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살이를 시작할 때 이상하게 여기는 주변의 시선이나 반대는 없었습니까?
“처음에는 동네사람들이 반신반의했죠. 잘하면 석 달 하다가 말 거라고 보았죠. 저는 그런 말이 들려올 때마다 반드시 3년을 채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개인적인 자존심도 작용했다고 봐야죠.”
―시묘살이 생활은 어떤 겁니까?
“매일 해뜨기 전 새벽에 묘소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때 시각이 대략 새벽 5시30분 전후가 됩니다. 짚신을 신고 머리에는 굴건(屈巾)을 쓰고 굴건 위에 다시 삿갓(方笠)을 씁니다. 옷은 제복(祭服)을 입고 갑니다. 이른바 ‘굴건제복’을 착용하는 거죠.
집에서 묘소까지 3km 정도 거리인데 걸어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더군요. 묘지에 도착해서는 묘소 앞에서 절을 하면서 아버지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는 원두막같이 지어놓은 초막에서 생활합니다. 점심은 집에서 준비해간 누룽지로 대신합니다. 시묘하는 처지에 맛있는 반찬을 곁들인 도시락을 싸가지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식수는 주변에 있는 옹달샘에서 해결했어요.
초막은 넓이가 가로 세로 2m 정도이고, 지상에서 70cm 정도 높이에 설치했는데 그 모양이 원두막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하루종일 이 안에 있다가 가끔 묘소 둘레를 산책하기도 하죠. 그러다가 저녁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인 유시(酉時) 정도면 집으로 내려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이 일과를 반복하는 것이죠.”
―제일 어려웠던 일은요?
“눈이 올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눈이 올 때는 짚신을 못 신고 장화를 신어야 합니다. 비가 올 때는 고무신을 신고요. 눈이 많이 오면 묘지에도 눈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그 눈을 치울 때 양손으로 눈을 헤쳐서 묘지에 이르는 길을 내고, 그 다음에는 묘지 주변의 눈을 전부 한쪽으로 치웁니다. 그러노라면 두 손은 말할 것도 없고, 엎드려서 눈을 치우기 때문에 눈, 코, 입과 가슴 전체가 얼어붙는 것 같죠. 1분 정도 치우면 관자놀이가 아프면서 머리가 띵하고 코, 입술이 달라 붙습니다. 얼얼하니 감각이 없지요. 그때가 참 힘듭니다. 그러나 10분 정도 손으로 눈을 치우다 보면 ‘탁’하고 얼었던 코와 귀가 터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탁’ 소리가 나면서 터지면 이때부터는 수월합니다. 얼굴 근육이 추위에 적응했다는 신호니까요.”
―힘들게 손으로 눈을 치울 일이 아니라 대빗자루로 눈을 치우면 수월할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가 할아버지 시묘할 때 따라간 적이 있는데, 아버지도 빗자루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눈을 치우셨습니다. 그때 제가 ‘왜 빗자루를 사용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부모님이 누워 계신 곳을 감히 어떻게 빗자루로 쓴단 말이냐, 정성스럽게 손으로 치워야 법도에 맞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힘들지만 손으로 눈을 치웠습니다. 조부님도 그랬고 선친도 그랬고 저도 그렇게 한 것이죠.”
―하루종일 묘지 옆에 있다 보면 아주 심심할 것 같은데, 어떻게 시간을 보냈습니까?
“인적이 없는 산중 묘지에서 혼자 있으려면 사실 무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양의 고전을 많이 보았습니다. 특히 관혼상제에 관한 ‘사례편람(四禮便覽)’ 3권을 집중적으로 탐독했죠. 2년이 넘어가니까 거의 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책을 보는 것에 지치면 주변에 날아드는 새들을 관찰했습니다. 적막한 공간에 혼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들과 친해진 것이죠. 친해지다 보니까 여러 새의 울음소리를 흉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새들과 친구가 되다
―어떤 새들인데요?
“쑥스럽네요. 제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까치, 참새, 까마귀, 뜸부기, 청둥오리, 비둘기, 기러기, 염소, 닭, 개, 고양이 소리입니다. 제가 소리를 내 부르면 새들이 사람인 저에게 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뜸부기 소리를 내니까 뜸부기가 자기 친구인 줄 알고 초막 안으로 들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참 신기했죠.”
―시묘 3년이 면벽 3년의 수도생활과 비슷했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적막한 자연과 친해진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자연의 소리라고 할까요, 그걸 접한 것 같아요.”
―3년시묘를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3년 동안은 머리도 깎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에다 수염이 텁수룩했죠. 그래도 예비군 훈련에는 참석을 해야 했습니다. 예비군 훈련장에 굴건제복에 장발한 사람이 나타나니 훈련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저에게 쏠립디다. 제 몰골이 아마 가관이었을 겁니다. 굴건제복을 하고 예비군 훈련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예비군복을 그 자리에서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저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예비군 중대장에게 아버지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라고 이야기하자, 다음부터는 예비군 훈련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훈련을 면제받았습니다.
한번은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군청에 꼭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물론 장발에 굴건제복 차림이었죠. 그런데 그 시기가 마침 의례를 간소화한다는 정부의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된 때라 군청 직원들이 제 모습을 보더니만 크게 긴장했습니다. 정부 시책에 정면으로 위배될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자기들이 상부로부터 문책당할 수 있으니 제발 그만둘 수 없느냐고 설득해요. 그래도 안 되자 군청직원들이 나중에는 제발 군청에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합디다. 집에서 전화만 하면 자기들이 대신 일을 처리해준다고 말입니다. 시묘살이 덕을 보기는 본 셈입니다.”
모친상 때는 3년간 마루에서 잠자기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득선씨는 3년시묘를 예정대로 마쳤다. 3년시묘를 하기 전까지 그는 한양공대 토목과를 졸업한 뒤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와야 했으므로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70~80년대 건설 붐이 한창일 때였던지라 그는 잘 나가는 건축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실제로 고속도로와 각종 건축공사 현장에서 한양공대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3년시묘를 하는 과정에 인생행로가 일백팔십도 바뀐 것이다. 도시에서 잘 나갈 인생을 포기한 대신 그가 얻은 것은 ‘전통을 고수하는 명문가의 종손답다’라는 주변의 평판이었다.
어떻게 보면 ‘중세적 삶’이라고도 할 수 있는 특수한 삶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그라고 해서 서울과 직장생활이라는 보편적인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때마다 종손인 자신이 아니면 누가 집안과 가문을 지킬 것인가 하는 사명감 때문에 생각을 접곤 했다. 흔히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한다. 하지만 이득선씨의 신언서판으로 보면 그는 굽은 소나무가 아니다. 오히려 헌칠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 사례다.
―만약 주변에서 다른 사람이 3년시묘를 하겠다면 권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3년시묘보다는 3년심상(三年心喪)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해보니 상례의 본질은 마음으로 재계(齋戒)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이 중요합니다. 젊어서 건강할 때니까 괜찮았지, 만약 제가 지금 나이에 3년시묘를 했으면 건강이 크게 상해 십중팔구 병이 들었을 겁니다. 병이 들면서까지 하는 예는 과한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3년시묘 대신에 3년집상(集喪)을 했습니다. 집상이란 묘소에 안 가고 3년 동안 집에서 추모의 예를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신 잠은 방에서 자지 않고 마루에서 잤습니다.”
정작 자신은 3년 시묘와 3년 마룻바닥 생활을 해내고서도 필자에게는 심상(心喪)을 강조하는 이득선씨, 거기에서 우러나는 겸손이 느껴진다. 말이 마루에서 3년 동안 잠을 자는 것이지, 이것도 보통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뜻한 보일러 방에 길든 요즘 사람에게 3년 마룻바닥 취침은 감히 엄두도 못낼 고행이다.
어떻게 보면 3년이란 고행 기간은 집중적으로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이다. 그 기간에는 죽음과 삶이 흑과 백으로 확연하게 분리되지 않고 무채색의 중간 상태로 섞여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죽은 자에 대한, 가장 장중하면서도 충분한 송별의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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