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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인간탐구

권노갑의 숙명적 충성주의 정일성의 치열한 장인정신

  •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권노갑의 숙명적 충성주의 정일성의 치열한 장인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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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권노갑 본인이 자신의 힘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2001년 3월 그가 마포에 개인 사무실을 열었을 때 현역장관과 국회의원을 포함해 300여 명의 방문객이 몰렸다. 기자들이 당고문 추대설의 진위를 확인하면서 호칭에 관한 질문을 하자 ‘돌아온 권노갑’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단다.

“권노갑이라면 대한민국이 다 아는데 직함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 그냥 권노갑으로 불러달라.”

그렇다면 억울해할 것도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민주당 평당원에 불과한 ‘권노갑’에게 딴죽을 거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지난번 당쇄신 운동 중에 권노갑의 한 측근은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을 향해 “우리가 감옥에 가고 민주화 투쟁을 할 때 당신들은 도대체 뭘 했길래 이제 와서 우리를 개혁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절대로 남의 집안 싸움에 어느 한쪽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그에 대한 추미애 의원의 대답은 의미있게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국민에게까지 헌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는 없다. 이 정권은 서민들의 눈물과 쌈짓돈으로 만들어진 정권이다.”

권노갑은 과거에 “김대중이라는 지도자를 도와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의 말을 믿는다. 또한 권노갑은 지금도 그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권노갑이 편안함과 익숙함을 빌미로 행동은 바꾸지 않으면서 논리만 키워나가는 ‘자기합리화’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동교동의 선생님이 아니라 전국민의 대통령이 되도록 편안하게 해 드리고자’하는 권노갑의 꿈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김대중정권에 대해서 비교적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시사평론가 유시민씨는 “정권교체가 DJ의 대통령직 취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하며,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국민의 정부가 실패한 정권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한다. DJ가 대통령이 된 직후에 ‘동고(同苦)는 했으되 동락(同樂)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는 권노갑의 말이 새삼스럽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합리화’의 덫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1992년 대선에서 DJ가 패하자 권노갑은 투표 직전까지도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주관적인 환상에 들떠 있었던 게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들이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갖게 했던 것이다.”

바로 그렇다. 결과적으로 보면 당시 그가 속한 조직의 객관적 확신이란 것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택적 사고’에 의한 자기합리화적 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레이건 대통령이 저격당했을 때 당시 경호책임자가 했던 ‘시선경호’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때 대부분의 경호원들은 차를 타려는 레이건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서 저격범을 보지 못했는데, 진짜로 완벽한 경호는 경호대상자가 아니라 그 주변을 철저하게 살피는 ‘시선경호’가 되어야 한단다.

평생을 DJ의 분신으로 살아온 권노갑에게도 ‘시선경호’의 교훈은 유효하다. DJ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돕고 싶다면 DJ에게만 향한 ‘터널시야’를 국민의 마음쪽으로 돌려야 한다는, 상투적이지만 더없이 절실한 고언(苦言)을 던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권노갑의 학창시절 얘기를 들으면서 얘기를 끝맺자. 당시 권노갑은 만능 운동선수였는데 특히 유도와 복싱은 학교에서 당할 사람이 없을 만큼 강했다고 한다. 그때를 회상하는 권노갑의 말이다.

“나는 권투선수로서 내 주먹의 강도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는 절대로 주먹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주먹이 세면서도 내가 이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하급생들이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권노갑에게 권하노니 부디 그런 정신을 잊지 말기 바란다. 권투선수의 강펀치는 사각의 링 안에서 쓰여질 때만 빛을 발하는 법이다.

‘촬영감독’ 정일성

이번에는 정일성 촬영감독을 살펴보자.

극장에서 영화가 끝나고 제작 스태프의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영화판의 끝자리에 청춘을 담보한 젊은 스태프들은 바로 그때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신의 이름을 보면서 “나도 저 장면을 찍을 때 저 구석에 있었지”하는 짜릿함 때문에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도 영화현장을 떠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들은 성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관객들이 너무 야속할 것이다.

그런데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본의 아니게(?) 제작 스태프의 자막을 보게 된다. 영화의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리거나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져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게 되는 까닭이다. 바로 그런 경우에 자주 접하게 되는 이름 중의 하나가 ‘정일성’이다.

1957년 28세의 나이에 촬영기사로 영화계에 데뷔한 정일성은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한국영화사에 ‘의미’가 있는 모든 영화를 정일성이 찍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이겠으나, 반대로 그가 찍은 대부분의 영화가 ‘한국적 영상’을 담은 문제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올릴 만한 영화라는 말은 절대 의례적인 수사(修辭)가 아니다.

1950년대 ‘10대의 반항’을 시작으로 ‘화녀’, ‘파계’, ‘바보들의 행진’, ‘사람의 아들’, ‘만다라’, ‘길소뜸’, ‘황진이’,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 그리고 1999년의 ‘춘향뎐’에 이르기까지 그의 개략적인 영화이력은 곧 엄선된 우리 영화의 목록을 일별하는 듯하다.

한국영화의 보물

어떻게 보면 정일성 만큼 ‘끌어당기기’의 대가도 다시 없을 듯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늘 자신의 카메라로 끌어당긴 세상을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스크린에 펼쳐 보였다. 그의 ‘끌어당기기’가 권노갑과 달리 자기합리화로 비난받지 않는 것이 그가 예술가이어서만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남들이 예술로 인정을 해줘야 예술이지 자기가 예술한다고 생각해 예술이 되는 건’ 아닐 터다. 특히 그것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대중예술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습관적인 ‘자기합리화’는 인식의 실체를 외면한다. 객관적 사실이나 인식과 관계없이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논리만 키워 나가면 그뿐이다. 필연적으로 ‘자기합리화’나 ‘터널시야’는 ‘선택적 사고’와 짝을 이룬다. 내가 보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개인적 취향의 자유와는 조금 다른 문제다.

정일성은 “요즘 젊은 감독들 영화에 자기 목소리는 없고 어디서 본 듯한 영상만 난무한다”고 질타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분석한다.

“요즘 하루에 비디오 20편을 보는 젊은이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리모컨을 손에 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치우는 겁니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요.”

나이든 사람이면 으레 하는 잔소리겠거니 하는 생각을 잠시 거두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해질 것이다. ‘감각’이 어느 직종 못지않게 요구되는 영화현장에서 일흔이 넘은 사람이 아직까지도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인정받는 게 단지 연륜 때문이겠는가. ‘외눈박이 영상시인’이니 ‘영상철학가’니 ‘완벽한 화면을 찾아 구도자의 길에 나선 예술인’ ‘그 이름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니 하는 말들이 괜히 정일성을 별칭하는 게 아니다.

‘감각’의 정당성은 그것이 작품의 전체적 맥락을 통해 제자리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확보되는 것이므로 얄팍한 감각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게 그의 철썩같은 믿음이다. 2년전 한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그는 ‘정일성표 감각론’을 역설한다.

“늙으면 감각이 죽을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요. 감각이 죽는 게 아니죠. 용기가 죽는 거지.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찍는 일입니다…. 균형의 파워가 있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시기라서인지 1000만관객을 돌파하는 영화가 곧 등장할 것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대두된다. 그러나 아직도 30대 중반을 넘긴 사람들은 1년에 1∼2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정도란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일성이란 인물은 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며, 더구나 촬영기사가 아닌 촬영감독이라는 그의 호칭조차 어쩐지 어색하게 다가올지 모른다. 혹시 1990년대 초반 도저히 60대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근사한 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카메라를 들고 등장한 지프 CF를 기억하는가. 그 사람이 바로 정일성이다. 감독이나 배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제작 스태프들이 거의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정일성은 CF에 출연할 만큼 이례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게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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