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4월18일, 해외 도피한 최성규 전 총경의 행방 추적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떠나기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
“청와대측이 해외 도피를 권유했다. 밀항시키기 위해 부산에 (배를) 준비해놨다고 들었다.”
4월19일 서울지법의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나온 최규선씨의 진술이다. 이 진술의 진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증인은 바로 최 전 총경이기 때문이다. 이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최 전 총경의 정확한 도피 동기 또한 파악되지 않았다.
한동안 그의 잠적을 두고 도피방조 의혹 등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이후 월드컵, 대통령선거 등 굵직한 이슈들로 인해 최 전 총경을 향한 언론의 촉각 역시 무뎌진 느낌이다.
현재 최 전 총경은 인터폴(국제경찰)에 의해 ‘적색수배(Red Notice)’ 대상으로 분류돼 인적사항과 범죄혐의가 인터폴 홈페이지(www.interpol.int)에 공개중이다. ‘적색수배’는 중대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가 해외로 도피해 소재 파악 및 동향감시가 필요한 경우 인터폴 회원국에 그의 체포 및 송환을 목적으로 내리는 수배조치. 인터폴이 발동하는 5단계 수배유형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최 전 총경의 범죄 혐의는 ‘사기(Fraud).’
그의 뇌물수수 혐의는 확인된 바 있다. 검찰은 2002년 7월 최규선씨가 모 병원에 대한 경찰 내사 무마 명목으로 최 전 총경에게 1억2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했다. 잠적 이후 파면된 그는 음지(陰地)에서 자신의 이름이 하루 빨리 잊혀지길 고대하고 있는 걸까.
추적 포기한 정치권
당초 최 전 총경의 도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은 최 전 총경 도피 직후 엄호성, 이주영, 김용균 의원을 주축으로 ‘최성규 총경 해외도피 현지조사 및 송환추진단’을 꾸려 4월18일부터 사흘간 해당 의원 3명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싱가포르로 급파해 현지 조사활동을 벌였다. 또 4월22∼26일 뉴욕에서 최 전 총경의 미국 입국 경위 등도 조사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얻지 못했다. 이후 사실상 추적 활동을 포기한 상태다.
이주영 의원실 관계자는 “현지조사에서 별 소득이 없었고 제보도 들어오지 않는 데다 대선 준비로 사실상 최 전 총경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쓸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현재 인터폴, 미 연방수사국(FBI), 미 이민귀화국(INS) 등과 국제 공조 수사(소재 확인 및 강제추방)를 펴고 있다. 인터폴 적색수배자는 국제 해·공항 입·출국시 즉각 파악돼 해당국에 통보조치되므로 제3국으로의 도피는 차단된다. 때문에 미국에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캐나다로의 도피 가능성도 희박한 편이다. 그러나 경찰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면키는 어렵다.
경찰은 이주영 의원이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의 2002년 경찰청 국정감사(10월1일)에서 한 질의에 대해, 최 전 총경의 미국 방문비자(B-2) 유효기간이 10월 20일로 만료되므로 유효기간 만료시 체류기간 연장을 불허하도록 미 관계당국과 협의토록 ‘조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의원이 국감 이후인 11월 경찰청에 보낸 최 전 총경 관련 질의에 대한 경찰의 답변 자료엔 10월9일에야 미국 내 전 주재관에게 ‘지시’한 것으로 돼 있다. 공식적인 두 답변 자료에 나타난 ‘조치’와 ‘지시’의 날짜마저 다르다는 점에서 실제 ‘조치’가 과연 언제 이뤄졌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미온적이고 책임을 면하려는 형식적 수준의 조치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6개월의 체류기간이 끝나 최 전 총경은 현재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국제공조 업무를 맡고 있는 경찰청 외사3과 관계자는 “아직 최 전 총경에 관한 단 한 건의 제보도 없으며 그의 소재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며 “미국에 경찰주재관이 3명뿐이어서 사실상 미국 관계기관과 서류를 통한 절차상 협조에 그칠 뿐, 한국 경찰의 독자적인 소재 추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