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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한국영화가 좋다

무색무취의 카리스마

영화제작자 심재명의 전도연論

무색무취의 카리스마

  • TV 속 ‘귀여운 옆집 계집아이’에 불과했던 소녀는 영화 세상으로 옮겨와 ‘여왕’이 되었다. 완벽한 미인이 아니기에 오히려 완벽한 현대적 여배우의 등장. 스크린에서 그녀를 오래 보고 싶다.
얼마 전 영화제 참석차 베를린에 다녀왔다. 베를린에서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영화박물관’이었다. 포츠담 광장 주변의 최첨단 매머드 건물 ‘소니 센터’ 내에 위치한 이 ‘영화박물관’은 독일영화의 역사를 연대기별, 인물별로 짚어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특히 방대한 자료와 완벽한 디스플레이가 놀라웠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 코너. 독일의 대표적인 여배우이자, 세계 최고의 각선미로 칭송되는 다리의 소유자이며, 나중에는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세계적 스타로 군림했던 그녀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녀가 쓰던 화장품 케이스부터 편지, 신문, 의상, 사진까지. 소중한 유품 외에도 비디오기기를 통해 그녀의 이미지가 끝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 더 완벽한 외모

변변한 영화박물관 하나 없는 우리 처지에 한 여배우에 대한 존경을 담은 기록, 그 보존과 보관은 아직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당대의 스타였고, 영화의 역사와 같이 연기의 역사를 만들어간 명배우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저 잊혀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배우를 이른바 ‘딴따라’로, 혹은 분칠한 광대로 폄하하는 문화적 분위기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별로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흠모하는 ‘스타’는 있으나,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또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불멸의 스타’를 만들어내는 데는 인심이 박하지 않은가 싶다.

최근 여성문화예술기획이 펴낸 ‘여성영화인 사전’이란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에 등장하는 배우 모두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인지라 출연작만 수백 편이 넘는데, 배우 스스로 전 작품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자료도 거의 없어 각자의 필모그래피를 써내려 가는 데 애를 먹었다는 것이 편집진의 후일담이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분실한 자료 속에서, 기록하지 않은 역사는 사라져가고, 우리는 빈곤한 영화사(史)와 초라한 배우수첩만 지닌 채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영화배우 전도연에 대한 글이었는데 앞소리가 너무 길었다. 전도연은 97년 장윤현 감독의 ‘접속’으로 데뷔했다. 이후 김유진 감독의 ‘약속’, 이영재 감독의 ‘내 마음의 풍금’,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 박흥식 감독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 출연했다. 영화 데뷔 후 5년이 흘렀는데도 출연작이 5편뿐이니 꽤나 과작이다. 과거 60년대 스타들이 1년에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계약 도장을 찍었다는 얘기는 그녀에게는 황당한 무용담처럼 들릴 것이다.

영화계에 데뷔하기 전 그녀의 TV 연기 경력은 약 6년이다. 결코 짧지 않은 햇수지만, 그녀는 사실 톱 스타는 아니었다. ‘우리들의 천국’의 발랄한 여대생, ‘젊은이의 양지’의 당돌한 작가, ‘사랑할 때까지’의 착한 며느리, ‘종합병원’의 귀여운 간호사 역을 맡았던 그녀의 TV 속 이미지는 주로 ‘옆집 여자아이’ 같은 것이었다. 매번 주어진 역을 제대로 소화해냈지만 브라운관이 요구하는 ‘친밀한’ 이미지의 연기자 그 이상의 카리스마는 없는 듯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그녀를 눈여겨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귀여운 옆집 여자아이, 혹은 누이 같은 그녀에게 만만치 않은 그 무엇이 숨겨져 있었음을. 아니, 영화 연기를 통해 비로소 단단한 내면을 뚫고 연기자로서의 숨겨진 카리스마가 분출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대 배우를 압도하는 묘한 매력

‘접속’의, 혹은 ‘내 마음의 풍금’의 연기에서 무슨 카리스마가 느껴지냐고? 그녀는 영화배우로서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연기 그 자체로서의 카리스마를 묘하게 만들어 가는 드문 배우에 속한다. 이를테면, ‘접속’에서 역은 ‘여인2’라는 ID를 가질 만큼 평범한 여자, 짝사랑에 가슴아파하는 수줍은 여자지만 그녀는 사분사분 역 속으로 조용히 빠져 들어가 ‘여인2’ 수현으로 완벽하게 오버랩된다. 배우 전도연은 보이지 않고 수현이 있을 뿐이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보는 이를 은근히 매혹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후에 맡은 역도 깡패보스를 사랑하는 여의사(약속), 선생님을 사랑하는 초등학교 6학년생(내마음의 풍금), 은행원을 사랑하는 보습학원 강사(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 주로 조용한 내면의 소유자였지 남자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요부)’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전도연이 뿜어내는 연기의 카리스마는, 종종 그 은근하고도 묘한 힘으로 상대남자 배우를 압도하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만들어왔다.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순진한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 역이었지만, 때로는 위트 있고 당돌하며 또 섬세한 연기 구현으로 멜로드라마가 가지는 전형성에서 탈피해 온 것이다.

이 과정에 전도연은 배우 자체로서의 카리스마가 아닌 극중 배역을 통해 구현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곤 했다. 다섯 편의 출연작을 통해 모두 연기상을 수상한 기록은 이 ‘전혀 다른 방식의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그러나 전도연의 ‘순종적인 착한 여자 이미지’는 ‘해피엔드’에서 남편과 생후 7개월짜리 아기를 둔 커리어우먼 ‘최보라’ 역을 통해 꽤 큰 변신을 요구받는다. 최보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남편 대신 일하는 여자다.

전도연은 이 영화에서 과감한 성애 연기,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면연기를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세속적 화제와 함께 ‘여배우 전도연’에 대한 평가를 일신하는 긍정적 발판을 마련했다. 맑고 순진한, 그래서 친밀한 옆집 여자아이 같은 이미지에 강하고도 위험한, 그리고 성숙한 여성의 이미지를 더함으로써 연기 스펙트럼을 크게 넓혔다.

사실 전도연은 완벽한 미인형 여배우는 아니다. 어쩌면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배우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녀는 오히려 다양한 개성의 캐릭터와 다채로운 표정을 담을 수 있는 여유 있는 그릇을 얻은 셈이며, 특출한 외모와 몸매로 인기를 얻었던 고전적 개념의 스타에서 나아가 현대적 이미지의 연기자다운 면모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영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긴 흐름은 결국 스타의 화려한 명멸과 궤를 같이해왔음을 알 수 있다. 60년대 한국영화의 최전성기 시절 이른바 ‘트로이카’란 개념을 만들어내며 관객을 사로잡았던 문희·윤정희·남정임이라는 스타들, 70년대의 장미희·유지인·정윤희, 80년대 강수연, 90년대 중반까지의 심혜진·최진실, 그리고 새로운 영화산업의 변화에 발맞추듯 등장한 전도연·심은하·고소영에 이르기까지. 이들 여배우의 등장과 퇴장의 역사는 한국영화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전도연은 새로운 영화 언어, 새로운 영화 인력이 등장하는 최근의 한국영화를 상징하는 스타다.

스타가 많이 존재할수록 영화산업의 외형은 크고 화려해진다. 문제는 우리 여배우들의 생명이 참으로 짧고 허망하다는 것이다. ‘결혼과 함께 은퇴’라는 식의 지극히 수동적인 직업관도 그렇다. 젊은 여배우만 찾는 영화의 생산구조도 그렇고, 극히 제한적인 나이층에 강박당하는 관객들이 여배우의 연기 생명을 짧게 만드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바라건대, 수십년을 은막의 연기자로 살아가는 한국의 여배우를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도연, 바로 그녀에게 연기자로서의 긴 생명력을 기대하는 일을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신동아 2001년 4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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