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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화국의 저승사자였다”

탈북자 체포 전담했던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 육필 수기

  • 글: 이춘길(가명)전 북한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탈북자 납치 공작원

“나는 공화국의 저승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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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탈북자 납치공작원 이춘길의 수기

“나는 공화국의 저승사자였다”

이춘길씨가 자신의 공작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쓴 사죄문.

이 글을 쓰기에 앞서 헐벗고 굶주리는 2300만 민족을 구원하려는 일을 하다가 저에게 잡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총살형을 당한 박진만(가명)·김덕성·황만길·박분옥·강창남·강성남·김진구·류영범 등 많은 님들의 영전에 용서를 바라며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또한 인간답게 살려고 자유를 찾아 떠났다가 저에게 잡혀 북한으로 송환돼 지금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정치범관리소에서 고생하시는 분들께 다시 한번 용서를 빌면서 아울러 님들이 이루지 못한 뜻과 하지 못한 말을 온 세계에 알리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나는 1970년 4월18일 함경북도 무산군 온천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우리 집안은 이른바 ‘백두산 줄기’이다. 북한에서 출세하려면 능력보다 앞서는 것이 토대(출신성분)인데, 가장 끗발 센 집단이 ‘백두산 줄기’와 ‘룡남산 줄기’이다. 백두산 줄기는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같이했던 사람들의 가족과 후손을 말하고, 룡남산 줄기는 김정일과 김일성종합대학을 함께 다닌 동창생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때 국내에 조직한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의 회원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소련으로 가 7년 동안 벌목공으로 일하고 돌아오셨다. 남한 사람에게는 벌목공이 대단찮은 직업으로 들리겠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 벌목공으로 나가는 것이 대단한 영광이고 혜택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단순 벌목공이 아닌 임업대표부 기사장으로 일하면서 1984년 당시로는 대단히 큰돈인 5만원을 벌어오셨다. 덕분에 나는 잡곡밥을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중학교 졸업을 앞둔 1986년 5월, 나는 호위총국에 선발되어 입대했다. 이듬해(1987년) ‘호위사령부’로 승격한 호위총국은, 김일성·김정일을 호위하고 두 사람의 지방 별장인 ‘특각’을 지키는 일을 한다. 남한의 대통령 경호실과 비슷하지만, 그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선택된 사람’만 뽑혀 가는 호위사령부에 배치됐으니 어깨가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경호실은 대통령 근접경호만 담당하고, 대통령 주변경호와 청와대 외곽경호는 군(헌병·육군 수방사)과 경찰이 담당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호위사령부가 건물경호와 주변경호·근접경호까지 전담한다. 호위사령부는 조선인민군과 별개 조직으로, 내부에 당조직·보위부·검찰소 등을 둔 완결적 구조를 갖고 있다. 현재 호위사령관은 이을설(李乙雪·81) 원수다.-편집자)

출신성분이 좋은 나는 호위사령부에서도 제일 편하고 알짜배기인 호위사령부 산하 보위부에 배치되었다. 한국군에도 군대 내부로 침투한 간첩을 잡고, 주요 지휘관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무사령부를 운영한다고 들었다. 호위사의 보위부는 호위사 안에서 기무사와 같은 일을 하는 곳이다.

나는 호위사령부 보위부 직속 747호 교양관리소에서 근무했다. 교양관리소는 전사(병사)에서 대좌(대령)까지의 호위사령부 군인들 중 과오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데려다가 계급장을 떼고 1년 동안 교육을 하는 곳이다. 내가 만나본 한국 사람들은 이곳을 한국군의 군기(軍紀)교육대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곳은 교양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살아 나갈 테면 나가봐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혹독하게 취급하는 곳이다. 한국군의 군기교육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곳이다.

호위사 보위부에서 군 생활 마쳐

나는 1990년 7월19일 중사 계급으로 제대하였다. 호위사 출신은 워낙 성분이 좋기 때문에 3년제 공산대학만 나오면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들어갈 수가 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군당(郡黨: 군 단위마다 있는 조선로동당 조직)에 들어가 간부를 할 수도 있다. 나는 공부하는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무엇을 할까 궁리하며 3개월을 보내다, 결국 보잘것없는 ‘20호 금속건설사업소’란 회사에 들어가 운전수를 하게 되었다.

소련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아버지는 자동차 운전을 할 줄 아셨는데, 덕분에나도 일찍 운전을 배웠다. 이러저리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내 성격에 운전수라는 직업은 제격이었다. 성분이 좋다는 이유로 나는 직장에서 사로청(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위원장이란 감투까지 썼다. 집안에서는 내가 외아들이라 빨리 결혼해야 한다고 하여, 스물두 살의 나이에 양가 부모의 합의로 정해놓은 여자와 결혼을 했다.

운전수를 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었던 나는, 부업(?)삼아 장사를 시작하였다. 중국에서 의복류와 생필품 등을 밀수입해 북한에 팔았는데, 초기에는 제법 많은 돈을 손에 쥐었다. 그러던 1994년 말, 장사가 잘된다 싶어 10만원어치의 물건을 들여왔는데 몽땅 압수당해 버렸다. 간신히 절반을 건져 장사치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물건값을 주지 않고 달아나버렸다.

손실에 눈이 먼 나는 직장을 팽개치고 그 돈을 찾겠다고 돌아다녔다. 3개월 동안이나 무단 결근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무직(無職)에 주거부정(住居不定)인 사람은 이상한 눈으로 본다고 들었다. 하물며 ‘실업자가 없다’는 사회주의국가 북한에서 무단 결근을 했으니 얼마나 큰 과오겠는가. 더구나 직장 사로청 위원장이란 자가 3개월이나 무단결근 했으니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나가라’는 당비서의 말에 나는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졌다. 몇 개월을 빈둥거리다가 결국 사회안전부(한국의 경찰에 해당, 현재는 ‘인민보안성’으로 개칭)에 ‘무직자’로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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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춘길(가명)전 북한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탈북자 납치 공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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