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6월말 현재 국민·우리·하나(+서울은행)·신한 등 4개 선도은행의 시장점유율은 65% 수준에 이른다. 이들 ‘4강 은행’은 일반은행 전체에서 총자산 64.5%, 대출금 67.2%, 예금은 63.8%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예금과 대출 시장의 3분의 2를 이들 4개 은행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며, 특히 1위인 국민은행의 시장점유율은 30%에 달한다.
4강 은행 시대는 시장점유율에서만 봐도 각각 10% 안팎의 엇비슷한 점유율을 보이던 5대 시중은행 시대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물론, ‘규모의 경제’와 상업성, 수익성 위주의 경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특징을 지녔다.
1960년대부터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 국내 은행산업의 판도는 정부에 의해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로 불린 5대 시중은행에 대한 호송선단(護送船團)식 금융정책으로 시장논리에 따른 은행업의 자생적 발전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관치금융이 팽배한 나머지 진정한 선도은행(leading bank)은 존재할 수 없었다. 선두로 떠오르기만 하면 정부의 요구로 부실기업에 거액의 대출을 해줘야 했고, 이로 인해 그 은행은 기업과의 동반 부실화를 면할 수 없었다. 1990년대 중반 국내 1위를 달리던 제일은행이 한보그룹에 대한 대출 때문에 한순간에 부실은행으로 추락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은행, 시장으로 뛰어들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관치금융과 호송선단식 정책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됐으며, 경기·충청·동남·동화·대동 등 5개 은행이 퇴출되면서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도 깨지고 말았다. 또한 기업금융 전문은행이던 조흥·제일·외환은행 등은 각각 주거래 기업인 쌍용·대우·현대그룹의 경영악화 등으로 인해 기업여신에서 대규모 부실이 발생, 공적자금 투입과 외국계의 지분참여 등이 이어지며 선두그룹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반면 소매금융에 치중하던 국민·주택은행 등과 기업금융 부문의 부실여신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하나·한미·신한은행 등이 외환위기라는 외적 계기와 김대중 정부의 1차 금융구조조정의 결과 리딩뱅크로 일시 부상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은행들은 더 이상 국가에 의존하는 ‘금융기관’이 아니라 시장에서 스스로 생존책을 찾아야 할 ‘금융기업’이라는 뼈아픈 자기인식을 해야 했다. 나아가 시장은 규모의 경제를 갖춘 리딩뱅크를 원했고, 은행들은 합병과 지주회사를 통한 대형화, 겸업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으로 통합 국민은행이 탄생했고, 부실화한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이 합쳐져 한빛은행(2002년 5월 ‘우리은행’으로 개칭)이 생겨났다. 하나은행은 2002년 9월 서울은행 인수를 확정, 12월에 합병을 마무리지으며 단숨에 3위 자리로 올라섰다.
또한 외환위기 이후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신한은행은 최근 총자산 기준 5위인 조흥은행의 매각입찰에 참여, 덩치를 키우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조흥은행 경영권을 인수해 합병할 경우 신한은행은 총자산 130조원대의 2위 은행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은행산업은 외환위기 후 이처럼 금융 구조조정을 거치며 합병을 통해 국민·우리·하나·신한은행의 4강 구도로 재편되고 있으며, 이들 은행은 관치금융에서 벗어나 시장경쟁에서의 우위를 통해 강자의 면모를 갖춰가는 중이다.
신한은행 김상대 부행장은 “정부 주도로 합병이 이뤄진 우리은행을 제외하고는 경쟁을 통해 시장에서 살아남은 은행들이 강자로 부상했다”고 강조했다. 금융연구원 권재중 박사는 “4강 은행 시대는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은행산업을 이끌 수 있는 초대형 은행이 탄생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은행들이 상업성, 수익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탈바꿈했다는 측면에도 커다란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