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각자이자 지식인이었던 노신영 전 총리의 부친 노창열 선생은 노력을 다한 후에는 자기의 처지를 알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님의 나이는 45세셨고 어머님은 36세셨다. 위로 8년 연상의 누님 한 분이 있었고 후일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났다. 아들 넷을 잃은 부모님은 상심한 나머지 점술가의 권유로 사망한 형들의 무덤을 밤중에 먼곳으로 옮기기도 했고, 내가 태어났을 때는 100일이 지난 후에야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출생지 학천리(鶴泉里)는 심곡(深谷)이라고도 불렀는데 집 앞으로는 무학산(舞鶴山)이 솟아 있고, 넓은 분지 사이로는 시냇물이 흐르는 50여 호의 아늑한 마을이었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집은 학천리에서 고개 하나 너머에 있는 강서군 동진면 용정리로 이사 갔다. 아버님은 용정리에 있는 조선무연탄광주식회사 강서지점에 오랫동안 근무한 한국인 간부였는데, 용정리에 새 사택이 완공되어 그리로 가게 된 것이다.
네 아들 잃고 나를 얻은 부모님
1886년생인 아버님은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한학에 조예가 깊고 일본어도 유창하셨다. 학자 타입의 아버님은 무척 부지런하시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늘 무엇인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아버님이 한가로이 쉬고 있는 모습을 별로 본 기억이 없다. 아버님께서는 검소한 생활과 저축으로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자수성가한 부자이자, 전답도 꽤 많이 소유한 지주가 되어 있었다.
아버님은 집 뒤뜰과 앞뜰에 무·배추와 옥수수 등을 심고, 퇴근 후에 손수 가꾸기를 좋아하셨다. 주말이면 나에게 물주기와 잡초뽑기를 시켰고 배추벌레도 잡게 하셨다. 여름방학 때면 항상 나를 데리고 우리 논과 밭이 있는 곳을 돌면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우리 것인지를 가르쳐주셨다. 점심때에는 시골사람들 집에서 닭을 잡고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할아버님과 할머님 묘소는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었는데, 추석이 가까워지면 아버님은 꼭 나에게 벌초(伐草)를 명하셨다.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생전에 뵌 적이 없는 나는 뙤약볕을 받으며 벌초하는 게 싫어서 어머님에게 불평을 많이 했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아버님은 간단한 농기구 사용법을 가르쳐 주셨고, 물과 거름(소변을 물에 희석한 것)은 아침이나 저녁 때 주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주셨다. 후일 외교관이 되어 재외공관에 근무하면서, 관저 뒤뜰에 토마토와 오이 등 채소를 심고 가꾸어 직원들에게 나누어준 것은 소년 시절 아버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일곱 살 때 나는 강서 읍내에 있는 강서덕흥공립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20리 거리였는데 이 길을 6년 동안 걸어 다녔다. 무학산 기슭을 따라가는 도중 높은 고개가 있어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렸고, 겨울에는 강한 바람을 맞아야 했다. 눈이 많이 내리고 눈보라가 심할 때면 길 찾기가 어려워 눈구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회사에서 돌아온 아버님은 내가 집에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알면 곧바로 나를 찾아 학교길을 걸어오셨다. 특히 비나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학교 가까이 와서야 나를 만나게 되었는데, 나를 찾아낸 아버님이 “신영아”하고 부르며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