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친 지 어느새 18년이다. 나는 아직 처음 골프채를 잡던 그때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손끝에 전해오는 그립의 묵직한 감촉.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교통사고를 겪고 1년이나 병원신세를 졌던 ‘무명 배우 유동근’은 병상을 딛고 일어나자마자 여의도 KBS별관 건너편에 있는 골프연습장에서 살다시피 시간을 보냈다. 배추 20포기는 너끈히 들어가는 노란 박스 가득히 골프공을 담아 하늘로 쏘아 올리며, 언제 올지 모르는 촬영스케줄 전화를 기다렸다. 불과 1년 만에 79타를 기록하며 첫 싱글. 역시 헝그리 정신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게 깊이 골프에 빠져들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무척이나 바빠진 요즘, 나는 더 이상 그때만큼 부지런히 골프를 치지 못한다. 골프칼럼을 부탁하는 ‘신동아’ 편집실의 연락을 받고 가만히 생각해봤다. 요즘 나에게 골프란 무엇일까. 골프 장갑 회사를 운영하느라 본업까지 미뤘던 적도 있었던 나에게 골프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머리에 맴돈 것은 넓은 그린도, 호쾌한 장타도 아니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내 아내의 드라이브 샷이었다.
‘아이구, 또 마누라 얘기야?’ 자랑이라도 하듯 곳곳에 아내 얘기를 흘리고 다니는 팔불출 유동근을 기억하시는 분들의 지겨워하는 표정이 눈에 선하다. 요즘에는 유동근하면 바로 전인화에게 관심이 옮겨 가버리는, 솔직히 말하면 몹시도 ‘열 받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곤 한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전인화 남편 유동근’이 아니라 ‘유동근 마누라 전인화’임을 만방에 선포하고자 한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아내와의 라운딩을 사랑한다. ‘에이, 그런 입에 발린 거짓말을….’ 또 다시 귓전에 맴도는 환청을 과감히 무시하고 말하거니와, 이것은 절대 진실이다. 그 동안 나는 동료연예인, 정치인, 기업체 대표 등등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라운딩을 했지만 아내만큼 나를 기쁘게 하는 컴패니언을 만난 기억이 없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우리 부부의 50%는 골프가 만들어 주었다.
사실 아내는 내가 직접 골프에 입문시켰고, 가르쳤다. 나날이 향상에 향상을 거듭해 어느새 90타 대를 기록하며 웬만한 여자 연예인은 모두 평정하고 다니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내에게 골프를 권한 이유는 딱 하나, 건강에 대한 염려였다.
물론 아내는 항상 건강한 편이다. 그러나 ‘그냥 건강하다’ 정도로는 심야와 새벽촬영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연기자의 생활을 감당하기 힘들다. 팬들의 사랑이 커감에 따라 스케줄은 늘어나고 더욱 강한 체력을 요구한다. 고민 끝에 나는 아내에게 골프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부부가 함께 골프 쳐봐야 싸움밖에 더하겠어?” 내 결심을 전해들은 지인들의 첫 반응은 그랬다. 운전과 골프는 아내에게 직접 가르치지 말라는 얘기도 못 들어 봤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왕 먹은 마음, 과감히 실천했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부터 아내와의 골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자신을 떼놓고 골프장에 가버리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원망 섞인 시선을 피하기 위한 묘수였거나…).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전인화의 코치’ 유동근은 기술적인 측면보다 체력향상에 주안점을 두었다. 연습장에 도착하면 가장 멀찌감치 떨어뜨려 주차를 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