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피도 눈물도 없는 맹수제국의 쿠데타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9-06-05 1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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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햇볕을 받아 바위는 따뜻했다. 오후는 무료했고, 흙은 자글거렸다. 비너스(암사자 ·12세)가 떠난 사파리는 평화롭다. 칸(수호랑이·3세)이 낮잠에서 깨어나 포효한다. 칸은 왕(王)의 자질을 가졌다. 스킨십에 강하다. 아래·위 맹수를 잘 다독거린다. 호랑이왕 시저(수호랑이·15세)도 이 녀석 앞에선 머뭇거린다. 녀석도 아직은 발톱을 숨겼다. 왕에게 덤비지 않는다.

    칸은 백호(白虎)다. 흰털 바탕에 갈색털 줄무늬를 가졌다. 민화(民話)는 백호를 상상의 동물로 묘사한다. 백호는 서쪽을 지키는 신령(西白虎). 이 상상의 동물은 1951년 현실로 나타났다. 히말라야에서 백호 수컷을 발견한 것. 지금 살아 숨쉬는 100마리 남짓한 백호는 모두 녀석의 자손이다. 녀석은 벵골호랑이와 짝을 맺어 유전자(DNA)를 퍼뜨렸다.

    비너스는 어디로 갔을까?

    신록이 우거진 5월의 햇살은 눈부셨다. 수사자 레오(5세)는 성적 취향이 독특하다. 암사자보다 암호랑이를 더 좋아한다. 레오가 점찍은 녀석은 갓 암컷 태를 내기 시작한 흰비(암호랑이·2세). 마주 앉은 두 맹수의 모습이 정겹다. 레오는 7월이면‘아빠’가 된다. 3월 말 암호랑이 들호(5세)의 질에 정자를 뿌렸다. 호랑이 암컷은 110일간 새끼를 밴다.

    사자집단의 왕은 여비(수사자·10세)다. 녀석은 2002년 집권했다가 이듬해 실각했다. 6년 만에 왕위를 되찾은 것. 녀석은 ‘여우’다. 실각한 뒤 발랑거리고 살랑대면서 어린 왕들의 비위를 맞췄다. 왕들은 차례로 거세됐으나 그는 지금껏 살아남았다. 바닥으로 추락했다가 되돌아온 녀석은 겸손하다. 먼저 시비 거는 법이 없다.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백호(白虎) 칸이 포효하고 있다. 녀석은 왕에 오를 자질을 갖췄다.

    에버랜드 ‘와일드 사파리’엔 호랑이와 사자가 동거한다. 1976년 사자왕국으로 출발한 뒤 87년 호랑이왕국이 꾸려졌고, 92년 사자와 호랑이를 합사했다. 1만6500㎡(5000평)의 작은 초원에서 벌어지는 맹수의 권력다툼과 사랑, 질투는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사람의 그것과 얼마간 비슷하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올랐기에 매섭고, 힘을 가졌기에 거칠다.

    3월27일 맹수제국에 큰 변화가 있었다. 백호왕국이 새로 들어선 것. 사람들은 갈색털 호랑이 대신 흰털 호랑이를 사파리에 넣었다. “백호가 나타나면 권력자는 몸을 낮추고 부자는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고 전설은 구전한다. 민담은 “산전수전 겪은 호랑이가 세상 이치를 깨달으면 털이 희게 변한다”고 전한다. 백호왕국과 사자왕국은 전면전에 앞서 탐색전을 벌이고 있다.

    틈이 날 때마다 사자, 호랑이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돈과 자리를 둘러싼 사람의 이전투구가 맹수의 권력다툼과 얼마나 닮았을까’라는 막연한 호기심에서 비롯한 관찰이었다. 맹수의 제왕전쟁은 피도 눈물도 없었다. 녀석들의 쿠데타는 실감나는 약육강식의 현장이었다. 권력 줄을 놓은 왕은 2인자가 아닌 바닥으로 추락했다.

    2005년 여름, 암사자 비너스는 무서울 게 없었다. 호랑이를 두들겨 패는 게 비너스의 놀이였다. 녀석은 맹수제국의 여제(女帝)로 10년간 군림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소란스럽게 다퉜다. 비너스는 호랑이들이 버릇없이 설친다는 듯 호랑이 구역으로 향했다. 비너스를 따라 사자들이 떼로 호랑이들에게 달려들었다. 호랑이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얼어붙은 듯 오금을 펴지 못했다.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수사자들의 갈기털이 곤두서자 호랑이들은 후미진 곳으로 꽁무니를 뺐다.

    비너스는 가장 센 사자 수컷을 다스림으로써 ‘작은 초원’을 지배했다. 비너스의 마음을 얻은 자가 차례로 왕위(王位)에 올랐다. 비너스의 관능에 포박당한 어린 수사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하고, 왕좌에 오른 어린 수사자가 늙으면 비너스에 매료된 또 다른 젊은 수사자가 반역을 일으키면서 ‘사자 왕국’의 왕위는 계승됐다.

    2005년 초 여비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아이디(8세·수사자)의 솟구치는 양기도 비너스의 교태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아이디는 하루 종일 여제의 곁을 지켰으며 하위계급의 수사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비너스를 흠모했다.

    비너스가 세상을 다스리는 법은 비겁하면서도 영특했다. 비너스는 마음에 안 드는 사자나 호랑이가 있으면 다가가 시비를 건다. 그러면 녀석의 매력에 포박당한 힘 좋은 수사자가 비너스가 눈길을 준 사자나 호랑이를 혼내준다. 폭력은 질투, 욕심에서 나오는 법. 맹수는 먹이·섹스·영역을 놓고 욕심과 질투를 부린다.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시베리아호랑이 십육강이 수사자 테크노의 관자놀이를 후려치고 있다. 시베리아호랑이는 덩치가 커

    비너스의 색공

    비너스는 대(大)자로 누워 수컷에게 속살을 보여주며 앙탈을 부릴 때도 앙칼졌다. 사람의 눈으론 종잡을 수 없는, 맹수의 눈에만 보이는 특별한 매력을 가졌다. 수사자의 목덜미를 핥는 비너스의 혀는 능란했다. 녀석은 강한 수컷을 ‘핥고, 빠는’데 능숙한 타고난 아부꾼이었다.

    아부는 DNA를 퍼뜨리고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 전략적 행위라고 동물행동학은 가르친다. 인간과 동물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성이라는 것.

    빌 클린턴이나 로널드 레이건 같은 정치가들은 유권자의 ‘엉덩이를 핥는(ass-licking)’일에 능란했다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전 편집장 리처드 스텐젤은 말한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아래·윗사람을 다독거리고(stroking) 빨아주는(sucking up) 일에 뛰어나야 한다는 것. 비너스가 그랬다.

    사람과 98% 넘게 DNA를 공유하는 침팬지의 아부는 혀를 내두를 만큼 전략적이다. 동물행동학의 권위자 프랜스 드 발은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에게 우러러보듯 인사하는 까닭은 사귀어놓으면 도움이 되는 개체의 환심을 사고픈 마음에서라고 말한다. 드 발은 침팬지가 우두머리에게 굽실거리는 행위에 ‘절(복종적인 인사·submissive greeting)’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위계급의 수컷 침팬지는 틈날 때마다 보스의 털을 골라주거나 몸을 핥아준다. 우두머리의 발에 키스하는 모습도 관찰된다. 대장에게 알랑거리는 녀석은 섹스, 먹이에서 혜택을 누린다. 보스가 비호하기 때문이다. 침팬지의 아첨은 DNA에 각인된 생존 전략이다. 보스한테 빌붙을수록 권력의 위쪽을 차지한다. 상위계급의 수컷들이 암컷과의 섹스를 분점하는 침팬지는 권력 피라미드의 위쪽을 차지할수록 DNA를 후손에게 물려줄 가능성이 커진다.

    동물의 전략적 아부는 ‘위’에서 ‘아래’로도 이뤄진다. 쿠데타를 예비한 상위계급의 침팬지는 우군을 늘리고자 하위계급 침팬지의 털을 골라준다. 암컷들의 몸단장을 돕고 새끼들과 잘 놀아준 수컷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노련한 우두머리는 쿠데타를 막고자 젊은 수컷들과 영향력 있는 암컷들에게 털고르기뿐 아니라 음식을 나눠주면서 지지를 이끌어낸다. 부하의 지지는 경쟁자와 대결할 때 상대를 찌르는 칼이 된다.

    아이디는 여비의 왕위를 빼앗을 때 테크노(8세·수사자), 투스(8세·수사자)의 도움을 받았다. 합종연횡(合從連衡)은 동물의 권력다툼에서도 발견된다. 1995년 ‘호랑이 제국’을 끝장낸 수사자 포철은 동생 인철과 공동 정권을 만들었다가 인철이 천하와 손잡으면서 천하에게 왕위를 내놓아야 했다.

    버빗원숭이들은 우두머리에게 빌붙음과 동시에 현재는 지위가 낮더라도 계략이 뛰어나 권력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은 개체를 짚어내 털고르기를 해준다. 미래의 권력자한테 알랑거림으로써 유대관계를 맺어놓으려는 것이다.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백호는 성정이 급한 벵골호랑이와 달리 싸움을 잘 하지 않는다. 수태가 가능한 ‘그날’엔 무리의 우두머리가 암컷을 독점한다. 사자 암컷은 ‘센 놈’의 씨를 받아 ‘센 놈’을 낳으려고 한다.

    전설의 사자왕

    비너스도 젊은 수사자로 ‘갈아타기’ 전에 버빗원숭이들의 그것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2006년 봄 비너스는 아이디가 낮잠을 잘 때마다 갓 어른 흉내를 내기 시작한 여섯살 연하의 쿠쿠(당시 3세) 앞에서 교태를 부렸다. 여비를 몰아내고 아이디를 옹립할 때도 그랬다.

    그 즈음 사자왕국의 파벌은 넷이었다. 아이디-테크노의 ‘형제 정권’(아이디가 왕이었지만 과격하기론 테크노가 으뜸이었다)과 투스(8세·수사자)가 이끄는 서울대공원파(2001년생인 투스·탤런·키바·하울은 서울대공원에서 태어났다), 갓 어른 흉내를 내기 시작한 쿠쿠와 비너스의 딸인 사강(6세·암사자)이 주도하는 쿠쿠파. 그리고 옛 실력자 여비가 후미진 곳에서 재기를 꿈꿨다.

    아이디가 낮잠을 자면 비너스는 쿠쿠의 차지였다. 녀석은 비너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수사자나 암사자가 비너스에게 다가오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쿠쿠는 비너스가 다른 수사자를 향해 발을 떼면, 여제의 엉덩이를 잡고 매달렸다. 비너스가 쿠쿠를 뿌리치고 투스 앞으로 다가섰다. 쿠쿠의 질투심이 동했다. 수사자 간의 싸움. 쿠쿠는 투스의 얼굴을 앞발로 내리쳤다. 젊은 사자의 주먹질은 대단했다. 투스는 쿠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비너스는 섹스를 권력 유지 도구로 활용했다. 영특한 암사자는 수사자가 자신을 공격할 기미가 보이면 흙을 깔고 누워 속살을 보여주며 앙탈을 부린다. 원숭이들도 권력자가 다가오면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떨거나 싱글거린다. 알랑거리는 행동이 인간의 전유물만은 아닌 것이다.

    위계는 집단을 이뤄 사는 사람을 포함한 거의 모든 동물사회에서 나타난다. 질서가 없는 사회는 멸망한다. 서열이 있는 곳에선 예외없이 아첨이 발견된다. 둘이 모이면 위·아래가 생기고, 셋만 모여도 리더가 나타나는 이치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침팬지 암컷에게도 섹스는 전략적 아부의 수단이다. 암컷은 실력자를 다독거리려고 엉덩이를 추켜세워 성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발정기엔 관계가 역전된다. 호의를 얻으려는 수컷이 음식을 바치고, 암컷의 털을 골라준다.

    사람의 아부도 침팬지의 아첨과 마찬가지로 DNA에 아로새겨진 본성이다. 다만 언어를 사용하고, 문명을 이룬 인간의 아부는 동물의 그것보다 복잡하다. 교활한 영장류의 혈통을 이어받아 진화한 인간은 면전에서 아첨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잇속에 맞게 행동하는 데 능숙한 사람은 ‘전략적으로 찬사한다’.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지도자가 악행을 저지르면 백호가 광포해진다고 민담은 전한다. 하이에나는 사자나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구력이 좋아 야생에서도 사자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비너스는 전설의 사자왕 천하를 기억하는 유일한 암사자다. 천하는 호랑이의 시대(1992~94년)를 끝장낸 포철과 왕위 다툼(1995~2000년)을 벌이면서 사파리를 태평성대로 이끈 초원의 절대자. 천하의 시대엔 호랑이와 사자가 덜 다퉜다. 사육사들은 천하를 성군, 천하 집권기를 평화의 시대로 기억한다. 천하가 물러난 뒤 순식(2001년 집권), 여비(2002~2004년 집권), 아이디가 차례로 비너스를 차지했다.

    시베리아호랑이 십육강(7세·수호랑이)은 ‘호랑이의 시대’를 알지 못한다. 1992년 호랑이와 사자가 합사된 뒤 한동안은 호랑이가 천하를 호령했다. 떼로 몰려다니면서 사자들을 두들겨 팼다. 사자들은 후미진 곳에서 공포에 떨었고, 호랑이들은 제멋대로 초원을 쏘다녔다. 호랑이는 본래 독불장군(獨不將軍)인데, 1992~94년엔 떼로 몰려다녔던 것이다.

    아이디가 왕위에 오른 뒤 비너스의 권력이 정점에 올랐을 때 와일드 사파리는 1국(國)체제였다. 아이디가 비너스를 흠모하며 맹수제국을 다스리는 사자의 천하.

    사자들은 틈만 나면 호랑이를 때리고 괴롭혔다. 비너스와 카시오(10세·암사자)가 주로 다툼을 부추겼는데,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녀석들은 심심할 때마다 수사자를 이끌고 호랑이 구역으로 몰려가 호랑이들을 패주었다. 호랑이들은 도무지 뭉칠 줄 몰랐다. 동생이 사자에게 공격을 당해도 형이 모른 척하는 게 호랑이다. 유아독존(唯我獨尊).

    호랑이왕국과 사자왕국이 합사한 초기 집단 공격이라는 이상 행동을 보이던 호랑이들은 1995년께 본성을 되찾았는지 단독생활에 들어가면서 패배의 역사를 밟았다. 단독자(單獨者) 호랑이는 누구도 사자집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호랑이는 야생에서 밀림 혹은 툰드라에 산다. 사자가 사는 초원과 달리 밀림, 툰드라에선 단독생활이 유리하다. 형제나 부모도 호랑이에겐 친구가 아닌 적(敵)이다.

    사자는 고양잇과 동물로는 특이하게 떼로 싸움을 벌인다. 야생에선 적게는 5마리, 많게는 30마리가 모여 산다. 호랑이보다 사자가 사회성이 높은 것이다. 사파리에서 사자가 오랫동안 호랑이를 압도한 것은 뭉칠 줄 모르는 호랑이와 사자 집단의 쟁투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사회성에서 호랑이를 닮았는가, 아니면 사자에 가까운가.

    호랑이의 시대는 1995년 수사자 포철에 의해 끝났다. 호랑이들을 하나둘씩 때려눕힌 포철 그룹은 왕가(王家)로 격상됐다. 그러나 포철에겐 호적수가 있었다. 포철-천하의 왕위 다툼은 엎치락뒤치락 6년 동안 이어졌다. 천하는 호랑이와 사자를 하나로 아울렀다. 비너스는 세 살 때이던 2000년 천하의 품에서 권력의 맛을 보았고, 수컷 다스리는 법을 익혔다.

    앞서 언급했듯 맹수의 권력욕은 영토·암컷·먹이에서 비롯한다. 실력자는 발정기의 암컷을 거의 독점하고, 초원을 제멋대로 쏘다닐 수 있다. 다만 사파리에선 하루 5kg가량의 닭고기가 주어지고, 가끔씩 토끼고기·돼지고기가 공급되는 터라 권력과 먹이의 상관관계는 엷다. 그러나 권력을 가지면 영토와 암컷을 맘껏 차지하는 것은 야생과 똑같다.

    수태가 가능한 ‘그날’엔 왕이 발정난 암컷을 독차지한다. 고양잇과 맹수의 암컷은 볼품없는 수컷에겐 몸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센 놈’의 씨를 받아 ‘센 놈’을 낳으려고 한다. 왕은 암컷이 ‘그날’을 맞으면 종일 그 암컷 곁에 머무르면서 20~40회 ‘러브’를 한다. 하루 60회 넘게 암컷의 질에 성기를 집어넣는 녀석도 있다. 한 차례 ‘섹스’에 걸리는 시간은 20~60초.

    수태가 가능한 ‘그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영원한 권력은 없다. 권력 남용은 권력 붕괴의 씨앗이다. 사자, 호랑이 암컷은 25일 전후로 발정이 온다. 발정기간은 5~7일. 암컷의 발정기는 개체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왕은 날마다 새로 발정한 암컷을 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아랫도리 힘이 약해진다. 절대 권력의 쾌락이 쿠데타의 빌미가 되는 것이다.

    동물 세계에서 보스는 대체로 덩치가 크다. 사자무리에선 갈기털이 무성한 놈이 대장일 가능성이 높다. 사파리에 이웃한 몽키밸리 다람쥐원숭이 무리의 대장은 홍만이(10세·수컷). 홍만이는 다른 수컷보다 10cm가량 몸집이 크다. 녀석은 5년 넘게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다람쥐원숭이들은 봄 햇살을 받으면서 호들갑스럽게 나무를 타고 있었다.

    다람쥐원숭이는 영장목 감는꼬리원숭잇과의 포유류다. 사자, 호랑이보다 사람과 가깝다. 영장목 동물들의 권력투쟁은 맹수들의 그것보다 사람을 더 많이 닮았다.

    사자는 식육목 고양잇과의 포유류로 진화 과정에서 사람과 엇갈린 지 오래다. 사자는 같은 고양잇과의 호랑이와도 그다지 가깝지 않다. 표범, 재규어가 사자와 같은 속으로 서로 사촌뻘쯤 된다. 영장목 사람과로 분류되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은 영장목 성성잇과의 침팬지로, 인간과 침팬지의 관계는 침팬지와 고릴라, 원숭이의 관계보다 훨씬 가깝다. “침팬지는 권력을 다툴 때 음모와 술수도 부린다. 한바탕 폭력이 지나간 다음엔 그루밍(털, 깃털 등을 쓰다듬고 고르는 행동)과 포옹으로 평화도 만든다.”(프랜스 드 발·동물행동학자)

    홍만이는 왜 덩치가 클까? 몸집이 커서 대장이 된 걸까, 대장이 된 뒤 체격이 커진 걸까. 다람쥐원숭이는 보스가 되면 덩치를 키우는 호르몬이 분비돼 몸이 분다. “내가 무리의 대장”이라고 몸으로 웅변하는 셈. 침팬지 다음으로 사람과 가까운 고릴라의 대장은 왕위에 오르면 등쪽의 털이 은색 또는 회색으로 변한다. 권력을 장악하면서 털색이 럭셔리하게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고릴라왕(王)을 실버백이라고 부른다.

    기린 무리에선 목이 가장 긴 녀석이 대장이다. 기린도 왕위를 차지하면 목이 길어진다. 사람도 권력을 가지면 ‘더 큰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면서 돋보이려고 한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장 보들리야르는 “사람은 상품의 효용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권력 관계를 나타내는 상품의 이미지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통치자에게는 금(金)이 섞였고, 수호자에게는 은(銀)이 섞였으며, 생산자에게는 동(銅)이 섞였다.”

    홍만이가 밀웜(딱정벌레 애벌레)의 달콤한 맛을 즐길 때 다른 원숭이들은 톱밥을 씹었다. 밀웜이 ‘금’이라면 톱밥은 ‘동’이다.

    홍만이는 틈날 때마다 다른 수컷의 등 뒤에 올라탔다. 사람의 암컷, 수컷이 섹스할 때 후배위라고 부르는 자세다. 동성 간의 성행위가 떠오른다. 마운팅이라고 불리는 이 행위는 대장이 하위계급에게 서열 관계를 일깨우고, 부하들을 훈계하는 것이다. 다람쥐원숭이 무리의 새끼는 모두 홍만이의 자식이다. 다른 수컷들은 섹스를 할 수 없다.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려는 욕구는 풀, 나무를 포함한 모든 생물에게 각인된 본성이다. 그렇다면 하위계급의 맹수는 성욕을 어떻게 풀까?

    괴물의 등장

    사자는 호랑이보다 승자독식(勝者獨食·the winner takes it all)이 덜 엄격하다. 왕이 잠을 자거나 먹이를 먹을 때 서열 낮은 수컷이 짝짓기를 한다. 암컷은 ‘센 놈’에게 복종하면서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바람을 핀다. 호랑이는 ‘센 놈’이 거의 모든 암컷을 독식한다. ‘그날’에 하위 수컷이 암컷에게 접근하면 그 녀석은 대장에게 멍들 만큼 맞는다. 어느 사회에나 간 큰 녀석은 있게 마련이다. 맞아 죽을 각오로 권력자의 눈을 피해 ‘거사’를 벌이는 호랑이 수컷도 없지 않다.

    사자, 호랑이 권력다툼 10년의 기록
    동물의 세계에서 희귀하면서도 이상한 제도가 일부일처제다. 금실 좋기로 소문난 원앙과 기러기도 실은 바람둥이다. 부부의 연을 맺은 직박구리 암수는 ‘마주 운다’. 부부가 함께 울어 마치 한 마리가 우는 것처럼 들린다. 이 소리는 청아하면서도 포근한데, 오랫동안 함께한 부부일수록 화음이 더 아름답다. 그런데 녀석들도 모노가미(monogamy·일부일처제) 신봉자는 아니다. 흘레붙을 때는 모노가미로 보이지만 실제는 폴리아모리(polyamory·비독점적 다자연애)인 것이다.

    평생 짝을 지어 다니는 부부로는 두루미(鶴)가 있다. 녀석들은 한번 부부의 연을 맺으면 배우자가 숨을 거둘 때까지 좀처럼 한눈팔지 않는다. 금실을 자랑하는 다른 새들이 짝짓기할 때만 ‘찐하게’ 사귀는 반면, 도포를 입은 선비를 닮은 두루미들은 짝을 바꾸지 않고 해로(偕老)한다. 배우자와 사별한 두루미는 재혼하기도 쉽지 않다. 이혼한 녀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부부가 바람 피우지 않고 백년해로하면 학처럼 산 것이다.

    수사자는 호랑이 암컷을 사랑하기도 한다. 수사자 사룡과 암사자 명랑은 라이거를 낳았다. 정신이상이라거나, 성적 취향이 독특하다고 하기엔 둘은 너무도 애틋했다. 일부일처(一夫一妻)처럼 늘 붙어다녔고 질기게 사랑했다. 사룡은 수사자와 호랑이의 공격으로부터 명랑을 보호했다. 사룡과 명랑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룡과 명랑의 딸 크리스(19세·암라이거)는 요즘 외롭다. 얼마 전 한 배에서 태어난 오빠 라피도가 죽었기 때문이다. 라피도는 사파리의 괴물이었다. 덩치가 사자·호랑이보다 한 배 반쯤 컸다. 사자·호랑이는 라이거와의 싸움에서 적수가 되지 못한다. 라이거는 호랑이의 순발력과 사자의 파워를 함께 물려받는다. 크리스는 사람 나이로 80세를 코앞에 뒀다. 부모의 업보 탓인지 라이거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 호랑이와 사자의 잡종은 2세를 만들지 못한다.

    수호랑이와 암사자의 자식인 타이온은 동물원에서도 좀처럼 태어나지 않는다. 수호랑이는 암사자에게 무관심하다. 타이온은 체구는 작지만 ‘깡’에선 어떤 맹수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쿠데타

    쿠데타는 2005년 10월 일어났다. 쿠데타의 주역은 시베리아호랑이 십육강.

    10월의 어느 날 사자왕 아이디가 낮잠 자는 동안 비너스와 쿠쿠가 수런거렸다. 그 사이 카시오가 비너스 흉내를 냈다. 사자들을 이끌고 호랑이 구역으로 향한 것. 비너스도 뒤늦게 무리에 합류했다. 호랑이들은 혼비백산했다. 암호랑이 들호는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으나, 그곳도 속수무책이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단 한 마리의 호랑이는 예외였다. 십육강. 녀석은 배를 땅에 붙이고 어깨를 곧추세웠다. 호랑이의 힘은 수염에서 나온다. 수염은 공기의 흐름을 잡아내는 더듬이 구실을 한다. 광포하게 호랑이들을 윽박지르던 테크노가 십육강이 올라앉은 바위에 올라탄다. 십육강은 수염을 세우고 자세를 낮춘 뒤 으르렁거렸다.

    일대일 맞장. 십육강은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이날 십육강은 사자집단의 2인자를 무찔렀다.

    호랑이는 싸울 때 사자보다 빠르다.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는데, 뒷다리로 버티고 서서 앞발 둘로 연거푸 가격한다. 호랑이는 뒷발이 앞발보다 길어 ‘원투 스트레이트’가 가능하다. 순발력에서도 사자보다 앞선다. 사자는 앞발 하나를 축으로 세워놓고 다른 발로 공격한다. 체중이 상체에 쏠려 있고 앞가슴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먹의 파괴력은 사자가 호랑이보다 강하다.

    십육강은 호랑이의 장점을 살렸다. 테크노의 훅을 피한 뒤 안면을 연거푸 가격했다. 십육강이 가공할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자, 테크노가 쩔쩔매면서 꽁무니를 뺀다. 이빨은 최후의 일격. 상대가 타격을 입고 큰 약점을 보이면 이빨로 숨통을 끊는다.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아이디가 잠에서 깨어나 포효했다. 사파리의 호랑이와 사자들이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듯 조용해진다. 하지만 십육강은 달랐다. 싸움질할 때처럼 자세를 낮추고 아이디를 노려보았다. 사강을 품에 안은 쿠쿠도 아이디가 못마땅한 눈치다. 제법 어른 흉내를 내기 시작한 쿠쿠의 갈기털이 일어섰다.

    십육강의 별명은 그때까지 ‘마을 이장’이었다. 순박한 데다 멍한 구석도 있었다. 그런 녀석이 맹수제국의 2인자를 때려눕힌 것이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십육강은 아이디마저 무찌른다. 그 뒤로 사자들은 후미진 곳으로 밀려났고, 호랑이들은 제멋대로 쏘다녔다.

    ‘사자와 호랑이 싸움의 승자는?’이라는 말초적 호기심의 정답은 ‘살아남은 놈이 강하다’ ‘힘센 놈이 이긴다’는 것이다.

    시베리아호랑이는 덩치가 커 사자와의 일대일 싸움에서 유리하다. 십육강은 호랑이 집단의 유일한 시베리아호랑이. 녀석은 몸무게가 230kg이 넘었다. 사자 수컷은 210kg, 벵골호랑이는 180kg이 나간다. 십육강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 맹수제국의 권력다툼은 덩치가 작은 벵골호랑이와 사자의 싸움이었다.

    흥망성쇠(興亡盛衰)

    영원할 것 같던 사자제국은 무너졌다. 사람의 권력이 그러하듯 성한 것은 쇠하게 마련이다. 호랑이들은 더 이상 비너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자 제국’을 무너뜨린 십육강은 그전까지 ‘호랑이 자치구’의 우두머리였던 호비(8세·수호랑이)도 무릎 꿇렸다. 초원의 절대강자로 등극한 것이다. 암호랑이들은 이제 십육강에게만 아랫도리를 허락한다. 십육강은 사자들의 구박으로부터 암컷들을 지킨 호랑이 집단의 영웅이다. 마을 이장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고자(鼓子)인 수사자 유로(5세)의 처세술은 기묘하다. 저보다 약한 사자, 호랑이 앞에서는 수사자로 행세하고, 기운이 센 맹수들 앞에서는 암컷처럼 교태를 부린다. 유로가 속살을 보여주며 어린 수컷들의 관심을 끌자, 질투심이 동했는지 니케(5세·암사자)가 유로의 등가죽을 물어뜯는다.

    암사자 니케는 비너스를 쏙 빼닮았다. 수사자와의 스킨십이 비너스만큼이나 능숙하다. 또래의 수사자들은 니케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벌써부터 아귀다툼을 벌인다. 니케는 자신의 시대를 예비하고 있다. 자글거리는 흙에 등을 비비면서 아픔을 달래는 유로의 모습이 서글퍼 보였다. 녀석은 싸움을 하다가 성기를 잃었다.

    십육강은 틈만 나면 아이디와 테크노를 두들겨 팼다. 벼락출세한 십육강은 광포했다. 이빨을 드러내며 사자를 위협했다. 맹수들의 싸움은 대개 주먹질로 끝난다. 패배한 녀석이 꽁무니를 빼면 대개 그냥 놔둔다. 하지만 십육강은 달랐다.

    물론 그대로 물러설 비너스가 아니었다. 비너스에겐 젊은 수사자 쿠쿠가 있었다. 그런데 쿠쿠와 십육강의 싸움 역시 싱겁게 끝났다. 아이디, 테크노, 쿠쿠가 차례대로 십육강에게 꼬리 내린 것이다. 아이디, 테크노, 쿠쿠는 떼로 십육강을 공격하지 않았다. 공동의 적에 맞서기보다는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빴다. 뭉칠 줄 모르는 호랑이의 행태를 보인 셈이다.

    십육강은 결국 사람에 의해 거세됐다. 최강자인 사람이 맹수의 적자생존에 개입해 녀석을 우리 안에 가둔 것이다. 녀석이 싸움을 할 때 이빨을 자주 드러냈기 때문이다. 사육사들이 ‘지프’로 싸움을 말리는데도 녀석이 공격을 멈추지 않는 일도 있었다. 십육강은 권력을 남용했다. 사람 세상에서도 촌부(村夫)가 벼락권력을 쥐면 십육강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권력에 취해 돈, 여자를 탐하다 망신 당한 사람도 많다.

    잘 뭉치는 백호

    십육강이 축출되면서 권력은 비너스에게로 돌아왔다. 호랑이들은 구석진 곳으로 쫓겨났으며 사자들은 예전처럼 호랑이를 윽박질렀다. 벵골호랑이 세강(9세)이 이따금 반항했지만 아이디-테크노 형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시 권력을 쥔 비너스는 예전만 못했다. 비너스의 등짝은 발톱 자국투성이다. 큰 싸움을 벌이는 수사자들과 달리 암사자들의 몸엔 상처가 별로 없다. 비너스가 상처 입은 것은 탤런(8세·암사자)을 비롯한 암사자들의 공격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은 속일 수 없는 법. 비너스도 늙었다. 털색은 짙어지고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다.

    백호 칸은 십육강을 닮았다. 백호는 고구려 벽화와 경복궁 영추문(西門)에 그려졌다. 백호는 갈색털 호랑이와 다르게 잘 뭉친다. 싸움을 즐기지 않지만 한번 붙으면 물러서지 않는다. 민담은 “백호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 영물이다. 하지만 지도자가 악행을 저지르거나 인륜을 거스르는 일이 많아지면 광포해진다”고 전한다. 전설 속 백호는 오늘의 한국을 어떻게 느낄까?

    홍비(7세·암백호)가 성기를 잃은 수사자 유로에게 싸움을 건다. 홍비는 백호답지 않게 공격성이 강하다. 백호 암컷인 엔젤(6세)과 평화(4세)가 홍비에게 혼쭐이 났다. 엔젤은 털색이 백호 중에서도 하얗다. 몸 관리를 잘 한다. 녀석은 평화 전도사다. 대결보다는 화합을 좋아한다.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동료가 있으면 몸을 비비면서 안정시킨다. 갈색털 호랑이에겐 잘 나타나지 않는 행동이다.

    백호는 성정이 급한 벵골호랑이와 달리 싸움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종끼리만 그렇고 다른 종과 맞닥뜨리면 성격이 달라진다. 백호 수컷은 몸무게가 195kg으로 사자와 정면 승부를 벌여볼 만하다. 사자는 백호를 호랑이와 다른 종으로 여긴다. 아직은 탐색기여서 백호왕국과 사자왕국은 큰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사자들이 백호 구역을 침범하지 않고 있는 것.

    권력의 끝

    칸은 동료들과 스킨십을 하면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다. 단독자로 살아가는 갈색털 호랑이 수컷에게선 발견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1995년 포철이 집권한 이후 맹수제국의 대장은 포철-천하-포철-천하-포철-천하-순식-여비-아이디-십육강-아이디-여비로 이어졌다. 그중 십육강만 호랑이다. 칸은 십육강처럼 맹수제국의 절대자가 될 수 있을까. 녀석의 호적수는 비너스를 빼닮은 암사자 니케다.

    수사자 레오와 암백호 흰비가 티격태격한다. 수사자와 암백호의 잡종은 어떤 모습일까.

    비너스는 사파리를 떠났다. 사파리 밖 동물원 우리에 갇혀 사람의 구경거리가 됐다. 힘이 쇠하고 약해진 녀석은 옆구리를 땅에 깔고 누워 있었다. 사람 나이로 비너스는 예순이다. 검버섯이 더 늘었으며 피부색은 더 짙어졌다. 나들이 온 한 어린이가 말했다.

    “아빠, 저 사자는 어디가 아픈가 봐.”

    비너스의 시대는 끝났다. 신록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도움말 : 권수완 에버랜드 동물원장, 한국두루미네트워크 이기섭 박사, 정상조 에버랜드 사육사, 문인주 에버랜드 사육사,

    강철원 에버랜드 사육사, 송영관 에버랜드 사육사, 황수전 전 에버랜드 사육사. 이영원 전 에버랜드 사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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