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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조기유학의 그늘

‘부적응’ 끝 자살 기도한 초등생, 홈스테이 ‘아빠’아이 임신한 여고생

  •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영어권 조기유학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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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목고 진학의 지름길’‘아이비리그로 가는 길목’….
  • 조기유학을 홍보하는 달콤한 문구가 학부모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자녀를 홀로 외국에 보내려면 두 가지는 명심하라. 성공은 의지를 갖고 충실히 준비한 학생에게만 온다는 것.
  • 어떤 것도 부모의 보살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유학원의 상술에 울고 이국땅에서 방황하는 조기유학생들의 슬픈 그림자.
캐나다 킹스턴의공립학교에 다니는 김정환(가명·16)군은 지난해 수학과목에서 낙제했다. 한창 사춘기 열병을 앓으며 모든 일에 관심이 시들해진 것. 늦잠을 자느라 결석하기 일쑤였고, 자신의 숙제를 봐주던 교육청 소속 튜터에게는 “숙제가 없다”며 밥 먹듯 거짓말을 했다. 김군이 사는 홈스테이의 주인은 일찍 출근하느라 그가 언제 등교하는지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김군은 2년 전 홀로 캐나다에 온 조기유학생이다. 김군의 부모는 “학생의 가디언(guardian·보호자)인 교육청이 엄격히 출석을 관리하고, 교육청 소속 튜터가 숙제를 봐주며, 국·영·수 과목을 가르치는 한국인 교사와 유학원 관계자가 방과 후 생활도 지도해줄 것”이라는 유학원의 설명에 안심하고 아들을 캐나다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유학원의 호언장담을 덥석 믿어버린 걸 곧 후회했다.

가디언인 교육청은 김군의 장기 결석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학교가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학원 관계자도 김군의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당시 그를 가르친 한 교사는 “캐나다 교육청 소속 튜터와 학교 담임교사, 유학원 관계자가 서로 잘 알았다면 정환이가 상습적으로 결석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유학원의 허술한 운영 시스템을 꼬집었다.

이에 해당 유학원 관계자는 “우리는 김군의 결석 사실을 학교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의 불성실한 생활태도에 대해 여러 번 지적했지만 아이가 잘 듣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학부모로선 이러한 상황을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유학원에 불만을 터뜨릴 수밖에.

방치된 ‘관리 유학’

‘영어 습득의 지름길’ ‘외국어고·민족사관고 입학의 관문’…. 해외 조기유학을 홍보하며 유학원들이 내세운 화려한 광고문구다. 조기유학 열풍이 거세지면서 각종 유학업체가 ‘단기유학’ ‘교환학생’ ‘계절 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세우며 학부모를 유혹하고 있다.

통계를 통해 조기유학 열풍을 가늠해볼 수 있다. 지난해 10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조기유학을 떠난 초·중·고교생은 2000년 4397명에서 2001년 7944명으로 80.7%(3547명) 증가했다. 또 2002년엔 1만132명으로 전년에 비해 27.5%(2188명) 증가하는 등 조기유학생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것. 2003, 2004년의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열풍은 좀처럼 식지 않을 것”이라 분석한다.

명문대에 진학한 유학생들의 성공담은 조기유학에 대한 기대치를 더욱 높였다. 성공한 학생들은 한결같이 “영어능력이 향상된 것은 물론, 세계를 보는 넓은 안목과 자립심까지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그늘도 존재하는 법. 준비 없이 부모 품을 벗어난 ‘나홀로 유학족’에게 조기유학은 오히려 독(毒)이 된다. 일부 유학원의 허술한 프로그램 운영과 상술에 피해를 본 학생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조기유학의 가장 큰 문제는 미성숙한 학생들이 부모와 떨어져 지내면서 그 시기에 필수적인 정서 발달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공립고교에 다니는 ‘나홀로 조기유학생’ 유정아(가명·17)양은 지난 2년간 한국 교포가 운영하는 관리형 기숙사에 머물며 마음고생을 했다. 한국인 교포 가족이 유학원 타이틀을 내걸고 관리형 기숙사를 운영했는데, 4채의 집에 무려 30~40명의 한국 학생이 머물고 있었다. 유양은 “말이 좋아 ‘기숙’이지, 수많은 학생을 커다란 우리에 가둬놓은 것 같았다”고 떠올렸다.

이 업체 대표는 새 학기가 되면 한국으로 건너와 ‘손님몰이’를 한다. 조기유학에 관심 많은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설명회를 여는 것. “내가 부모라는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양질의 한국음식을 제공하고, 학생들에게 부족한 과목은 과외를 받을 수 있게 하겠다”는 공언은 학부모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2001년 8월 뉴질랜드로 건너간 유양은 기숙사의 열악한 시스템에 혀를 내둘렀다. 또 과외비 명목으로 다른 홈스테이에 비해 한 달에 50만원 정도를 더 지불했지만, 실제 과외교사로 나선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였다. 심지어 과외교사는 물어보는 것조차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유양이 다른 과외교사를 구하려 하자 기숙사측이 이를 막았다. 매끼 식사마다 제공되는 반찬도 한두 가지가 전부였다. 힘든 기숙사 생활에 학교 적응마저 힘에 부쳤다.

“한창 엄마 손길을 받아야 할 초등학생들은 더 심각한 상황이에요. 기숙사에서는 아이들의 생활에 별 관심이 없거든요. 제때 씻지도, 목욕도 하지 않는 아이가 많았어요.”

유양이 기숙사에서 나가려 하자 “나가면 다니던 중학교도 옮겨야 해. 나쁜 친구들의 유혹도 만만치 않을 거야. 자신 있어?” 하는 식의 엄포가 이어졌다. 한국에 머물던 유양의 부모는 아이가 정말 잘못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했다.

결국 기숙사의 감언이설은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다행히 한 교포의 도움으로 유양은 현지인 홈스테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은 훨씬 자유롭고 마음도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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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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