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영어 골프 댄스까지 가르쳤지만, 문제는 가족사랑”

  • 장덕기 내과의

    입력2006-08-02 09: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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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덕기씨(내과의원 원장·40)와 염정애씨(40) 부부는 자녀 교육에 관한 한 프로급이다. 아들 현지(중학교 1학년)와 딸 현빈(초등학교 5학년)이는 CNN을 시청한 뒤 그 내용을 브리핑하거나 토론하는 수준의 영어실력을 자랑하며, 영어와 동시에 시작한 일어는 기초만 떼고 그만두었지만 웬만한 회화가 가능하다.

    장원장이 직접 아이들에게 가르친 컴퓨터가 전문가급인데다 햄통신 자격증까지 갖고 있어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키울 수 있느냐”며 부러움이 대단하다.

    자녀 교육에 좋다는 것은 모두 시도해본 장원장이지만, 95∼96년 조기유학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단다. 두 아이는 엄마와 함께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호주 시드니 페넌트힐 공립학교를 다녔다. 아이들의 영어가 더욱 능숙해지고 공부 이외에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점에서 유학은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얻은 것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고 장원장은 말한다.

    다음은 장덕기씨 부부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두 아이를 기르면서 겪은 시행착오와 결과들이다. 부모와 자녀의 교감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조 기유학이 자주 논란거리가 되는 것을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조기유학에 반대한다. 물론 만족스럽지 못한 우리의 교육여건에서 더 넓은 바다가 필요한 사람까지 붙잡아 두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영어 하나 잘해서 남보다 쉽게 대학입학 자격을 얻을 심산으로 어린 아이를 홀로 유학보내는 일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나이를 떠나 구체적으로 아이의 전공을 택하기 전단계의 유학을 조기유학이라고 할 때, 가장 바람직한 시기는 부모와 떨어져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중학교 후반이나 혹은 그 이상의 연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또한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조기유학을 포함해 아이들에게 다양한 교육법(물론 아래 언급된 것이 전부는 아니다)을 적용시켜본 나의 경험을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는 부모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것들은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려고 애쓴 우리 가정의 교육체험기다.

    네 살 때 시작한 영어·일어

    아들 현지는 현재 중학교 1학년, 우리 나이로 열세 살이고, 딸 현빈이는 초등학교 5학년 열한 살이다. 되돌아보니 참 고생 많이 시켰다. 후회도 많다. 아마 다시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좀더 세련되고 재미있고 좋은 교육의 산파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지는 네 살 때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찍 영어를 가르치면 좀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ABC를 가르치고 ‘세서미 스트리트’라는 영어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요즘은 다양한 언어학습 이론을 바탕으로 한 교재가 많이 나와 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당시에는 아이에게 무조건 영어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주고 반복해서 보여주면 영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의 목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여름까지 가능하면 동화책을 읽고 그 내용을 영어로 말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영어에 대한 기초교육, 즉 연상하고 정확한 발음을 익히는 것은 학습지와 테이프를 이용하기로 하고 학습지 교사를 찾았다. 또 정확한 발음을 위해 아이들에게 적합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홍콩 위성방송 중 하나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파트 옥상에 홍콩의 스타플러스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장치를 했다.

    당시 네 살인 현지의 최대 학습량은 이틀에 한 번 선생님과 만나는 정도였다. 보통 학습지 교사가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도록 돼 있는 것을 일주일에 세 번씩 오시게 했다. 현지는 비교적 잘 따라주었고 1년 정도 꾸준히 했다. 더불어 ‘매직박스’라는 외국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발음을 교정했는데, 어느 정도 영어문장을 익힌 상태에서는 더없이 좋은 교재였다.

    이 무렵 제2외국어도 병행해서 가르쳤다. 아내가 먼저 일본어를 배웠고, 6개월 후 아이들도 일본어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일본어를 조금씩 익히게 되자 우리는 일본 상용위성 TV 채널인 ‘perfect TV’를 수신할 수 있게 했다. 아이들은 영어와 일본어로 다중방송되는 카툰네트워크를 특히 좋아했고 지금도 즐겨 본다.

    하지만 영어만으로도 학습량이 적지 않은데다 여기에 한문과 일어까지 배우게 했으니 아이들은 그만큼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때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좀더 배려해야 했다는 후회도 든다.

    자연은 온전한 교과서다. 우리가 김해 진영에 살 때는 현지와 자주 뒷산에 올랐다. 그때마다 현지가 이게 무슨 풀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식물도감과 수목도감을 사서 마치 전문의 자격시험 공부하듯 익히고 익혔다. 모르는 풀이 나오면 반송우표를 보내 저자에게 물었다. 어느덧 현지와 나는 풀을 보며 “아빠 이거 애기똥풀이지요?” “왜?” “보세요, 줄기를 꺾어 색깔 보면 알 수 있어요”라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현지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필리핀 듀마게티라는 곳으로 의료봉사를 간 적이 있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고 갔는데 생전 보지 못한 외국 스튜어디스가 조금 배우긴 했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로 말하니까 아이는 상당히 당황했던 모양이다. 아빠의 도움 없이는 음료수도 먹을 수 없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빠, 다음에 우리 저 비행기 타지 마요”라고 했다. 그러나 현지는 이때 적어도 영어가 왜 필요한지는 경험했다.

    현지는 세운 목표대로 부지런히 따라주었고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무렵 그 또래에서 배울 수 있는 영어학습은 거의 마쳤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로 자신있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인가. 단순히 말을 세련되게 하고 싶다면 어느 곳에서 배웠느냐가 중요하고, 쓰기는 자신의 노력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일단 영어권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현지의 첫 여름방학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현지는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엄마, 동생 현빈이와 함께 필리핀에서 보냈다. 잘 아는 선교사에게 부탁해 비교적 발음이 좋고 언어교육을 마친 교사를 찾았고, 가족이 머물 집을 찾았는데 비용은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

    현지와 현빈이는 영어공부를 위해 두 차례 필리핀에 다녀왔다. 한 번에 한 달씩 두 달간 머문 셈인데, 기대만큼 아이들의 능력이 좋아지진 않았다. 여행 겸 언어를 익힌다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한번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겨울방학 때 세 번째 필리핀행 비행기를 탔다. 언어가 한두 달에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세 번째 여행에서는 나름대로 더 기대를 했다.

    드디어 한 달 후 김해공항에 마중 나갔다. 당시 현지는 아빠에게 그 동안 영어가 이만큼 늘었노라고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차에 타자마자 현지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Daddy, do you know ‘Ooun goie’?”라고 묻는다. 웅고이? 그게 뭐냐고 물었을 때 녀석 하는 말이 ‘원숭이’라는 것이었다. 아이들 머문 곳이 필리핀 세부라는 곳인데 그곳 언어, 즉 토속어를 배워온 것이다. 세부 말로 웅고이란 원숭이라고 아내가 설명해 주었다.

    그곳 아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 사이 원치 않은 - 아마 아이들과 놀다 보니 그게 더 자연스럽게 익혀지나보다 - 언어까지 제법 익혀온 것이다. 뭔가 방향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가 2학년이 되면서 외국인 선생을 한 분 구했다. 젠이라는 여선생인데 주로 영어 동화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단어를 암기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달라고 했더니 젠은 내게 새로운 학습법을 알려 주었다. 영어를 배우는 이 단계에서는 단어 자체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TV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된다. 듣기가 되면 들은 대로 단어를 따라 쓰거나 발음을 익혀 사전을 찾아보면 되지 처음부터 단어를 외울 필요는 없다고 했다. 참으로 옳은 이야기였다. 나는 아이들의 천부적인 듣기능력을 무시하고 거꾸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젠과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토론에 익숙해졌지만 대신 방송을 보고 이해하는 데에 다소 문제가 생겼다. 꾸준히 하면 될 일이었지만 아빠의 마음이 너무 급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현지가 2학년 여름방학 때 현빈이와 함께 이집트와 로마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아빠와 엄마가 동행하지 않는 아이들만의 여행이었다. 물론 단체여행인데다 잘 아는 분이 안내자로 갔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현지는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몇 차례 해외경험이 있고 관광을 하는 수준의 영어는 불편함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어른들을 위해 통역까지 했으니 귀여움을 받을 만했다.

    이 여행은 두 아이에게 상당한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현빈이가 새벽 3시에 일어나 어른의 도움 없이 이집트 시내산에 오르자 먼저 올랐던 외국인들도 탄성을 보냈다고 한다. 그때 사진이 지금도 현빈이 책상 앞에 걸려 있다. 아마 현빈이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며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다 되어갈 무렵 현지와 현빈이의 영어는 노력에 비해 별 진척이 없었다. 아무래도 집에서 쓰는 영어는 발음과 문장 활용에 한계가 있었고, 집에서는 영어를 쓰지만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면 상황이 바뀌니 그 또한 장애가 됐다. 외국어란 아무리 어려서 익힌다고 해도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지 않으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아내와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 호주 유학이었다. 이왕 외국어라는 도구를 주기로 작정한 이상 5년 정도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영어권 국가에서 살다 오기로 했다. 당시 현지는 초등학교 2학년, 현빈이는 유치원생이었으니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결심한 후 서류를 준비하는 데만 2개월 정도 걸렸고, 그 사이 유학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이미 일정 수준의 영어가 준비된 상태이므로 부족한 듣기와 말하기를 보충하고, 그곳에서만 배울 수 있는 독특한 것을 찾으며, 한국에서 하던 학습지는 계속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하던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그곳에서도 따로 레슨을 받고, 호주에 머무는 동안 여행을 많이 한다.

    조기유학, 아이들과의 이별

    모든 준비가 끝났다. 다행히 호주에 형님 한 분이 계셔서 며칠 그곳에서 머문 뒤 시드니 페넌트힐에 집을 얻었다. 다행히 아내가 에듀케이션 코스(education course)에 등록해 아이들의 공립학교 학비를 면제받았다.

    그 뒤에도 여러 가지로 행운이 따라주었다. 아이들과 아내가 외국인교회를 나가게 됐는데 린지 할아버지와 코랄리 할머니 부부를 만난 것이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이 노부부는 처음 외국생활을 시작하는 우리 식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기꺼이 할아버지, 할머니 역할을 해주었고 아내가 공부로 바쁠 때는 아이들을 집에 데려가 공부시키고, 수영장을 쓰게 하고, 음식을 챙겨주었다. 아이들 음악교사를 찾을 때는 근처 유명한 레슨교사를 소개해주고, 현빈이가 피아노 레슨을 시작할 때 린지 할아버지 주선으로 교회에 있는 여분의 피아노를 집에 가져다 썼다.

    아내는 학교수업 외에 아이들에게 클로깅댄스(우린 탭댄스라고 하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배우고 있다)와 드라마스쿨에 다니게 했다. 클로깅 신발을 신고 박자에 맞춰 리듬을 치는 모습은 유쾌하기 짝이 없다. 또 호주 아이들과 같이 드라마스쿨에 다니면서 아이들은 좀더 깊고 다양한 언어와 감정을 익힐 수 있었다. 즉 연극을 통해 언어에 대한 감정을 느끼고, 아이들과 폭넓은 교제를 할 수 있어 현지적응에 큰 도움이 됐다.

    우리는 이 유학이 단순히 영어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면 토요일에 푹 쉬고, 일요일에는 골프레슨을 받았다. 골퍼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고, 넓은 땅에서 부담없이 즐길 수 있을 때 해보라는 의미였다. 현지는 골프를 좋아했고 열심히 했다. 가끔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보내고 그런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낼 때 아이들이 열심히 배우면서 주변환경을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또 현지인들과 같이 여행도 하고 축제에 참가하면서 호주 문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호주에서 현빈이는 1학년, 현지는 3학년에 입학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은 문제가 없었다. 비교적 잘 따라 했으나 처음 석 달은 역시 언어 때문에 힘들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따로 선생님을 붙여 보충수업을 해주었다.

    한번은 현지가 호주 아이들에게 ‘gaint baby(덩치는 큰데 말은 아이 수준이라는 뜻으로)’라고 놀림을 당했는데 그것을 본 현빈이가 한국말로 ‘나쁜 놈들’이라면서 한국에서 배운 욕으로 싸웠다는 소식을 들은 뒤 나는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애들은 애들이었다. 6개월 정도 지나자 정상적으로 수업을 듣게 됐고 한국에서 보낸 학습지, 그곳에서 받는 음악 레슨도 잘 해나갔다. 클로깅댄스도, 린지네 식구와의 여행도 즐거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는 필드에서 우드채로 70m를 날렸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흔히 외국의 공립학교에 보내면 공부는 조금만 하고 논다고 생각하는데, 호주에서도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론 학교에서의 학습량은 한국에 비해 적지만 부모들이 따로 그룹을 만들어 필요한 교사를 모셔다 공부시킨다. 또 주말이 되면 친한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하룻밤 같이 놀게 하고 다음날 차로 각자 집에 데려다 주는 등 자녀교육에 관심이 크다.

    호주와 집의 연결장치는 전화와 이메일, 팩스였다. 처음에는 컴퓨터 화상통신을 준비했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 화면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팩스가 가장 편리한 도구였다. 이메일과 달리 아이들 글씨체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아침에 병원으로 가기 전 팩스를 보내면 아이들은 학교 공부를 마치고 온 후 답장을 보내 놓는다. 현지가 컴퓨터를 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팩스로 물어왔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날마다 부쩍부쩍 커가는 것을 한국에서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아쉬우나마 이것으로 달래야 했다.

    아이들이 호주로 떠난 지 1년이 될 무렵, 팩스를 통해 오빠가 누구를 좋아하고 현빈이는 누구를 좋아한다는 글이 날아들었다. 친구들 생일초대에 가고 집에 불러 같이 노는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가 이제 현지적응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알려주었다.

    문제는 오히려 한국에 남아 있는 나였다. 호주의 가족들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쯤해서 나는 ‘호주비빔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퇴근해서 썰렁한 집에 들어가면 현지, 현빈이의 신발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게 마치 정지된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얻고자 이러는 것일까? 한없이 보고 싶은 아이들 생각에 밤새 뒹굴다 잠이 들곤 했다.

    상사병에 걸린 아빠

    남의 나라 가서 고생하는 아내에겐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퇴근 후 전기밥솥에 있는 밥을 프라이팬에 얹어 김치와 달걀, 약간 익은 고기를 넣고 볶음밥 만들 듯 볶는다. 통째로 거실 소파에 가지고 가서 TV를 켜놓고 먹곤 했다. 그 밥에 나는 ‘호주정식’이라는 이름 붙였다.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그 비빔밥에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섞여야만 진짜 호주비빔밥이라고 말한다. 당분간 호주비빔밥을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 ‘미국비빔밥’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호주의 방학은 1년에 네 차례다. 그 중 두 차례는 아이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길면 2주일이었는데 처음에는 한없이 좋아했다가 출국 4∼5일 전이 되면 늦은밤 혼자 일어나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그때 현지 현빈이가 아빠와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 지금도 가슴에 박혀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이들은 어디 가고 싶다는 말보다, 무얼 사달라는 말보다 ‘아빠와 함께’라는 말을 먼저 꺼낸다.

    클로깅댄스로 지방축제에 참가하고 린지네 식구와 해변가에 숙식하면서 지냈던 사진들, 린지네 친척 목장에 가서 양털을 깎고 전원생활을 하던 일들, 유학생 식구와 여행하던 일, 현빈이가 아파 병원에 가던 일, 연주회에서 연주를 하던 현빈이와 현지의 모습…. 참으로 호주에서의 시간을 알뜰하게 썼고, 아이들도 잘 따라주었다. 아이들이 곁에 있지는 않지만 전화와 팩스로 현지 상황을 눈으로 보듯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현빈이가 그곳 아이들과 별문제없이 지내게 되면서 아빠를 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섭섭한 마음까지 생겼다. 아이들 목소리에서도 감정을 읽었는데 그것이 점차 희미해졌다. 너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지만 처음에 호주로 보낼 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가능한 한 부모와 함께 있어야 하고 부모를 모방하면서 자란다. ‘어린이헌장’에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격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아 놓지 않았던가.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호주에 계속 머물게 할 것인가?’ ‘다시 귀국시켜 가족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 뒤 보낼 것인가?’ ‘내가 뭣 때문에 아이들을 호주로 보냈지’ 등등 의문이 쏟아졌다.

    마침내 내린 결론은 두 아이를 호주에 계속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호주에서의 교육은 만족스러웠지만 가족간의 유대와 인성도 중요했다. 잘못하면 순서가 뒤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영어 때문에 가족의 소중함을 뒷전에 둘 수는 없었다. 호주에 유학 간 지 2년도 안 돼 가족들은 귀국을 결정했다.

    사실 아이들은 아빠만 호주로 올 수 있다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미 아이들은 자신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해주는 외국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 후 학교수업을 따라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개성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를 더 힘들어 했다. 또 수학이나 나머지 교과는 별문제가 없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국어였다. 한국말 잘 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그 나이에 배워야 할 언어와 행동이 있다. 호주에서 얻은 영어실력만큼 우리말에는 손실이 있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면 됐지 무슨 국어가 필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우리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아이들이 다시 한국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병원 옆에 조그만 칸을 만들어 책상을 갖다 놓았다. 학교 가기 전까지 몇 개월 여유가 있어 그 동안 현지에게 컴퓨터와 독서를 지도할 계획이었다.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을 각 분야별로 몇 권씩 샀다.

    현지는 컴퓨터 책을 50권 이상 보았다. 윈도부터 워드를 거쳐 그래픽과 언어(물론 컴퓨터 언어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정도 수준에 맞는 정도까지), 또 다른 운용체계인 리눅스까지 익히게 했는데 잘 따라 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하나와 전화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 컴퓨터는 현지와 함께 조립한 것이어서 약간의 하드웨어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먼저 책을 쓴 저자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전화상으로 설명을 들어가며 실행시켜 보았다.

    현지는 5학년 말 아마추어 햄시험을 보았다. 동생과 CW(모스부호)도 패스했다. 아이들에게 햄을 하도록 한 것은 외국 햄들과 교신을 통해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현지는 과학잡지들 보다 전자부품을 사달라고 했다. 이것도 만들고 저것도 만들더니 나중에 라디오를 만들어 애지중지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조립용 키트를 사줬지만 그것은 단순히 조립하는 것으로 끝이다.

    현지는 햄시험을 통과한 후 햄기기 중 좀더 깊이있게 들어가는 데이터 송수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중 하나가 우리별 2호와 교신하고 그 위성을 이용해 외국 친구와 영어로 메일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DS5KNU가 현지의 콜사인이다. 준비단계에서는 내가 도와주었지만 현지 콜사인으로 위성국이 운영되고 있다. 옥상에 올라가 있는 야기안테나와 케이블, 데이터를 디지털로 바꿔주는 TNC라는 무선모뎀, 안테나 제어기, U/V 증폭기, 무전기 이를 제어하는 wisp라는 프로그램 등을 모두 마련해 주었다.

    미국 AMSAT 종신회원이기도 한 현지는 달마다 회지를 받아보고 그 내용을 간단히 브리핑하기도 한다. 현지가 이 분야에 관심을 보여서 전자학원에서 1년 과정으로 이론과 실기를 배우게 했는데, 무난히 그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웹분야와 그래픽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좀더 익히게 하려고 학원등록을 하니 학원비도 만만찮을 뿐더러 나이가 어려 안 된다는 것이다. 수강 능력이 없다면 학원비는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부산의 네트인이라는 웹마스터 과정에 등록했다. 현지는 처음엔 어른들과 함께 수업을 받으니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처음엔 어른 동기들이 ‘꼬마야’ 하고 부르다가 한두 달이 지나자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한다.

    집에는 네트워크를 연습할 수 있는 NT 서버와 워크스테이션, 그리고 리눅스, 윈도 시리즈가 깔려 서로 허브로 물려 있고, 지금은 중단돼 있지만 전에는 코랜으로 서버를 물려 공부하기도 했다. 물론 아이들이 공부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익히고 리눅스를 쓰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서강대에서 열린 리눅스 세미나에 같이 참석하기도 했는데 가능하면 리눅스를 사용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컴퓨터를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조금 더 공부하면 리눅스라는 이 운영체계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아이들이 세팅하고 배우기는 다소 힘든 면이 있지만 역시 아이들은 쉽게 잘 배운다. 조금 더 독해실력이 나아져 하우투를 자유스럽게 읽을 정도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요즘은 뉴스그룹이 활성화되어 있으므로 그쪽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5학년 땐가 현지가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그 세계에 몰입하게 해주자고 생각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우리 식구는 현지가 5학년 말 김해에서 부산으로 이사했다. 입주 전에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현지 현빈이가 밤늦게라도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방 하나에 방음장치를 하고 드럼세트를 넣어주었다. 이제 배운 지 1년이 넘어 ‘stair way to haven’을 연습중이다.

    드럼을 가르치다

    아이들이 놀다가 혹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그걸 푸는 게 좋을 것 같다. 또 좋은 친구를 만나 그룹도 만들고 음악활동을 하면 더 더욱 좋을 것이다. 호주에서 배우다가 다행히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배우는 클로깅댄스는 친구들과의 파티 재미를 더해 줄 것이다.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클로깅댄스와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 나도 함께 연주해 볼 생각으로 클라리넷을 연습하다 그만둔 것이 지금도 못내 아쉽다.

    현지는 귀국 후 영어에 대한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도록 배려했다. 일본의 햄 모임에 참석하고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그쪽 문화를 간접 체험하기도 했다. 러시아 미르를 가보고 햄 교신시 미르의 신호를 포착하고, 그때 이야기를 사진을 보면서 설명해주기도 한다.

    현재 두 아이는 가능하면 CNN과 BBC 뉴스를 듣고 카툰 네트워크를 즐겨 본다. 젠과는 지속적으로 프리토킹을 하고, 문법과 독해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중이다. 좀더 공부 욕심을 내자면 초급을 뗀 일본어를 했으면 하지만 그건 순전히 자기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친구를 데려올 때 운동하는 친구들이 오면 최고 대접을 받는다. 주로 집에서 지내다가 중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축구하고 흙 묻은 옷으로 집에 돌아오는 아이를 보면 대견하기 그지없다. 물론 수학이라든지 국어, 기타 과목은 선생님과 혹은 혼자서 즐겁게 공부하도록 한다.

    물론 아이들에게 공부가 늘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즐거움을 갖도록 배려해 준다. 나는 원래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나 다짐한 것이 있다. 어떤 교육을 시킨다고 해도 가능하면 ‘즐기면서 공부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제는 현지가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뛰어나다는 말보다는 친구들과 열심히 잘 놀고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다는 말이 듣기 좋다. 요즘은 열심히 드럼을 치고,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학원에 얽매이지 않고 시간의 여유를 가지면서 학교생활을 하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몇 개의 테마를 정해 공부한다. 지난해 겨울은 스키와 스노보드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게 목표였다. 그 뒤에는 천문학 공부를 했다. 이제 어느 정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나이인데도 칭얼대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버릇을 키워주고 스키 실력도 보강할 겸 지난 겨울에는 아이들을 용평캠프에 보냈다. 우선 강사진의 자질을 따져본 후 현지와 현빈이만 보냈다.

    김해비행장에서 표를 사주고 그 다음부터는 둘이서 움직이게 했다. 김포에 내려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서대문 입구에 내려서 강사 선생님과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두 아이의 배낭에는 전날 챙겨넣은 간식과 속옷이 있었다. 휴대전화와 약간의 경비를 주고 보호자 없이 먼길을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두 아이는 무사히 도착해 강사들과 그곳에서 사귄 친구, 형들과 신나는 추억을 만들고 무사히 돌아왔다.

    나는 아이들과 외식을 할 때 같은 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애들이 다른 음식이 먹고 싶다고 하면 따로 먹고 스스로 돈을 지불하고 오게 한다. 현지는 유학 후 스시를 좋아하게 됐는데,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인지 메뉴를 보고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다. 먹는 방법을 모르면 서빙하는 사람에게 물어본다.

    또 도시에서만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어렸을 때 느꼈던 시골의 정서를 전해줄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하다가 몇 년 전에 그만둔 천체 관측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천문학 공부는 도시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선물이다.

    스키와 스노보드, 천체 관측

    처음 천체 관측을 시작했을 때 아이들과 아파트 옥상에서 달을 관측했는데, 송송 구멍처럼 보인 분화구를 보고 너무 신기해했다. 그 동안 벼르던 우주여행을 오늘 다시 떠나게 되었다. 초저녁을 조금 넘긴 때 천체 망원경으로 본 토성이 너무 아름다웠다. ‘와∼’ 하는 아이들의 소리는 조용한 밤에 메아리 없이 우주로 퍼져 나간다. 오리온자리에 대한 이야기며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쌍둥이자리에 얽힌 그리스·로마 신화 이야기는 감칠맛을 더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다. 교육이란 어린 시절 즐거움이 함께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갖고 함께 부대껴 본 7∼8년 후에야 이런 사실을 조금이나마 깨닫는다.

    나는 직접 아이들을 가르칠 준비가 돼 있지 않을 때는 주위를 둘러본다. 단체나 모임에서 원하는 사람을 분명 찾을 수 있다. 시골에서는 원없이 자연을 볼 수 있는 그 자체가 좋고, 도시에는 필요한 단체나 선생님을 구하기가 쉽다. 아이들이 보는 과학잡지를 통해 집 부근에 살고 계신 천체에 대해 해박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단순히 관측이 아닌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천체 공부를 1년간 하기로 하고 관측을 나가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현지와 현빈이가 끊임없이 언어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고 부모가 판단해서 능력이 된다면, 적절한 시기에 다시 유학을 보낼 것이다. 물론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해야겠지만, 결정은 순전히 아이들 몫이다. 즉 적어도 내가 원해서 보내지는 않겠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은 가능하면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조기유학으로 얻는 것은 교육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조기유학은 아이를 중심으로 주변의 관심과 배려가 성패를 좌우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교육&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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