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편지 쓰기와 일기 쓰기 가르쳐준 고매한 교육자

  • 글: 노신영 롯데 복지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

    입력2003-01-05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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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님은 편지를 받으면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 것으로 생각하고 곧 답장을 쓰라고 하셨다. 지금도 내 귓가에는 “신영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거라.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만 더 노력하여라”하고 이르시던 아버님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편지 쓰기와 일기 쓰기 가르쳐준 고매한 교육자

    선각자이자 지식인이었던 노신영 전 총리의 부친 노창열 선생은 노력을 다한 후에는 자기의 처지를 알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나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학천리 68번지에서 부친 노창열(盧昌烈)과 모친 방인숙(方仁淑)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순서로는 다섯 번째 아들이었으나 먼저 태어난 형 넷이 어려서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남이 되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님의 나이는 45세셨고 어머님은 36세셨다. 위로 8년 연상의 누님 한 분이 있었고 후일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났다. 아들 넷을 잃은 부모님은 상심한 나머지 점술가의 권유로 사망한 형들의 무덤을 밤중에 먼곳으로 옮기기도 했고, 내가 태어났을 때는 100일이 지난 후에야 출생신고를 했다고 한다.

    출생지 학천리(鶴泉里)는 심곡(深谷)이라고도 불렀는데 집 앞으로는 무학산(舞鶴山)이 솟아 있고, 넓은 분지 사이로는 시냇물이 흐르는 50여 호의 아늑한 마을이었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집은 학천리에서 고개 하나 너머에 있는 강서군 동진면 용정리로 이사 갔다. 아버님은 용정리에 있는 조선무연탄광주식회사 강서지점에 오랫동안 근무한 한국인 간부였는데, 용정리에 새 사택이 완공되어 그리로 가게 된 것이다.

    네 아들 잃고 나를 얻은 부모님

    1886년생인 아버님은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한학에 조예가 깊고 일본어도 유창하셨다. 학자 타입의 아버님은 무척 부지런하시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늘 무엇인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아버님이 한가로이 쉬고 있는 모습을 별로 본 기억이 없다. 아버님께서는 검소한 생활과 저축으로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자수성가한 부자이자, 전답도 꽤 많이 소유한 지주가 되어 있었다.



    아버님은 집 뒤뜰과 앞뜰에 무·배추와 옥수수 등을 심고, 퇴근 후에 손수 가꾸기를 좋아하셨다. 주말이면 나에게 물주기와 잡초뽑기를 시켰고 배추벌레도 잡게 하셨다. 여름방학 때면 항상 나를 데리고 우리 논과 밭이 있는 곳을 돌면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우리 것인지를 가르쳐주셨다. 점심때에는 시골사람들 집에서 닭을 잡고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할아버님과 할머님 묘소는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었는데, 추석이 가까워지면 아버님은 꼭 나에게 벌초(伐草)를 명하셨다.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생전에 뵌 적이 없는 나는 뙤약볕을 받으며 벌초하는 게 싫어서 어머님에게 불평을 많이 했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아버님은 간단한 농기구 사용법을 가르쳐 주셨고, 물과 거름(소변을 물에 희석한 것)은 아침이나 저녁 때 주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주셨다. 후일 외교관이 되어 재외공관에 근무하면서, 관저 뒤뜰에 토마토와 오이 등 채소를 심고 가꾸어 직원들에게 나누어준 것은 소년 시절 아버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일곱 살 때 나는 강서 읍내에 있는 강서덕흥공립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20리 거리였는데 이 길을 6년 동안 걸어 다녔다. 무학산 기슭을 따라가는 도중 높은 고개가 있어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렸고, 겨울에는 강한 바람을 맞아야 했다. 눈이 많이 내리고 눈보라가 심할 때면 길 찾기가 어려워 눈구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회사에서 돌아온 아버님은 내가 집에 돌아오지 못한 것을 알면 곧바로 나를 찾아 학교길을 걸어오셨다. 특히 비나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학교 가까이 와서야 나를 만나게 되었는데, 나를 찾아낸 아버님이 “신영아”하고 부르며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부모님은 자녀 교육에 대단한 열의를 갖고 계셨다. 천자문은 국민학교 입학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배웠고 3학년 때부터는 일기를 쓰게 되었다. 어떤 날은 별로 쓸 것이 없어 따분하였고, 어떤 날은 쓰기 싫어서 짜증이 났다. 그러나 한 주일에 한두 번씩 일기장을 점검하는 아버님이 무서워 매일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일기를 썼다.

    아버님의 신년 선물에는 으레 새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일본에서 주문한 일기장에는 제비와 비행기의 속도 등 여러가지 통계숫자가 적혀 있었고, 날짜마다 토막지식이 기재되어 있었다. 토막지식 중에는 ‘海よリも陸地の低ぃオランダの海岸’(바다보다도 육지가 낮은 네덜란드의 해안)이란 것도 있었다. 토막지식이 재미있어서 새 일기장을 받으면 며칠 사이에 365일 분을 전부 읽었다.

    아버님은 일본 도쿄에 유학중인 누님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쓰게 하셨다. 엽서에도 적었지만 한번씩은 긴 봉투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를 쓰면 아버님께서 읽어보시고 문맥이 잘 이어지지 않는 곳을 고쳐주셨다. 언젠가는 봄에 부화한 병아리들이 잘 자라고 있어 여름방학 때 누님이 돌아오면 맛있는 닭 백숙을 해줄 수 있다고 적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님은 편지를 받으면 누가 문을 두드린 것으로 생각하고 곧 답장을 쓰라고 하시며, 회답을 한 편지와 답장을 쓰지 못한 편지는 따로 보관하라고 일러주셨다. 이때의 가르침을 나는 70이 넘은 지금도 지키고 있다.

    여름에는 가끔 뜰에 큰 멍석을 깔고 식구들과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했다. 그런 때 누가 우리집 앞을 지나가면 아버님은 그를 불러 자리에 앉히고 약주와 식사를 권하셨다.

    아버님은 일본어로 된 ‘경성일보(京城日報)’를 구독했는데 중요 기사는 꼭 나에게 읽어주시고 전후의 뜻을 설명해 주셨다. 노자와 공자에 대한 설명도 국민학교 시절 아버님으로부터 처음 들었다. 한무제(漢武帝)의 노여움을 산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을 받은 후 ‘사기(史記)’를 저술하였다는 사실도 아버님에게 배웠다.

    나의 좌우명이 되어 지금도 서재에 걸려 있는 ‘人必自侮而後人侮之 家必自毁而後人毁之 國必自伐而後人伐之’(사람은 자기가 모욕당할 만한 일을 한 뒤에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집안은 스스로 훼손당할 일을 한 뒤에 남으로부터 손괴를 당하며, 나라도 스스로 잘못을 저지른 후에 타국으로부터 침범을 당한다)라는 액자의 글귀는 국민학교 6학년 때 아버님이 적어주신 것이다.

    토지개혁으로 모든 재산 상실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6년 동안 나는 학교공부에 더하여, 한국과 중국·일본 등 동양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아버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1943년 전학년 우등으로 강서덕흥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보의 후신인 평양제2공립중학교(평2중)에 입학했다. 당시 평1중은 일본인, 평2중은 한국인, 평3중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섞여 다니는 학교였다. 평양시내의 국민학교에서는 평2중에 10여 명씩 입학하기도 하였으나 지방인 강서군에서는 나 혼자만 합격했다. 강서덕흥국민학교를 졸업할 때는 시모이사카(下飯坂元) 평안남도 지사의 표창장을 받았다.

    언제부터인가 아버님은 “신영아, 누이는 일본에 유학시켰지만 너는 독일로 유학 가라”고 말씀하여 일본의 고등학교 입학만을 생각하던 나를 당황하게 만드셨다. 일본 각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아버님은 일본이 독일보다 뒤떨어진 나라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학년 때 해방이 되어 나는 일본도 독일도 가지 못하고, 월남 후 아버님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독일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하게 되었다.

    남부럽지 않던 우리집은 8·15 광복과 더불어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좌익계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우리집은 부르주아로 지목되었고, 1946년 토지개혁으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환갑이 넘은 아버님은 실의에 빠져 재기할 의욕을 잃어버렸고, 그때부터 어머님이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머님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매우 진취적이고 활동적이었으며, 총명하셨다. 어머님은 난생 처음으로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시며 호구지책을 마련하셨다.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부모님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의는 식지 않았다. 특히 장남인 나의 장래와 교육에 대하여는 언제나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1947년 여름 평2중을 졸업하자 부모님은 나의 월남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님보다도 어머님이 더 적극적이셨다. 아버님은 내가 월남해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고 판단하시면서도, 조금 더 기다리면 좋은 세월이 오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연로한 아버님은 빼앗긴 재산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낮에는 나를 데리고 낚시를 하고 밤에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으며 세월을 보내셨다.

    그러나 어머님은 “신영이만이라도 먼저 남쪽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게 해야 한다. 집에서 책만 읽고 있어서는 안 된다. 조금 더 있으면 38선을 넘지 못하게 된다”고 걱정하셨다. 옆에 장남이 있어주기를 바라는 아버님의 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생활형편이 어려운 노부모와 두 동생을 남겨두고 혼자 떠나는 것이 죄스러워 몇 달 동안을 망설였다.

    그러나 1948년이 되면서 좌익의 선동은 더욱 심해지고 주위의 공기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며 갈 만한 곳이 점차 줄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집안 걱정은 말고 빨리 월남하여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단신 월남을 결심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황해도 해주에 살고 있는 먼 친척에게 부탁하여 안내원을 구해주셨고, 갖고 계시던 패물을 싸주셨다. 떠날 때 어머님은 평양까지 나오셔서 며칠 동안 나와 같이 지냈다. 어머님이 일러준 주의사항 중에는 “남자가 너무 많이 웃으면 못쓴다”는 것도 있었다.

    나는 해주를 경유해 월남을 시도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고 두 번째에 성공하여 청단과 개성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후 1950년 5월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많은 고생을 하였으나 어린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이 큰 힘이 되었다. “사람은 신용이 제일”이라고 가르쳐주신 아버님의 교훈이 사실임을 군고구마 장수를 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성공하려면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도 옳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신영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만 더 노력하라”고 하시던 아버님의 굵은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군 복무중 고시 합격

    대학 입학 후 2주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 군에 입대하였다. 아버님의 교훈을 떠올리며 군고구마 장수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입대한 후에도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독학으로 시작한 시험공부는 지난날의 독서량과 합쳐져 큰 어려움 없이 진전되었다.

    1953년 2월, 8개월여의 공부 끝에 제4회 고등고시에 응시한 나는, 구두시험을 거쳐 6월에 합격증서를 받았다. 1950년 법과대학에 입학한 동기 중에서는 제일 먼저 합격한 셈이다. 당시 현역군인이 고시에 합격했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백선엽(白善燁) 육군참모총장도 나를 불러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 한 달 후인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그해 12월에 군복무를 마친 나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50년 동안, 나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아버님의 교훈을 되새기며 극복해 왔다. ‘남이 하는 일은 나도 할 수 있고, 남이 못하는 일도 때로는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버님이 나에게 물려주신 가장 큰 자산이다.

    50여 년 동안 뵙지 못하고 있는 아버님은 100세가 훨씬 지났으니 이미 세상을 떠나셨을 것 같은데, 소식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추석 때마다 새벽부터 아이들과 손주들을 데리고 내가 총리를 하던 시절에 건립한 임진강변의 망배단(望拜壇)을 찾아가지만, 눈물이 앞을 가릴 뿐 불효자의 자책감은 면할 길 없다.

    아버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은 내가 자식들을 키우는 데 계승되었다. 외교관을 직업으로 삼은 나는 해외에서 17년을 살았다. 그 기간 우리나라는 개발도상의 가난한 나라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는 미국에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아이들은 공부와 교내외활동 등 모든 면에 뛰어나, 졸업할 때에는 저명한 사립고등학교에서 장학금을 주고 데려갔다. 공무로 바빴던 나는 아이들과 자주 면대하지 못했으나 되도록 하루 한 번씩은 같이 식탁에 앉아 지난날 아버님이 나에게 하였던 것과 같은 담화와 훈계를 하였다.

    아이들 교육에 관해 집사람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법과대학 동기동창인 집사람은 해외발령이 나면 반드시 아이들의 한국 교과서를 챙겼다. 임지에 부임하면 국사와 국어 등 우리 것을 잊지 않도록 별도로 가르쳤고 한자(漢字) 공부도 시켰다.

    후일 우리 부부가 아이들과 떨어져 지낼 때에는 아이들로 하여금 반드시 우리말로 편지를 쓰게 하였다. 나는 아이들의 편지에 틀린 한자가 있으면 고쳐서 돌려보내곤 했다.

    1987년 5월, 2년3개월여의 국무총리직을 마치고 퇴임할 때 내 나이 58세였다. 그후 지금까지 15년 동안 국민 세금으로 보수를 받는 공직을 맡는 것은 극구 사양하였다. 정계로부터도 몇 차례 권유가 있었으나 초지를 굽히지 않았다. 나는 ‘지족이면 불태(知足不殆·자기 분수를 지키면 위험한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라고 가르쳐주신 아버님의 교훈에 충실했다. 이러한 나의 생활태도는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다.

    아버님이 하시는 것을 보고 배운 바도 있어 나는 퇴임 후 충남 천안 교외에 농원을 만들었다. 취미가 비슷한 집사람과 나는 지난 15년 동안 꽃과 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며, 청경우독(晴耕雨讀 : 날이 맑으면 농사를 짓고 비가 오면 책을 읽는)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앞뜰에 장미가 피어나는 봄이나 은행이 곱게 물드는 가을에는 온가족이 모여서 피크닉을 즐기고, 손주들의 손을 잡고 산길을 걷는다. 예전에는 종일 삽질을 해도 괜찮았으나 70이 넘은 지금은 두세 시간만 일을 해도 허리가 아프니,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2년 동안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석좌교수로 학생을 가르치고, 1994년부터는 신격호(辛格浩) 회장의 권유로 롯데복지재단과 장학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사회의 그늘진 곳에 빛을 보내고, 불쌍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큰 보람을 느끼면서도 연말이 되면 부모님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다. 부모님이 어디에 묻혀 계신지도 모르는 딱한 처지를 서러워하며, 죽기 전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가 부모님 영전에 엎드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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