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그렇게 편안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는 완전의 상태가 왔다. 부드럽고 농밀하고 가득 찬, 혹은 아낌없이 한 점 후회도 없이 다 타버린 ‘완전’. 그 충일한 만족감 속에서 정현은 자꾸만 살아나려는 의식을 애써 주저앉히고 있었다.
‘안 돼. 깨면 안 돼. 이 느낌 그대로 있어야 해.’
그녀는 몸을 돌리면서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는 한 팔로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곤 얼굴을 베개에 최대한 묻었다. 마치 새기 시작한 그 충일한 만족감을 더 새지 못하게 눌러버리기라도 하듯.
그러나 결국 헛된 노력이 되고 말았다.
따르릉∼∼.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가 주저앉히려던 의식을 칼날처럼 들쑤시기 시작한 것이다.
할 수 없이 몸을 일으킨 정현은 침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전화기를 향해 휘청휘청 걸어가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태 잤니?”
연혜영 선배였다.
“네에∼”
“지금 8시 반이야. 방송국 안 늦어?”
“벌써 그렇게 됐어요?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셨더니….”
“너어…. 아직도 진정이 안됐니?”
탐색하는 목소리였다. ‘아하, 그래서 전화했구나’, 정현은 새삼 연혜영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혼자 살다 보면 조그만 배려에도 유난히 민감해지는 법이다.
“글쎄,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마음이 안 잡힌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거다”
“네?”
“그럴 거라구. 이따 방송 끝나고 시간 있으면 우리 집에 들러. 술로 풀지 말고 나하고 얘기하면서 풀어라.”
“상황 봐서 그러죠”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건성이었다. 곧 결혼할 애인이 있는 연선배를 만나 이 웃기지도 않은 감정을 어떻게 푼단 말인가. 차라리 집에서 혼자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와인이나 마시며 이 허허벌판을 헤매는 듯한 감정과 적나라하게 뒹굴다 쓰러져 잠이 들면, 누가 알겠는가, 다시 꿈속에서 방금 전 놓쳐버린 그 충일한 만족감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될지….
어쨌거나 빨리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정현은 한껏 기지개를 켜면서 오피스텔 현관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여느 아침처럼 바닥에는 조간신문이 얌전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양에 각 언론사 특파원 상주
‘한중일 FTA 체결 합의’. 집어드니 1면 톱기사가 우선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남북 정상회담 올 6월15일 열릴 듯’이라는 제목이 박혀 있고, 아래쪽에는 ‘노대통령, 임기 내 행정수도 착공 반드시 실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정현은 재빨리 신문지를 넘기며 지면들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은 탓에 방송국에서 보내 온 자료들을 쳐다보지도 못했으니 신문이라도 훑어야 했다. 정치권은 벌써 차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주자들이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내년인 2008년 4월 대선을 치르기로 돼 있었다. 통치구조도 분권형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한 임기 4년의 중임제로 바뀌었다.
경제 섹션엔 한중일 FTA 체결 합의와 관련된 기사들이 가장 큰 비중으로 다뤄졌다. 전문가들이 올 경제성장률을 5%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였다. 여기엔 노대통령이 공약한 평균 7% 경제성장은 결국 지키지 못할 것이 분명해졌다는 해설이 붙어 있었다.
동북아에서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수치로 보여주는 기사와 함께 이 같은 결과는 무엇보다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남북경제공동체를 향한 노무현 정권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라는 외신 보도가 소개됐다. 남북관계는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지만 꾸준히 발전해 북한 경제만을 다루는 신문 지면도 생겨났다.
몇 개월 전 평양에 남한대표부가, 서울에 북한대표부가 설치되면서 각 언론사마다 평양에 특파원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오피니언면을 들추니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를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북아철도공사 사업에 대한 전문가의 제언이 실려있고 ‘정보화 선도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려면’이라는 제목의 글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오늘 방송에서 다룰 것 같은 내용이 아니다. 오늘 무엇을 다루게 될지는 이메일을 열어보면 금방 알게 되겠지만 정현은 잠시 망설이다 포기했다. 우선 시간이 없고 어차피 방송국에 가서 자료들을 읽으며 방송준비를 하니까 전혀 모르고 가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매일 밤 이메일로 다음날 방송분 큐시트와 자료들을 꼬박꼬박 보내주는 작가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