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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류를 찾아서

문화탐험가 윤명철의 바이칼 기행

  • 윤명철 < 동국대 교수·역사학 >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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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차를 세우고, 숲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흙을 밟는다. ‘꾹’ 밟히는 감촉이 흙 안에 뭔가 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색깔이 거무칙칙하다. 어쩜 선연한 황토색의 우리 땅과 이리도 다를까? 나무들이 썩어서 만들어진 흙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풀이 끝나더니 갑자기 드넓은 평원이 나타난다. 물기를 머금고, 생생한 풀이 그저 온 세상의 전부인 듯 내 갈색 눈을 채운다. 수십 킬로미터를 지나가도 집 한채 눈에 띄지 않는다. 가슴이 확 뚫린다. 머릿속에 거미줄처럼 남아 있는 너절한 관념의 찌꺼기들이, 하찮은 사건의 후유증들이 단번에 날아가버린다. 늘 막힌 공간에, 재단된 넓이에 길들여진 시야는 오히려 방향을 못 잡은 채 허둥거리는 듯하다. 몸이 몸임을 느끼지 못한다. 몸뚱이의 무게와 부피를 느낄 수 없다. 그저 한줄기 바람, 한줄기 초록의 기운이 느껴질 뿐이다.

중간중간에 길 옆으로 타이가의 삼림이 자리를 잡으며 선을 이루고 있다. 수평의 면에 수직의 선을 긋는 백양나무 숲이 없다면 인간은 그 광활함에 짓눌려 정신적인 방황을 할지도 모른다.

진초록의 평원 한가운데에 까만 점들이 뭉쳐 있다. 수백 마리의 양떼가 입을 오물거리면서 풀을 뜯으면서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수십 마리의 말떼도 풀을 뜯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몇 마리는 겅중겅중 뛰면서 무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말의 다리가 길쭉하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몸도 실하고, 덩치가 크다. 늘씬한 느낌이 든다. 몽골초원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 느껴진다.

사람들의 윤기있는 환호성을 싣고 차는 평원을 달린다. 갑자기 군데군데 그림자가 지며 풀밭의 곳곳이 더 짙어진다.



우리의 한국 하늘은 산의 자태에 따라 조각난 채로 늘 머리 위에서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하지만 평원의 하늘은 너르고, 구름도 말떼처럼 덩어리를 이룬 채 달린다. 구름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림자를 진하게 드리운 듯하더니 차 유리에 방울방울 무늬들이 돋아난다.

번쩍번쩍. 녹색의 평원에 날카로운 선들이 급하게 그어진다. 번갯불이 평원 저쪽을 반점처럼 훤하게 밝히더니 빗줄기가 언뜻언뜻 나신을 드러낸다. 침엽수의 가는 이파리들은 불꽃을 일으킨다. 바늘에 찔린 손마디처럼 빨간 핏방울이 솟아오른다. 우레가 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부딪힘이 없는, 걸림이 없는, 정제하는 관이 없는 무한 속에서 거대한 공명의 울림이 대평원을 채운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천둥소리다. 이미 인간의 소리들이 범람하다보니 인간의 귀,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소리, 창조의 소리, 법열의 소리를 멀리한 지 오래다. 옛 자연인들은 천둥소리가 들릴 때 세상이 열리는 소리로 알고, 그래서 우주가 그려진 북을 치면서 천둥소리를 흉내냈다.

구름이 걷히면서 빗줄기가 버스보다 멀리 사라지고, 물기를 머금은 평원은 새롭게 빛났다. 초원의 풀잎들은 물방울이 맺혀 수억만 개의 햇살로 빛나고, 때때로 차창을 스쳐가는 백양나무들은 더 새하얘진 몸뚱이에 이파리들이 푸르다못해 검푸른 빛을 띤다.

창밖으로 물기가 촉촉하게 배인 풀밭을 보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초원의 한가운데에 연한 보랏빛 안개가 낮게 피어오르고 있다. 야생화가 밭을 이루면서, 그것도 이랑과 고랑이 있는 우리네 밭이 아니라 끝과 선이 불분명한 평원의 밭을 이루고 있다. 그 별 같은 점점의 작은 꽃들이 모여 풀의 평원이 아니라 꽃들의 초원, 꽃들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도 하얀 민들레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코리나야 슬레포타란 이름의 노란꽃들이 별들의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있다.

불현듯 타이가의 겨울 정경이 궁금해진다. 말 그대로, 느낌 그대로 시베리아의 추위와 음습함과 어둠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을 채우고 있었을까? 타이가의 눈은 어떠한 색깔을 지니고, 어떤 모습으로 낙하를 하고 비상할까?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사연 많은 살춤을 추는 어린 무당의 몸짓처럼 처연할까? 신들린 남자 샤먼처럼 신비롭고 의연한 모습일까?

소설 ‘유정’의 무대

시베리아는 내게 정말 각별한 곳이다. 인간의 아름다움, 숭고한 희생정신, 책임감 있는 사랑에 대해서 절절하게 느끼게 한 무대가 바로 이곳 시베리아다. 겉표지에 소박한 삽화가 그려진 톨스토이의 ‘부활’을 펼치면서 카튜샤를 쫓아가는 네플류도프(30년이 지난 세월임에도 그들의 이름은 아직도 내 마음에 담겨 있다)의 마음으로 시베리아를 헤맸다. 남들보다 좀더 복잡하고, 좀더 진지한 열혈청년인 고등학교 1학년생에게 시베리아는 유형장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가보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졌을 때 시베리아는 나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는 옴스크에 유형당하면서 시베리아의 겨울과 여름 그리고 하늘과 평원 타이가를 체험하고 인간과 대자연의 섭리를 절절히 체험하였던 것이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Some where my love’의 멜로디 속에서 라라를 태운 썰매가 질주할 때 시베리아는 비로소 아름다운 설경으로 다가왔다.

이광수도 이곳 시베리아의 바이칼을 무대로 1933년에 ‘유정’을 썼다. 최석과 남정임이 순백의 사랑을 뿜어내던 곳은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으리라. 이르쿠츠크에서 멀지 않은 삼림에 두 별들의 무덤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광수는 왜 최석을 바이칼로 떠나게 했으며, 그를 사모하는 정임과 딸 순임으로 하여금 최석을 쫓아 이 먼 지역까지 오게 했을까? 순백의 자연과 순수한 사랑이라는 두 주제의 어울림도 있지만 그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지는 않았을까?

반도적인 현실과 조각난 삶에 넌덜머리가 난 춘원은 아마도 사람들을 멀리 더 큰 세상으로 데려가서, 거칠고 웅장한 자연과 삶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최석의 부인으로 대변되는 봉건적이고, 잔일에 열을 올리면서 제 살을 뜯어먹는 사람들과 현실에 순수의 삶과 열정의 세상, 그것을 용납하는 대자연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반도의 사람들로 하여금 광야의 의미를 절실하게 깨우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 연인을 그 곳에 묻어두고 온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처럼 누군가가 와서 그들의 무덤을 찾아주려니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고 순수하기는 하나 난세를 살아가고 세파를 극복하기에는 너무 점잖고 힘이 없다. ‘유정’의 주인공을 맡아 예명을 받은 영화배우 남정임이 유방암을 못 이겨 요절한 것은 우연일까. 그래도 지금은 오히려 그런 사랑, 그런 순수가 그립다. 사람들이 점점 짐승과 기계의 잡종이 돼가는 현실 속에서.

확실히 그 시대에 호흡했던 사람들은 경험의 폭이 크고, 훨씬 진지했으며, 삶의 무게도 요즘의 우리들과는 달랐던 것 같다. 그들의 사고, 자유로움, 순수함이 그립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대평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식민지 백성에게 넓이란, 무한한 평원이란 자유 그 자체였을 테니까.

실제로 그들은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광활한 땅을 택했다. 반도의 산골을 버리고 만주로 건너간 그들은 이 참에 아예 만주라는 옛 땅을 회복하고, 멀리 서로 북으로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었는지도 모르겠다.

독립군들은 독한 일본인 밀정과 비정한 중국관헌, 잔인한 마적떼를 피해가면서 시베리아까지 흘러 들어왔다.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서도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들이었지만 적어도 세계를 무대로, 그리고 이러한 시베리아를 자신들의 삶 속에 진리를 추구하는 도량으로 여기면서 살았던 것이다. 잿빛 늑대의 신비로운 털빛과 울음소리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가슴을 어떻게 후벼팠을까? 바이칼의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상념에 젖어들었을까?

이 타이가와 대평원이 펼쳐지는 시베리아의 넓이와 대자연의 장엄함보다도 더욱 무겁고 너르고, 깊이 있고, 숱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것이 바로 역사다.

빈 땅, 시베리아의 역사

우리는 바이칼을 만나러 가고 있다. 여섯 시간째 한국제 중고버스에 실려 타이가의 대평원을 지나 바이칼을 만나러 가고 있다. 왜 만나려는지, 꼭 보아야 하는지 아직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본능적으로 만남의 필요성을 느꼈고, 한번 그 특이하고 신성한 울림이 있는 이름을 듣는 것으로, 또 그곳이 나의 볼기에 몽골반점이라는 멍자욱을 남긴 삼신할매의 손길 혹은 탯줄을 묻은 땅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심증을 믿고 이렇게 찾아와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미래학이다. 과거를 만나고 미래를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현재 역사의 무대에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 9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뜨겁다. 버스는 힘겨운 내색을 하면서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바이칼 주변에 오면 해발 1000m가 훨씬 넘는 거대한 산악지대가 된다. 대평원의 넓이 때문일까, 경사도를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버스는 높은 길을 나름대로 힘들게 달려온 것이다.

우린 늘 편안하고 안온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사계절의 순환과 계절풍, 홍수와 한발 등 일정한 규칙을 가진 예측 가능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인간을 압도할 만한 크기나 넓이, 현상들을 가진 자연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

만약 먼 조상들처럼 만주벌판과 몽골의 초원을 달리고, 찬바람이 휘휘 휘몰아치는 시베리아의 평원과 타이가의 수풀 속을 헤매고 다녀보았다면, 자연과 역사에 어리광을 피우는 태도는 취하지 않았을 텐데. 그 어리광 때문에 결국 근대에 이르러 고난의 삶을 자초한 것은 아닌가? 스스로가 한(恨)이 많다고 자처했으니 티베트의 고원 몽골초원, 만주의 대삼림지대 등에서 삶을 영위한 다른 몽골로이드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들처럼 강인한 정신과 크고 건강한 세계관을 지니면서 타고난 좋은 환경에서 땅과 역사를 잘 가꾸어왔다면, 우린 어쩌면 세계사에 남을 위대한 문명을 창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 이 초원을 달리면서 고구려인과 광개토대왕을 계속 떠올리는 걸까? 그가 왔을 가능성 때문에? 물론 그의 기마군단이 이곳에 말 발자국을 남겼을 수도 있다. 바이칼 지역의 오르혼섬을 점령했다는 전설의 고구려 장군은 대왕의 휘하군단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러한 세계를 보고, 그것이 고구려정신에, 신세계 건설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 때문이다.

시베리아(Siberia)는 빈 땅이라는 의미다. 사실은 빈 땅이라기보다는 버려진 땅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50만년 전부터 인류는 이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바이칼지역 바트순탄(Batsuntan)산맥에 있는 동굴 안에서 9세 가량의 네안데르탈계 소년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르쿠츠크시에서 80km정도 남동쪽으로 떨어진 말타(Malta)유적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또 부레(Buret)유적에서는 맘모스의 상아를 깎아서 새, 나체 여성, 임부상 등을 부조하였는데, 이는 다산과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의미가 짙다.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 전부터 시작되어 많은 유적들이 아시아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대다수가 예니세이강 중류, 특히 일찍부터 철을 채취한 야철술이 발달한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앙가라 유역의 이르쿠츠크와 브라츠크 주변지역, 레나강 상류 지역의 묘에서는 활과 화살, 토기, 마제석부, 연옥제, 돌도끼 등이 나왔다. 이들 신석기문화는 아파나시예프(Afanasiyev), 안드로노포(Andronovo), 카라수크(Karasuk)로 이어지는 청동기문화에 계승되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우리의 청동기문화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배웠다.

바이칼지역의 기하문 토기는 북만주의 송화강과 눈강 유역에서 화려한 꽃을 피운 다음에 만주를 거쳐 한반도 서북부, 한반도 남부 및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바이칼 유역은 연옥의 산지인데, 멀리까지 교역하였다. 그 가공기술이 발해만 유역의, 우리와 관계깊은 홍산문화(BC 4000∼BC 2300)에 전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문화가 발달해서인지 시베리아-예니세이강 중류, 앙가라강-레나강 상류 지역은 동부유럽평원과 우랄산맥지역과 함께 시베리아 3대 예술의 중심지로서 암각화가 많다. 동심원을 주로 표현하고, 사냥장면을 그린 암각화는 연해주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울주군의 암각화들에 영향을 준 듯하다. 최근에는 한국암각화회원 등 학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상호 연관성을 연구하고 있다.

한편 바이칼에 살았던 몽골리안들은 신석기시대를 기점으로 아무르강을 따라 북만주지역으로 들어오고, 일부는 몽골초원을 경유하여 중국 동북부 발해지역과 중국 서북부 등지로 남하한다. 이러한 문화이동과 현상들 때문에 바이칼지역은 우리 문화의 원류로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민족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떠 있는 뗏목을 찾는 것처럼 지난한 작업이지만,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지금 내 검은색 가죽지갑 안에는 단군영정이 들어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기후의 변동으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땅, 얼음과 눈보라, 빼곡하게 들어찬 타이가 숲으로 변신해 버렸다. 그리고 야쿠트, 부랴트, 에벤키, 퉁구스 등 몽골로이드의 여러 소수 종족들만 번갈아가며 혹은 지역을 달리하면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거주해 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오다가 17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의 개척과 약탈이 시작되었고, 후에 다시 모피상들과 유형자들이 정착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유르타에서 맞는 호수의 밤

이제 오르혼(Olkhon)섬이 가까워지고 있다. 칭기스칸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있고,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원향인 신비의 섬이다. 거리의 이동은 시간의 이동, 역사의 이동으로 전화하고 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차는 20호 남짓한 마을을 지나 오르혼섬으로 건너가는 메레에쓰 선착장에 닿았다. 거의 10시가 다 돼가는 시각이다. 눈빛 같은 백무지개가 호수 위에서 하늘로 오작교처럼 걸려 있다. 햇살이 축축해지고, 바이칼의 물빛에 젖은 풀들도 습기를 머금어 퍽이나 부드럽고 목가적으로 보인다. 풀을 뜯어먹는 얼룩소 한 마리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어둠을 불러들이고 있다. 바이칼의 호반에 어둠이 스며들고 있다. 드디어 바이칼의 물을 몸에 적셨다.

생나무의 송진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배를 타고 오르혼섬에 닿자마자 곧 잠이 든 모양이다.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눈을 떠보니 황량한 언덕과 마른 고사목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햇살의 흔적에 나신을 드러내며 불안의 신화를 노래하는 듯한 곳이다. 유르타(몽골의 겔과 같은 이동식 주거) 몇 채가 하얀빛으로 썰렁하게 원형을 이루었다.

전기도 없어서 주위는 캄캄했다. 아무리 백야라만 이미 날을 넘겨 12시가 넘은 시각이다. 달은 아직 뜨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냐 하면 바로 그 아래에서 바이칼의 물이 빛나고 있는 사실도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을 정도다. 망연자실한 우리들은 어둠 속에 방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홀린 듯 넋나간 표정을 짓던 사람들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온다.

“우린 선사시대에 와 있는 거야.”

“우린 지금 쥐라기공원에 있는 거야.”

얼마나 급조한 건물인지 한 유르타에는 아예 난로도 없었다. 주먹만한 휴대용 가스버너 2대만 놓여 있었다. 거의 블랙코미디 수준에 이르는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식당에 끌려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새벽 3시 반에 몽골의 초원을 출발하고, 오후 3시에 러시아식당에서 대충 점심을 때운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은 그 유명한 러시아 흑빵조각뿐이었다. 마실 물조차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바이칼 호반의 유르타에서 자작나무 잎으로 만든 마사지용 비를 사용하여 사우나를 하면서, 모닥불에다 양바비큐 요리를 먹는 꿈을 갖고 왔는데. 이렇게 맞이한 바이칼의 기묘한 첫밤은 유르타의 어설픈 침상 위에서 깊어갔다.

호수의 밤은 고요다. 침엽수의 끝에 별빛이 걸려 파르르 떨고 있다. 하늘의 그림자가 호수 위를 배회한다. 건너편 산이 별빛에 하얀 몸을 언뜻언뜻 드러내고 있다. 유르타의 생나무 냄새가 터무니없이 큰 천장 구멍을 통해서 배어든 바이칼의 밤 내음과 빚어져 추위에 떠는 우리의 코를 감동케 한다.

밤이라 그런지 호수의 무게, 역사의 무게가 진중하게 감지된다. 갈색 곰이 할퀸 호수의 밤, 잿빛 늑대의 울음소리가 물결을 일으키는 바이칼 호반에서 우리는 이제 잠이 든다. 고요가 고요를 삼키는 곳. 바이칼의 고요를 안고 편안하게 잠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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