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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남성탐구

남에게 엄격한 봉두완의 말, 자신에 치열한 이외수의 글

  • 정혜신

남에게 엄격한 봉두완의 말, 자신에 치열한 이외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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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봉두완으로 돌아가자. 현재 봉두완은 SBS 표준FM에서 아침 6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봉두완의 SBS전망대’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의 청취율이나 스폰서 숫자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지난 11월 초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두고 있다는 한 직장여 성은 봉두완에게 감탄하며 감사의 글을 보낸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에 담겨 있는 묵은 찌꺼기가 내려 가는 것 같아 항상 기분이 좋아요. 제가 궁금하고 물어보고 싶은 말 들을 모두 하시고 때로는 질책과 칭찬을 하시는 선생님 정말 존경합 니다. 연세가 있으신데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남을 위해 봉 사도 하시고 젊은 저희가 많이 배우려 합니다.”

고등학생 팬도 있다. “고2 소녀인데 학교에 갈 때 아버지 차에서 매일 듣다가 아저씨를 많이 존경하게 되었어요.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선 아저씨 프로그 램처럼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지질 않아요.”

이쯤되면 젊은 오빠가 따로 없다. 그러나 진짜로 흥미로운 건 30대 의 한 남자가 보낸 편지다.

“국민을 대변해서 그렇게 바른 소리만 하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 닌지 모르니까 조심하시구요. 하지만 걱정은 마십시오. 선생님의 뒤 에는 시청자라는 든든한 빽이 있잖아요. 세상에 두려울 것이 뭐 있 겠습니까.”



흥미롭다고 표현하는 건 봉두완의 방송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이 늘 이러한 심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이 더 조마조마한 느낌이 들어서 힘을 보태주 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봉두완이다.

물론 봉두완이 ‘바른 소리’ 때문에 결정적인 불이익을 당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서민의 대변자, 박력있는 진행, 발군의 카리 스마,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통렬한 풍자 등은 20년간 이어져 온 봉 두완의 트레이드마크다.

봉두완은 59년 동화통신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해 한국일보 주미특파원(1962∼1968년), 중앙일보 동양방송 논평위원(1969∼1980 년)을 역임했는데, 이 기간에 ‘뉴스전망대’ ‘시사토론 동서남북 ’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등의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소위 봉두완식 진행을 선보여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TBC TV와 라디 오의 모든 뉴스프로그램을 봉두완 혼자서 진행할 만큼 발군의 기량 을 과시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방송인으로서의 활동은 오히려 그 이후부터다. 방송 중단 8년 6개월 만인 1989년 11월 주부대상 프로그램인 MBC라 디오 ‘여성시대’ 진행을 시작으로 ‘MBC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를 거쳐 KBS1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를 진행한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예전의 명성을 완전히 회복하며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한다.

95년, 96년에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는 여론주도계층이 가 장 선호하는 동시에 가장 영향력있는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으며, 9 7년에는 봉두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10걸에 선 정되기도 했다.



봉두완의 바른 소리

봉두완은 2000년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 특히나 정치권에 대해서 듣 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강도 높은 비판을 일삼는다. 위에서부터 아 래까지 어디 하나 썩지 않은 곳이 없다며, 권력의 핵심을 쫓으며 아 직도 건재한 해바라기 정치인들은 낙향해서 글이나 읽으며 남은 평 생 참회록이라도 쓰며 여생을 보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질타한 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봉두완은 5공 출범과 함께 정치에 입문한 사람 이다. 이제는 지겹게 들릴 수도 있는 5공의 정통성 시비나 원죄 의 식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만일 제5공화국이 ‘새시대 새정치’를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정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 고 보면 원죄의식 운운할 것도 없다.

그는 81년 1월15일 역사적인 민정당 창당 대회에서 사회를 맡았는데 광복 후 이 땅에 생겼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400여 개의 정당 들을 생각하면서 민주정의당의 창당이념만은 영원히 후손들에게 물 려줘야겠다는 사명감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고백한다.

지금도 그의 이력 어디에나 자랑스럽게 명기되어 있는 건 11대 국회 의원 선거 결과다. 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포,용산에 출마 한 봉두완은 16여만 표를 얻었는데, 그의 표현대로라면 건국 이후 여당후보로는 처음 보는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당시 봉두완은 유세장에서 자신 같은 사람이 정치권 밖에서 마이크 를 잡고 비판의 소리를 외쳐대기에는 안팎의 사정이 너무 급박하다 고 절규했다. 당시 유권자들은 민정당이 어떤 정당인지조차 모를 때 였다. 단지 10년 가까운 세월 방송을 통해서 독특하고 탁월한 솜씨 로 서민의 대변자를 자임하던 봉두완은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결국 봉두완은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서민의 대변자에서 민정당 초대 대변인으로 변신한다.

그는 국회의원은 자유직업 중에 최고로 우대받는 유일한 직업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11대와 12대 국회에서 봉두완은 최 고로 우대받으며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3대 국회의 원 후보 공천에서 제외되었다. 6·29 선언 직후 군출신 인사들을 일 선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건의를 노태우대표에게 했는데, 그때 앙심을 품은 군부세력들이 복수극을 펼쳤다는 것이다.

공천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충격과 배신감으로 치 를 떨었다고 한다. 3개월간 배신감과 무력감으로 팔다리가 마비되는 고통과 실어증(失語症)을 겪었다 하니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 가를 짐작할 만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나치리만큼 낙관적 이고 유머러스한 봉두완의 이미지만으로는 잘 상상이 안 가는 대목 이다.

그는 12대 국회의원 유세 때도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다. 자 신의 사무실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자신을 향해 돌과 계란, 모래를 던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 다는 것이다. 자신을 끌어안고서 왜 여당 국회의원이 돼서 젊은이들 을 실망시키느냐는 한 젊은이의 울부짖음에 선거 때 빌려 쓰던 여관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혼자 울었단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 자.

“내가 왜 군인들을 따라다니다가 이런 수모를 겪을까. 국회의원 하 는 일이 그렇게 나쁜 걸까. 내가 죄인인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 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신의 정치적 과오 때문은 아니라 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과연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다는 봉두완의 멘트인가. 방 송인 봉두완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과 얄미울 만큼 정확 한 현실인식은 정치인 봉두완에게 적용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 지는 모양이다. 더 실망스러운 건 노태우대표에 대한 인간적 배신감 과 공천제외라는 개인적 절망이 겹치면 팔다리가 마비되고 실어증에 걸릴 만큼 충격을 받지만, 자신이 진리요 정의라고 믿었던 가치관이 흔들릴 때는 그저 눈물 한방울 찍어내는 갈등으로 수습된다는 점이 다.

어떠한 직책이나 어떠한 대가의 약속도 없이 무조건 신군부의 창당 작업에 동참할 만큼 그들이 제시한 ‘새시대 새정치’의 이념에 전 폭적으로 동의했다면 그 가치관이 뿌리째 흔들릴 때 그런 식의 반응 을 보여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자신의 이해관계에는 눈에 불을 켜 면서도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일에는 나몰라라 하는 정치인을 질타하는 게 봉두완의 전매특허 아니던가. 그는 98년 2월 한 신문의 칼럼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정신을 또 한 번 역설한다.

‘정치인들이 앞장서 스스로 뼈를 깎는 개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 는 한, 그리고 그 알량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조국의 앞날은 암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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