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권노갑의 숙명적 충성주의 정일성의 치열한 장인정신

  •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입력2005-03-11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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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널시야’는 다양한 시각을 차단하기 때문에 ‘자기합리화’를 재촉하여 모든 것을 자기 필터로 ‘끌어당겨’ 바라보게 한다. 민주당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터널시야’의 빛과 그림자를 잘 보여준다.
    정신과에서 심리치료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사이코 드라마에서는 ‘역할 바꾸기(role reverse)’라는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부모와의 갈등이 심각한 청소년이 드라마 상에서 자신(청소년)에게 하소연하거나 호통치는 부모의 역할을 맡는 식이다. 한 심리학자는 금연학교에서 ‘역할 바꾸기’ 기법의 효과를 실험했다. 흡연자에게 흡연으로 인한 폐암 발병 사실을 통보하는 의사역할을 하게 한다. 실험에 의하면 금연학교에서 이런 역할극을 경험한 흡연자들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서 금연율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역할극을 경험한 흡연자는 한동안 담배를 피울 때마다 자신이 맡았던 의사의 역할이 떠올라 ‘담배를 끊어야 할텐데’ 하는 심리적 ‘태도’가 생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스스로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긴장과 불안을 느끼면서 심리적인 부조화 상태가 되는데 그게 바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현상이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장과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해 태도나 행동 중 하나를 바꿔 한 방향으로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흡연과 폐암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들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페스틴저(Leon Festinger)의 연구결과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두 정보가 입력될 때 우리의 뇌정보시스템에는 긴장상태가 발생하고, 에너지 소모가 증가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뇌는 두 정보 사이의 부조화를 어느 쪽으로든 합치시켜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쪽으로 작동한다. 그건 뇌의 생리적 기능이기도 하다.

    ‘자기합리화’란 그런 과정을 통해 생겨난다. 그렇다면 ‘자기합리화’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는 가설도 성립된다. 특히 남자들인 경우에는 더 그렇다. 왜 그런가.



    영국의 한 연구결과는 그 이유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길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한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남자는 선천적으로 시야(視野)의 각이 여자보다 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의 시야를 ‘터널시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앞만 보고 달리도록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의 질주를 연상하면 된다.

    남성의 ‘터널시야’

    ‘터널시야’는 다양한 시각을 차단하기 때문에 ‘자기합리화’를 재촉하여 모든 것을 자기 필터로 ‘끌어당겨’ 바라보게 한다. 그런 현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민주당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정일성 촬영감독은 ‘터널시야’의 빛과 그림자를 비교적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정감독이 1929년생이고 권 전최고위원이 1930년생이니까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만만치 않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필터는 조금 다르다. 권노갑 전최고위원이 DJ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해석한다면 정일성 촬영감독은 자신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재해석한다.

    그런 자기만의 필터를 통해 정감독은 ‘만다라’ ‘태백산맥’ ‘서편제’ ‘춘향뎐’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를 만들어 대종상을 7번이나 수상한 한국영화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자리잡았으며, 권 전최고위원은 본인이 인정하든 안하든 국민의 정부 들어 당대 최고의 ‘막후 실세’로 불리운다.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현장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두 사람의 삶은, ‘자기합리화’라는 삶의 코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것일까.

    먼저 민주당 권노갑 전최고위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김대중 정부에서 ‘권노갑’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을 일컫는 고유명사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권노갑은 흔히 ‘DJ의 움직이는 심경 지도’, ‘DJ 본인과 똑같은 무게의 대리인’, ‘DJ의 분신’, 부통령이라는 뜻의 ‘권부(權副)’등으로 불릴 만큼 최고권력자 DJ와의 관계가 유별난 사람이다.

    권노갑이 DJ를 처음 만난 건 두 사람이 목포공립상업학교 재학중이었던 1943년이니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이다. 정치적 선후배이자 사제간의 관계를 맺게된 건 DJ가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한 1961년이니 정확하게 40년 전이다. 함께 한 세월의 무게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는 주위 사람을 압도할 만하다. 한 기자는 부부간에도 가끔씩 다투고 화해하는 법인데, 40여 년을 함께 하면서 이들이 다투거나 사이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듣지 못했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연구대상이 될 만하다고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 연구의 결과를 빠르고 정확하게 얻기 위해서는 DJ보다 권노갑 쪽에 훨씬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DJ만큼 똑똑하고 존경받는 사람은 또 있을 수 있지만 권노갑처럼 ‘DNA적’으로 DJ를 추종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동지 김대중

    권노갑은 자신을 ‘김대중 신도’라고 말한다. 나이는 다섯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DJ는 자신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아버지이자, 형님이자, 스승이었고, 자신은 그런 DJ란 인물의 그늘 밑에서 그를 닮으려 노력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주님이 DJ에게 베푸셨다는 은총을 자신도 받고 싶은 생각에 교리를 배우고, 숨도 DJ가 쉬라고 하니까 쉬며, DJ가 찾으면 비행기에서도 뛰어내릴 사람, 그게 바로 권노갑이다. 비아냥거리자고 확인도 안된(?) 뜬소문을 나열한 게 아니고 권노갑이 주위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자신에 대한 평가다. 전설처럼 회자되는 권노갑의 ‘묘비명 신조’는 그런 인식과 평가의 집대성이다.

    “내가 죽거든 다른 것은 필요없다.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이라는 이 한마디만 비석에 써달라.”

    권노갑은 자신이 정치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DJ를 일편단심으로 모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DJ나 권노갑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들의 권위주의적 관계나 맹목적 추종을 험담할 좋은 소재일 수도 있지만, 권노갑이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는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 반론조차 예상못할 만큼 어두컴컴한 ‘터널시야’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권노갑은 “세간에서는 내 생각과 태도에 대해 ‘종속적 인생’ 또는 ‘맹목적 충성’이라고 비판하지만, 나를 포함한 소위 동교동 가신들도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고, 누구 못지않게 냉철한 이성을 가졌으며, 권위주의를 싫어하고 못 견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특정인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DJ에 대한 충성은 “옳은 것에의 복종”이며 “실증적 진실에 대한 복종”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석이긴 하지만 지난 40년 동안 권노갑이 보여준 초지일관한 충성심과 그림자 보좌는 진지하게 따져볼 만한 가치가 있을 듯하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권노갑은 단지 DJ와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 하나로 모진 시련을 겪은 사람이다. 박정희정권 이후 2년여의 감옥생활을 했고 1985년까지 형사들의 미행에 시달렸으며, 한때는 구청에서 주는 라면과 쌀을 얻어다가 끼니를 해결할 만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1980년 5·17사건으로 연행되었을 때 지독한 물고문으로 극심한 위통을 호소하자 ‘인간백정들’은 진통제를 강제로 먹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계속했단다.

    권노갑에 관한 자료들을 찬찬히 살피다보면 ‘만일 내가 DJ였다면’ 대통령이 된 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권노갑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권노갑은 DJ가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떠나자 DJ가 1963년에 만든 ‘한국내외문제연구회(내외연)’를 부활하여 결과적으로 DJ가 정계에 복귀할 발판을 구축해 놓았다.

    그런 와중에 권노갑은 1993년 2월 우리나라 정치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례 하나를 남긴다. DJ의 장남 김홍일씨에게 지역구를 넘겨준 것이다. 당시 한 칼럼니스트는 ‘권노갑 미담’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신이 모시던 지도자가 은퇴하자, 그 지도자가 일선에서 차마 못했던 2세의 정계진출을 터주기 위해 자기의 자리를 버렸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얘기다.”

    일생을 음지의 가신처럼 지내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59세)에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지역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노갑의 말처럼 지역구란 정치인이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영양을 공급하는 일종의 모태가 아니던가. 김홍일 의원이 지금까지도 권노갑을 가리켜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분”이라고 말하는 게 빈 말이 아니지 싶다.

    그런데 문제는 DJ가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 발생한다. 권노갑이 말 그대로 권부(權副)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권노갑 본인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만큼 억울한 일일테고,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펄펄 뛰는 권노갑이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실상 한 잡지의 기사처럼 현정권 들어 권노갑이 맡은 당직은 1999년 2월의 당 고문직과 지난해 8·30 전당대회 당시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된 것이 전부다. 총선조차 출마하지 않아 금배지도 달지 못했고, 모든 당직에서 물러난 지금 그는 민주당 평당원 중 한 명일 뿐이다. 이런 상황을 근거로 권노갑과 그의 측근들은 ‘비선라인’의 존재와 ‘궐밖 대신’의 영향력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 항상 ‘인민재판식’으로 정국타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강변한다.

    첫 출발부터 정치가였던 사람에게 민주화 ‘운동가’에게나 적합할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무리한 요구를 하자는 게 아니다. 정치가의 제1목표는 정권을 잡아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원대한 꿈을 펼쳐 보이는 일일 것이다. 권노갑이 그토록 존경하고 숭앙하는 DJ는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앞서 살펴본 권노갑의 전력을 감안하면 당연히 권노갑의 위상도 그에 걸맞게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최측근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청와대에 세배도 다녀올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권노갑은 필요에 의해 자신을 재야인사 DJ, 야당총재 DJ의 최측근 정도로 규정하는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호감을 주는 인간이 되자”

    암묵적인 ‘비공식 라인’이라는 그의 별칭처럼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형적인 권력 행사도 구설수에 오른다. 대선을 3개월 앞둔 1997년 9월, 권노갑은 동교동의 맏형으로서 만일 DJ가 집권하더라도 가신들은 모든 임명직에 진출하지 않는다는 선언에 참여한다. 한때는 족쇄였을지 모르지만 지금 권노갑은 그 선언을 자신에 대한 공격을 막는 좋은 방패로 활용하고 있다. ‘막후 실세’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 선언을 들먹이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도대체 임명직 진출 포기선언의 참뜻이 무엇인가.

    실상 DJ의 그늘이 워낙 커서 그렇지 권노갑은 단지 DJ의 비서출신 이상이다. 그만큼 독자적이고 막강한 파워를 가졌다는 말이다. 권노갑의 힘은 40년간 DJ의 오른팔로 정치의 핵심인 ‘돈과 조직’ 양쪽을 모두 관리하면서 축적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리’를 배정받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고, 1999년 3월 한 시사잡지는 “현역의원의 80% 이상이 지난 총선에서 권고문을 통해 공천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의 당내 위상도 위상이려니와, 돈이 없는 당직자들에게 셋방을 마련해 주고, 당직자 자녀들에게 학비를 보조해 주는 음덕 등으로 20∼30년간 쌓아온 끈끈한 인간관계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권노갑은 젊은 시절부터 “남에게 호감을 주는 인간이 되자”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원래부터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활동적인 성격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몸에 좀이 쑤시는 사람이란다. 지역구였던 목포나 당내에서는 권노갑의 호칭을 부르는 사람보다 그냥 ‘노가비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심지어 권노갑이 노씨인지 아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그런 권노갑의 ‘마당발적’ 친화력과 인명백과사전이라고 불릴 만큼 천재적인 기억력이 보태지면 ‘궐밖 실세’가 안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2000년 4월, 권노갑이 상임고문에 임명된 직후 그의 한 핵심측근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고 말해 권노갑의 파워를 짐작하게 했다. 덧붙여 그 핵심측근의 다음과 같은 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권고문은 한시라도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견디기 어려워 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권고문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일 것이다.”

    당연히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다. 1998년 말 한보사건의 여파로 외유를 떠난 지 4개월만에 권노갑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현역의원 30명을 포함해 환영인파와 취재진 300여 명이 몰려 30m도 안되는 길을 빠져나오는 데 15분이 넘게 걸렸다. 권노갑 본인은 자신 앞에 있는 밥그릇에만 몰두하지 않아서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막강파워와 관련된 해프닝은 계속된다. 1999년 3월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최고위과정에 권노갑이 등록하자 공기업대표, 대기업 간부, 개인사업가에 이르기까지 거물급 인사들이 다투어 지원하여 결국 정원을 20명 더 늘리고도 막판에는 지원자를 선별하기까지 했단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그런 ‘힘쏠림’ 현상이 권노갑의 개인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권고문(정치권에서는 보통 그렇게 부른다)은 성격이 모질지 못하다. 그래서 누구든 찾아오면 내치지 못하고 다 만나준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더욱이 인사개입이나 당무전횡 같은 일을 권고문이 즐긴 측면이 있다. 일종의 과시욕이라고 할까,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같다.”

    권노갑을 중심으로 도는 권력

    그가 한보사건으로 수감되어 있을 때는 구치소 면회실, 구속집행정지로 병상에 있을 때는 병실, 사면복권된 후에는 그가 있는 곳이 바로 당의 중심이고 정치현장이었다.

    지난해 초 공천작업이 막바지에 오른 민주당사에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사람이 권노갑 고문을 찾아왔다. 그 인사는 무려 7시간이나 방 앞에서 권노갑을 기다렸지만,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낙담한 채 돌아갔다. 당시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한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정말 권노갑이 세기는 센 모양”이라고 말했다.

    ‘일오회’라는 모임이 있다. 15대 국회의원 가운데 권노갑이 ‘저승사자’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 출마포기를 권유했던 사람들의 모임으로 18명 가량이 소속되어 있는데, 일오회 회원 중 상당수는 총선 후 권노갑의 추천으로 정부산하단체 임원으로 임명되었다.

    사정이 그런데도 권노갑과 그 측근들의 ‘자기합리화’ 혹은 ‘터널시야’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삭탈관직 당하고 홀로 서 있는 분(권노갑)을 괴롭히지 말라”며 울분을 토하거나 “1주일에 두어 번 당에 나오는 것밖에 없는데 정국타개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항변한다. 또 지난해 말 권노갑이 최고위원직을 사퇴하자 청와대 고위인사는 “형님이 또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6월 민주당 소장파들이 정풍운동·쇄신의 대상으로 권노갑과 그 측근들을 정조준하자 권노갑은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소장파에게 비난을 받을 이유가 무엇인가. 인사에 개입한다, 당무에 관여한다고 말하는데, 추상적으로 얘기할 게 아니라 잘못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해야 할 게 아닌가. 정말 잘못되었다면 내가 고치고….”

    제3자의 처지에서는 파워가 막강해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여당내의 파워게임이라는 시각을 잠시 거두고 동교동계에 속하는 민주당 한화갑 최고위원의 두 가지 발언을 들어보자.

    지난해 8·30 최고위원 경선때 한최고위원은 권노갑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공개거론하며 막후에서 여타 후보들을 집중지원한 데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으며, 권노갑의 최고위원 사퇴가 불거진 지난 연말에는 자신이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데 대해 “천부당 만부당하다. 권 전최고위원은 누가 뭐래도 제2인자”라고 권노갑의 ‘힘’을 확인해 주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권노갑 본인이 자신의 힘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2001년 3월 그가 마포에 개인 사무실을 열었을 때 현역장관과 국회의원을 포함해 300여 명의 방문객이 몰렸다. 기자들이 당고문 추대설의 진위를 확인하면서 호칭에 관한 질문을 하자 ‘돌아온 권노갑’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단다.

    “권노갑이라면 대한민국이 다 아는데 직함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 그냥 권노갑으로 불러달라.”

    그렇다면 억울해할 것도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민주당 평당원에 불과한 ‘권노갑’에게 딴죽을 거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지난번 당쇄신 운동 중에 권노갑의 한 측근은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을 향해 “우리가 감옥에 가고 민주화 투쟁을 할 때 당신들은 도대체 뭘 했길래 이제 와서 우리를 개혁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절대로 남의 집안 싸움에 어느 한쪽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에 대한 추미애 의원의 대답은 의미있게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국민에게까지 헌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는 없다. 이 정권은 서민들의 눈물과 쌈짓돈으로 만들어진 정권이다.”

    권노갑은 과거에 “김대중이라는 지도자를 도와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의 말을 믿는다. 또한 권노갑은 지금도 그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권노갑이 편안함과 익숙함을 빌미로 행동은 바꾸지 않으면서 논리만 키워나가는 ‘자기합리화’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동교동의 선생님이 아니라 전국민의 대통령이 되도록 편안하게 해 드리고자’하는 권노갑의 꿈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김대중정권에 대해서 비교적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시사평론가 유시민씨는 “정권교체가 DJ의 대통령직 취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하며,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국민의 정부가 실패한 정권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한다. DJ가 대통령이 된 직후에 ‘동고(同苦)는 했으되 동락(同樂)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는 권노갑의 말이 새삼스럽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합리화’의 덫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1992년 대선에서 DJ가 패하자 권노갑은 투표 직전까지도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주관적인 환상에 들떠 있었던 게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들이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갖게 했던 것이다.”

    바로 그렇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 그가 속한 조직의 객관적 확신이란 것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택적 사고’에 의한 자기합리화적 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레이건 대통령이 저격당했을 때 당시 경호책임자가 했던 ‘시선경호’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때 대부분의 경호원들은 차를 타려는 레이건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서 저격범을 보지 못했는데, 진짜로 완벽한 경호는 경호대상자가 아니라 그 주변을 철저하게 살피는 ‘시선경호’가 되어야 한단다.

    평생을 DJ의 분신으로 살아온 권노갑에게도 ‘시선경호’의 교훈은 유효하다. DJ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돕고 싶다면 DJ에게만 향한 ‘터널시야’를 국민의 마음쪽으로 돌려야 한다는, 상투적이지만 더없이 절실한 고언(苦言)을 던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권노갑의 학창시절 얘기를 들으면서 얘기를 끝맺자. 당시 권노갑은 만능 운동선수였는데 특히 유도와 복싱은 학교에서 당할 사람이 없을 만큼 강했다고 한다. 그때를 회상하는 권노갑의 말이다.

    “나는 권투선수로서 내 주먹의 강도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는 절대로 주먹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주먹이 세면서도 내가 이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하급생들이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권노갑에게 권하노니 부디 그런 정신을 잊지 말기 바란다. 권투선수의 강펀치는 사각의 링 안에서 쓰여질 때만 빛을 발하는 법이다.

    ‘촬영감독’ 정일성

    이번에는 정일성 촬영감독을 살펴보자.

    극장에서 영화가 끝나고 제작 스태프의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영화판의 끝자리에 청춘을 담보한 젊은 스태프들은 바로 그때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신의 이름을 보면서 “나도 저 장면을 찍을 때 저 구석에 있었지”하는 짜릿함 때문에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도 영화현장을 떠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들은 성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관객들이 너무 야속할 것이다.

    그런데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본의 아니게(?) 제작 스태프의 자막을 보게 된다. 영화의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리거나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져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게 되는 까닭이다. 바로 그런 경우에 자주 접하게 되는 이름 중의 하나가 ‘정일성’이다.

    1957년 28세의 나이에 촬영기사로 영화계에 데뷔한 정일성은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한국영화사에 ‘의미’가 있는 모든 영화를 정일성이 찍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이겠으나, 반대로 그가 찍은 대부분의 영화가 ‘한국적 영상’을 담은 문제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올릴 만한 영화라는 말은 절대 의례적인 수사(修辭)가 아니다.

    1950년대 ‘10대의 반항’을 시작으로 ‘화녀’, ‘파계’, ‘바보들의 행진’, ‘사람의 아들’, ‘만다라’, ‘길소뜸’, ‘황진이’,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 그리고 1999년의 ‘춘향뎐’에 이르기까지 그의 개략적인 영화이력은 곧 엄선된 우리 영화의 목록을 일별하는 듯하다.

    한국영화의 보물

    어떻게 보면 정일성 만큼 ‘끌어당기기’의 대가도 다시 없을 듯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늘 자신의 카메라로 끌어당긴 세상을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스크린에 펼쳐 보였다. 그의 ‘끌어당기기’가 권노갑과 달리 자기합리화로 비난받지 않는 것이 그가 예술가이어서만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남들이 예술로 인정을 해줘야 예술이지 자기가 예술한다고 생각해 예술이 되는 건’ 아닐 터다. 특히 그것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대중예술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습관적인 ‘자기합리화’는 인식의 실체를 외면한다. 객관적 사실이나 인식과 관계없이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논리만 키워 나가면 그뿐이다. 필연적으로 ‘자기합리화’나 ‘터널시야’는 ‘선택적 사고’와 짝을 이룬다. 내가 보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개인적 취향의 자유와는 조금 다른 문제다.

    정일성은 “요즘 젊은 감독들 영화에 자기 목소리는 없고 어디서 본 듯한 영상만 난무한다”고 질타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분석한다.

    “요즘 하루에 비디오 20편을 보는 젊은이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리모컨을 손에 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치우는 겁니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요.”

    나이든 사람이면 으레 하는 잔소리겠거니 하는 생각을 잠시 거두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해질 것이다. ‘감각’이 어느 직종 못지않게 요구되는 영화현장에서 일흔이 넘은 사람이 아직까지도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인정받는 게 단지 연륜 때문이겠는가. ‘외눈박이 영상시인’이니 ‘영상철학가’니 ‘완벽한 화면을 찾아 구도자의 길에 나선 예술인’ ‘그 이름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니 하는 말들이 괜히 정일성을 별칭하는 게 아니다.

    ‘감각’의 정당성은 그것이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통해 제자리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확보되는 것이므로 얄팍한 감각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게 그의 철썩같은 믿음이다. 2년전 한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그는 ‘정일성표 감각론’을 역설한다.

    “늙으면 감각이 죽을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요. 감각이 죽는 게 아니죠. 용기가 죽는 거지.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찍는 일입니다…. 균형의 파워가 있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시기라서인지 1000만관객을 돌파하는 영화가 곧 등장할 것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대두된다. 그러나 아직도 30대 중반을 넘긴 사람들은 1년에 1∼2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정도란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일성이란 인물은 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며, 더구나 촬영기사가 아닌 촬영감독이라는 그의 호칭조차 어쩐지 어색하게 다가올지 모른다. 혹시 1990년대 초반 도저히 60대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근사한 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카메라를 들고 등장한 지프 CF를 기억하는가. 그 사람이 바로 정일성이다. 감독이나 배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제작 스태프들이 거의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정일성은 CF에 출연할 만큼 이례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게 다 이유가 있다.

    정일성은 촬영을 ‘기술’에서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1년 반송장 같은 상태에서 ‘만다라’를 찍을 때 영화현장의 사람들은 그전까지 ‘촬영기사’라는 용어만 있었던 우리 영화계의 관행을 깨고 최초로 정일성에게 ‘촬영감독’이란 호칭을 헌사(獻辭)했다. 그의 치열한 예술혼과 독특한 예술감각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독이 ‘이미지 작가’라면 촬영감독은 ‘표현작가’로 생각하는데, 영화의 주제와 줄거리를 다치지 않으면서 영상언어를 만들어가는 일을 과학이라고 믿는다. 서울대 공대를 나와 렌즈라는 기계적 논리와 예술의 논리에 마음을 사로잡혀 영화계에 뛰어든 사람의 말답다.

    40년이 넘도록 카메라를 통한 자신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여주면서도 독선과 아집 혹은 지나친 끌어당기기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당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그의 영화에 여백이 많은 탓일 것이다. 그래서 정일성의 눈을 통해 새롭게 해석된 세상을 보면서도 관객들은 자기 나름으로 장면을 재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만다라’의 주촬영기술은 공간촬영이란다. 다시 말해 사람을 중심이 아닌 주변에 두어 여백을 최대한 많이 두도록 한 촬영기법이다. 정일성은 자신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가장 고민하는 것은 ‘인간의 아픔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라 영화를 찍으면서 결단코 인물을 중앙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정일성은 촬영에서 작품해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대본에 없는 부분까지 생각하면서 촬영에 임해야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며, ‘해석’과 ‘격’이야말로 예술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축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영화라고까지 일컬어지던 ‘서편제’에는 청명하고 푸른 하늘이 단 한번도 화면 가득 들어온 적이 없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분석한 후 전체적으로 흐린 날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문이다. 그는 해석의 고민 없이 억지로 아름답게 찍으면 달력 그림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며 카메라를 잡을 때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물론 그런 해석에 걸맞은 그림을 잡을 때까지 그가 감내하는 엄격함과 성실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만다라’를 촬영할 때는 불과 몇 초간의 눈오는 장면을 찍기 위해 눈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안성기, 전무송 등 일류스타들을 며칠이고 붙들어 두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공눈은 티가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일단 촬영장소가 결정되면 오전, 정오, 오후 세 차례씩 가본다고 한다. 오전과 오후의 광선이 다르며 일몰 때 느낌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정일성은 일관되게 ‘한국적 영상’의 한 본보기를 보여준다. 요즘 정일성은 조선 말기의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취화선’이란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 산수화엔 자기 땅에 대한 화가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나도 영화를 그렇게 찍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필자같은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정일성이 펼쳐보이는 그림에는 늘 ‘한국적 느낌’이 묻어나온다.

    목숨을 걸고 찍는다

    ‘서편제’ 촬영 당시 정일성은 임권택 감독과 함께 원작에서 명시한 장소와 우리 소리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한국적 배경을 찾기 위해 2400km 이상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헌팅을 했다고 한다. ‘서편제’를 보고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낀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특히 전남 완도군 청산도 당재언덕에서 촬영한 ‘진도아리랑’ 장면은 5분40초가 단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졌는데, 영화속 감동과 함께 우리 땅에 대한 정일성의 애정어린 시선을 그대로 실감할 수 있는 한국영화의 기념비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지난해 ‘춘향뎐’을 본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는 “이전의 어떤 한국영화도 이만큼 총체적으로 한국인의 미감을 극대화해서 보여준 사례가 없었던 것 같다”며 감탄을 연발했다고 한다. 여기에도 전통미에 어울리는 영상을 위해 3중필터를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멜로톤의 색조를 만들어낸 정일성의 기술적 안목과 우리 산하에 대한 그의 뜨거운 애정이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정일성이 유달리 한국적 영상을 고집하는 것은 일본에서 태어나 17세가 되어서야 한국에 돌아온 그의 성장배경과 무관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귀국 후에야 그는 자신이 한국말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두려워 6개월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ㄱ, ㄴ, ㄷ 부터 시작해 역사, 지리 등을 배워 나갔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시간만 나면 한국사 책을 읽는데 벌써 7번째 정독하고 있단다. 예전에는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한국사를 읽었지만 지금은 그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연인 정일성은 육체적으로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1977년 촬영지로 향하던 중 자동차 전복사고가 일어났는데 특별한 외상(外傷)이 없었던 정일성은 그 길로 속초에 내려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4시간이나 촬영을 강행했다. 그 바람에 교통사고로 상한 내장이 썩어 대장과 소장을 15cm, 위를 3분의 1이나 잘라냈다. 그후 정일성은 다시 촬영현장에 뛰어들었는데 3년이 지난 1980년에는 직장암 선고를 받고 11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당시 가족들이 장례준비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수술실에 들어가던 정일성의 후일담을 듣고 있노라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수술실로 들어가려니 다시는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불안했어요. 그런데 한편에서는 지금까지 병원 장면을 찍을 때 이런 심리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회한도 스쳤습니다.”

    外地에서 돌아온 거장

    혹시 정일성이 촬영한 1980년 이후의 영화 중에 병원 장면이 나온다면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수술 후에도 체중이 30kg이나 빠지는 등 심각한 후유증으로 자살을 생각하고 수면제를 사모으던 정일성은 수술 한달 후 배에 붕대를 두르고 임권택 감독을 따라 ‘만다라’의 촬영현장으로 나간다. ‘임감독이 송장하고 영화를 찍는다’고 수군거릴 만큼 그의 몸은 허약했지만 그는 영화를 찍으며 건강을 회복해 나가는 기적을 보여준다. 지난 1986년 정일성은 ‘만다라’를 가리켜 자신의 촬영인생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내가 나를 테스트한 작품이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 작품이었으며, 제2의 인생의 첫 출발작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직장에서 항문까지를 잘라낸 이때의 수술 이후 그는 배꼽 아래 인공배변기를 지니고 다니게 되었지만, 영화적으로는 이때를 기점으로 정일성만의 독특한 시각이 확고해진 듯하다. 그의 독특한 시각은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이 적성이 맞았다는 공대 출신답게 일방적인 ‘끌어당기기’가 아니라 엄밀한 객관성과 끝없는 열정을 전제로 한다.

    1960년대 초반 극장에 올라가는 거의 모든 영화를 보며 촬영기법을 기록하고 헌책방을 뒤져 영화관련 책자를 닥치는대로 읽으며 영화공부에 열을 올리던 시절의 일이다. 정일성은 한 영화재단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서 ‘아키몽’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스태프로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소감은 이렇다.

    “작품에 대한 철저한 몰입 등 질식할 정도로 완벽한 그들의 작업을 보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생 동안 나를 지배했다고 하기보다는 탄탄한 기초가 됐던 것같다.”

    탐욕이라고 할 만큼 영화공부에 몰두하던 시절이라 자칫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거장에 함몰되어 ‘터널시야’에 사로잡힐만도 한데 정일성은 단지 그것을 자신의 베이스캠프로만 이용한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정일성의 시각은 독특한 것일 게다.

    결혼 직후인 1960년대 중반 정일성은 자기만의 색깔을 잃지 않기 위해서 4년 동안 카메라를 놓은 적이 있다.

    “당시 우리 영화계는 ‘중국무협’ 영화를 그대로 베껴 극장에 올렸다. 파렴치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카메라를 들면 그같은 영화를 찍을까 두려웠다”

    ‘삶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자연인 정일성보다 촬영감독 정일성으로서 작품을 통해 후배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영상을 남기고 싶다’는 소망을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영화현장에서는 못말리는 고집쟁이로 통하지만, 될 수 있으면 카메라에서는 자신의 고집도 덜어내고 싶다는 이 만년 청년작가의 영상철학을 들으면서 얘기를 끝맺자.

    “영화를 통해 ‘나’를 발견했듯이 내가 만든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삶을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래서 항상 대상을 찍기보다는 그 마음을 찍으려고 노력합니다”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찍는다

    모든 사람은 자기매력의 책임자라고 했다. 필자는 이 매력적인 사내가 가장 오랫동안 촬영현장을 지킨 촬영감독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외눈박이 영상시인’이라는 별호처럼 말 그대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우리네 마음을 찍어, 문득 졸음을 깨우는 죽비처럼 무뎌진 일상의 삶을 일깨워 주기 바란다. 아주 오랫동안.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말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커진다. 자기 목소리가 스스로에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하는 상대는 ‘자기자신’인 것같다. 일단 한번 마음먹으면 모든 게 일사천리다.

    변절은 적응으로, 뇌물은 수수료로, 욕심은 희망으로, 비겁은 신중함으로 둔갑한다. ‘사랑이 지나치면 폭력’이라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폭력도 사랑일 수 있다’는 자기합리화의 또다른 표현이다.

    ‘인지부조화’ 상태가 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심리적 긴장과 불안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시라도 빨리 행동과 태도를 일치시키고 싶어진다. 그러나 혹시 ‘인지부조화’ 현상이란 과부하를 방지하여 더 큰 누전사고를 예방하는 두꺼비집의 퓨즈 같은 것이 아닐까. 만장일치를 위험한 의사결정으로 간주하여 부결 처리하는 어느 부족의 관습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섣부른 ‘자기합리화’를 경계하자는 말인데 이 또한 필자의 ‘끌어당기기’식 해석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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