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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쌀의 운명

大豊에 멍들고, 쌀값에 울다

<농촌현장르포> 2001년 가을 農心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大豊에 멍들고, 쌀값에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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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씨(48)는 당진군 쌀전업농연합회장이다. 그는 영산강 간척지와 충남 서산에서 농사를 짓다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재 김씨의 벼농사 규모는 임대농지를 포함해 3만5000평에 달한다. 그는 충청도 농민들이 9월17일 대전역에서 집회를 열고 쌀가마니를 불태우던 날 삭발대열에 동참했다. 지금껏 농사를 지으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머리를 깎았는데, 소값 파동 이후 이번이 두번째라고 한다.

“저는 한국의 농업정책을 믿지 않아유. 지난 30년간 농사를 지어보니까 정부가 하지 말라는 대로 하면 돈을 벌겠더라구유. 주변을 살펴보면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한 사람은 다 망했슈. 저도 농림부에 근무하는 친구 얘기 듣고 소를 팔았다가 수년간 모은 돈을 몽땅 날린 적이 있어유.”

김씨는 앞으로 쌀값이 떨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기로 했다. 소비자를 상대로 직접 영업을 뛰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씨는 “쌀이 아무리 비싸도 1가마(80kg 알곡)에 20만원이잖아유. 1년에 5가마면 1가구가 먹고 살아유. 좋은 쌀이라면 1년에 100만원 정도는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고 생각해유”라고 말했다.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씨는 농사일이 싫어서 공고에 진학했다가 중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옛날 농민들이 집안에서 가장 머리가 나쁜 자식에게 농사를 맡기는 바람에 농촌이 낙후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은 가장 똑똑한 자식에게 농사를 물려주고 싶다고. 하지만 두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줄지는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농민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 수 있었겠슈? 불가능한 얘기잖아유. 그러면 국민들도 잔칫날 국수 대신 밥을 먹어야지유. 풍요로운 가을에 막걸리 한잔이라도 웃으면서 마셔야 하는데, 어디에서도 웃음을 볼 수가 없어유. 아무나 붙잡고 시비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라니까유. 나야 그런대로 버틴다고 하지만, 일흔살이 넘은 노인들은 정말 인생이 허무할 거예유. 정부가 그런 분들을 생각해서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야 해유. 그냥 밀어붙이다가는 정말 난리가 날 거예유.”



전라북도는 대한민국 최대의 곡창지대다. 만경강과 동진강을 끼고 김제와 만경지역에 펼쳐져 있는 호남평야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징게 멩게 너른들(‘김제 만경 넓은 들’의 전북 사투리)’이다. 지난해 김제지역에서 생산된 쌀은 무려 12만6794톤에 이른다.

김제지역에서는 9월말부터 농민들이 농협을 점거하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는데, 10월6일 오후 수매가격이 최종 타결됐다. 7개 RPC가 정부수매가 2등 수준인 5만7760원(40kg)에 산물벼를 사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농협RPC가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셈이다.

농협과 농민의 충돌

싸움은 9월24일 전라북도에서 RPC를 운영하는 조합장들이 모여 이른바 ‘수탁판매제’ 도입을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수탁판매제는 RPC가 정부수매가의 80∼90%(40kg 기준, 4만8360원∼5만4180원)로 산물벼를 사들여 선도금을 주고 이듬해 농민이 원하는 시기에 쌀을 팔아 추가로 정산한다는 내용이다.

농민의 처지에서 이것은 매우 우려가 되는 제도였다. 무엇보다 RPC가 싼 값에 쌀을 사들일 경우 그 자체가 쌀값 하락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일반적으로 정미소나 양곡매입상들은 농협의 수매가격에 맞추어 쌀을 매입하기 때문에 ‘수탁수매제’를 채택하면, 쌀값 하락이 공식화된다는 것이 농민들의 지적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의식한 전북지역 RPC들이 수매가를 결정하지 못하는 사이 김제지역이 먼저 수매가를 공개했다. 40kg 조곡을 4만3640원에서 5만원에 사들이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자 농민들은 지역별로 규탄대회를 열고 조합을 점거하는 투쟁에 나섰다.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던 곳은 공덕면. 이곳은 김제지역에서 가장 낮은 수매가를 책정해 더욱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추석연휴 동안 계속 천막농성을 벌이던 농민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농협 사무실에 돼지와 닭을 들여보내고 수백개의 계란을 던지는 시위까지 벌였다. 이 때문에 공덕면 농협은 사흘이나 정상업무에 들어가지 못하는 곤욕을 치렀다.

기자는 10월7일 공덕면 농성현장을 찾았는데, 쓰레기로 뒤덮인 사무실에서는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일요일에 출근해 청소를 감독하고 있던 최양희 상임이사는 “답답한 일이다. 농협이 농민의 힘에 밀려 타협하고 말았다. 힘들어도 끝까지 버텼어야 농협이 살 수 있었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농협이 망하게 생겼다. 시장의 현실을 무시한 농민들의 밀어붙이기에 화가 치민다”며 정부와 농민을 싸잡아 비판했다.

조경희(34)씨는 김제농민회 정책실장이다. 강원도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시절 전라북도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조실장은 정부와 언론이 의도적으로 쌀값 하락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실장은 “산지가격은 언론보도와 루머에 많이 좌우된다. 자꾸 신문에 쌀값이 떨어질 거라는 기사가 실리니까 농민들은 ‘홍수출하’를 하고 그것이 쌀값의 추가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제지역 농민들은 올해 모내기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쌀값이 더 떨어질까봐 손해를 무릅쓰고 무작정 벼를 내다팔고 있다는 것이다.

조실장은 RPC가 추산한 예상적자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지난해엔 태풍과 병충해 등의 영향으로 도정율이 낮았지만, 올해는 작황이 좋기 때문에 RPC가 부가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산물벼 매입자금의 이율도 지난해 5%에서 3%로 낮아졌기 때문에 금융부담이 줄었다는 것이다. 조실장은 “사정이 작년보다 좋아졌는데도 RPC가 쌀값을 계속 낮추려 하는 것은 그 동안의 손실을 농민의 희생으로 만회하려는 음모”라고 비판했다.

‘경기미’를 둘러싼 갈등

쌀은 전국 어디에서나 재배하는 농작물이다. 그래서 쌀값이 움직이면 농민 전체가 술렁거린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쌀값에 반응하는 정도는 지역별로 차이가 난다. 한 예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경기미’를 바라보는 전라도 농민들의 피해의식을 들 수 있다. 전라도 농민들은 ‘경기미’ 얘기가 나오면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는다. 경기미가 호남미보다 비싸게 팔릴 뿐 아니라 전라도의 쌀이 쥐도 새도 모르게 ‘경기미’로 뒤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민들은 ‘경기미’인 줄 알고 사먹지만, 실제로는 ‘경기미’가 아니라 전라도 쌀이지라. 호남 농민들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쌀을 경기도로 몰래 팔아먹지 말아야 한당께.”

“경기도 사람들이 호남평야의 자랑인 ‘일미벼’와 ‘남평벼’를 실어가니까, 전라도엔 쭉정이만 남지라. 그래서 전라도 쌀이 나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랑께.”

‘경기미’는 본래 경기도 이천시와 여주군에서 생산되는 쌀을 말한다. 하지만 쌀시장에서는 경기도 지역의 추청벼(속칭 아끼바리)를 통틀어 ‘경기미’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예로부터 경기미는 임금에게 진상했고, 밥맛이 좋아 ‘상품(上品)’ 취급을 받아왔다.

문제는 ‘경기미’의 생산량이다. 이천과 여주지역의 수확량만 따지면 서울시민이 2개월 정도 먹을 수 있는 분량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기미는 4계절 꾸준히 공급된다. 이것은 다른 지역의 쌀이 ‘경기미’로 둔갑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단서일 것이다.

10월7일 오후. 추수가 한창인 김제시 봉남면을 찾았다. 농민들의 시위로 중앙 유리창이 파손된 봉남농협 입구에는 각종 지역단체에서 내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정부는 현실을 무시한 쌀산업 발전 종합대책을 즉각 철회하라”

“쌀농사 포기하면 우리 먹거리 식민지 된다”

“우리 농민 다 죽는다. 농림부장관 수입하라”

봉남농협의 한 직원은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바람에 농협이 농민들과 충돌하고 있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내년까지 쌀값을 13만5000원까지 떨어뜨리려 하고 있다. 그동안 무분별하게 수매가를 올릴 때는 정부가 생색을 내더니, 이제 값을 내려야 하니까 농협에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봉남면 들녁에는 곳곳에서 콤바인 엔진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새참’을 준비하지 못해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시켰다는 장사홍씨(68)도 대학생인 아들과 함께 부지런히 나락을 자루에 옮겨담았다. 24마지기(4800평) 벼농사를 짓는 장씨의 올해 예상수입은 800만원. 생활비를 빼면 아들의 학비를 보태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돈벌이는 틀렸고, 내가 죽을 때까지 마음 편히 농사지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라. 요즘엔 그것마저 못할 것 같아 두려워라. 조상 대대로 땅 파먹고 살아왔는데, 내 대에서 그치면 무슨 낯으로 조상들을 만나겠어라. 그게 제일 답답하지라.”

김길성씨(61)는 쌀전업농 전라북도연합회장으로 김제시 금구면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경지면적 6만6000평, 예상 수확량 1700가마에 이르는 대규모 기업농이다. 마당에는 이양기 트랙터 콤바인 경운기 건조기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김씨는 UR(우루과이라운드)협정 체결 이후 농어촌진흥공사로부터 평당 1만원에 땅을 대거 매입했는데, 기계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가족 4사람이면 일손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김씨는 1999년 해마다 땅을 교대로 놀리는 ‘유휴지 경작방식’을 도입해 전국농어촌진흥대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 쌀이 비싼 거는 사실인께 인차 미질 중심으로 가야겠지라. 농민들도 정신 바짝 차리고 외국쌀과 맞설 준비를 해야겠제. 나는 올해 논바닥에 농약과 비료를 하나도 안 뿌렸어라. 서울 사람들은 아무리 비싸도 무공해라면 사먹는다니까, 직거래로 팔면 걱정없어라.”

김씨는 농민들이 정부와 농협을 상대로 투쟁하는 것도 반대했다. 어떤 경우든 폭력을 앞세워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젊은 친구가 찾아와서 ‘회장님은 농사가 많으니까 2필지(1200평)만 트랙터로 갈아엎으세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못난 놈. 너 같은 놈은 농사를 지을 자격이 없다’고 야단쳐서 돌려보냈어라. 정부가 농민을 죽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아까운 쌀을 갈아엎는 놈들이 어디 있어라. 데모도 점잖게 해야지 고속도로 막고 쌀가마니를 태우면 어쩌자는 거야? 정부도 그런 일에는 강력하게 맞서야 된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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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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