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하는 말이지만, 골프를 하다보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제가 몸담은 연예계만 해도 그렇지요. 골프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듯 영화든 드라마든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골프 약속은 ‘본인 사망시’ 말고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농담이 있죠? 여럿이 함께 하는 운동이니 그만큼 시간 약속이 중요하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어딜 가나 약속에 늦는 사람이 꼭 있고, 또 대부분은 늘 늦는 사람이 늦습니다. 습관이죠.
연예계도 마찬가집니다. 작품에 출연하기로 해놓고도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면 쉽사리 취소하는 일이 있습니다. 배우뿐 아니라 제작자도 마찬가지죠. 계약서 쓰고 도장까지 찍었건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없던 일로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대본 연습 때든 촬영장이든 다른 사람 일에는 신경 안 쓰고 오로지 자기 위주로만 스케줄을 잡는 이도 종종 있습니다. 동료배우나 스태프가 고스란히 피해를 보죠.
골프가 잘 안될 때 하는 변명이 366가지라고 합니다. 그립을 바꿔서, 골프채를 바꿔서…하루에 한 가지씩 변명을 해도 한 가지가 남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늦는 사람도 꼭 핑계를 대지요. 길이 막혀서(누군 그 길로 안 왔나?), 야근을 해서… 핑계엔 끝이 없습니다. 연기자도 마찬가집니다. 대본연습을 하려면 일찍 나와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른 배우와 호흡을 맞춰봐야 하는데,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그 아까운 시간에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핑계가 많은 사람은 아예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라운드 중에 실수하면 조력자일 뿐인 캐디를 쥐잡듯이 몰아세우며 “너 아까 몇 미터라고 했어?” 하며 마구 화를 냅니다. 연기자 중에도 본인이 실수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가가 글을 왜 이렇게 이상하게 쓰는 거야?” “(상대배우에게) 너 거기서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상대배우가 선배라면) 소품이 왜 이렇게 엉망이야?”….
훌륭한 골퍼는 18홀이 끝나면 동반자와 악수를 나눕니다. 가벼운 포옹도 좋지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잘 쳤습니다’ ‘오늘은 제가 좀 실수가 많았습니다. 미안합니다’ 같은 말을 덧붙인다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러나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내기에서 졌거나 경기가 잘 안 풀렸을 때는 인사 한마디 없이 라커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함께 보낸 다섯 시간의 마무리가 엉망이 되는 거지요.
골프를 매너운동이라고 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닐 겁니다. 매너가 없으면 공을 아무리 잘 쳐도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예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든 드라마든 공동작업입니다. 작가, 연출자, 촬영, 조명, 녹음, 의상, 소품, 미용, 분장… 수많은 사람이 제각기 정성을 다합니다. 더욱이 인간이 하는 일인데다 인간을 표현하는 일이다보니, 촬영장의 분위기는 고스란히 작품의 질에 영향을 줍니다.
물론 대다수 연기자는 선후배들과 화기애애하게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늘 깔끔한 매너를 지킵니다. 그러나 비록 아주 일부이긴 해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촬영분이 끝나면 말도 없이 먼저 사라져버리는 사람,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연기자들을 제치고 바쁘다는 이유로 먼저 찍고 가는 사람, 대사도 제대로 외우지 않고 와서 수십번의 NG를 내면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사람, 자신은 스타고 바쁘니까 이런 일쯤은 당연하다는 듯 사과도 않고 휑하니 가버리는 신인 스타….
어느 사이엔가 선배로서 이런 친구들을 혼내려고 해도 오히려 주위에서 눈치보고 말리는 게 현실이 돼버렸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다들 모여서 그날의 잘잘못을 돌아보고 사과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단합하는 그런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랩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세태를 따라가는 건 당연하겠지만, 가끔은 참 ‘이건 아닌데…’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사 천태만상입니다만, 많은 사람이 극히 일부의 사람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정말 재미없습니다. 매너 좋고 예의바른 사람들과 함께 한 라운드는 즐겁고 기분 좋은 추억이지요. 골프를 좋아하시는 독자 여러분은 골프 스코어도 싱글 하시고 매너도 싱글 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