 남도를 예향(藝鄕)이라고 하는데, 그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윤선도 고택과 만나게 된다. 윤선도 고택은 호남 예술정신의 요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그러한 예술정신의 표출 배경에는 50만평의 광활한 전망을 가진 녹색의 장원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문화 창달을 위해서는 장원의 존재가 중요하다.

중국정신을 대표하는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직하도가(稷下道家)’ 같은 저술은 대규모의 학자 그룹이 모여 만든 일종의 집단 저술이라 볼 수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여불위(呂不韋, ?∼B.C. 235년), 유안(劉安, B.C. 179∼B.C. 122년)과 같은 패트런(patron, 후원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그 패트론들은 틀림없이 많은 학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맹상군도 3000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그 저택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궁금하다. 맹상군도 장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많은 식객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 고택 뒤로 조성된 9000평의 비자나무숲을 산책하면서 또 한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정도 장원이 있다면 한가롭게 유유자적할 수 있는 생활이 가능하므로, 굳이 서울에 올라가서 아등바등 벼슬살이에 집착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벼슬, 그건 상당히 골치아픈 직업이었다. 자칫하면 당쟁과 모략의 그물에 걸려 제명에 못살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소요유(逍遙遊)의 쾌감(快感)을 알아버린 사람은 결코 조직사회의 속박에 묶이지 않는다. 고향의 순채나물과 농어회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눈에 불을 켜고 벼슬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윤선도 고택의 내력을 살펴보면 자못 그런 정서가 물씬 풍긴다.

강진 일대에 흩어져 살던 윤씨들이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에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반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1543년)에 의해서다.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면서 은둔하겠다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의 호를 가졌던 윤효정. 그러나 후손들이 실제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는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이후로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내리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면서 부와 명예를 갖춘 명문가로 화려하게 부상한다.

그러다가 고산 윤선도 대에 와서 은둔이 시작된다. 정치적으로 남인 계보에 속해 있던 고산은 당쟁의 와중에서 노론인 송시열에게 밀리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귀거래사한 것이다.

그러나 고산의 귀거래사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처럼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벼슬살이라고 하는 사회적 욕구를 보상해줄 수 있는, 자연적 욕구인 소요(逍遙)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는 보길도에다 낙서재와 동천석실, 세연정을 지어놓고 신선놀음을 하였는가 하면, 해남 연동의 종택을 증축한다. 윤선도는 고향에 돌아와 ‘귀거래사’ 대신 국문학상 유명한 한글가사인 ‘어부사시사’를 남긴다.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선경이 가깝도다/ 찌거덩 찌거덩/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윤선도, 어부사시사 봄노래)

윤선도의 예술혼은 그의 증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년)가 이어받는다. 윤두서야말로 실제 이 집에서 거주한 주인이다. 이 집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애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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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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