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마술과 환상, 인간을 꿰뚫다

문학, 세계의 반영

  • 글: 서성철 문학평론가 scsuh@unitel.co.kr

    입력2003-01-22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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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문학계에서 중남미 작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이 짧은 글에서 20세기 중남미 문학이 세계 문학에 끼친 영향과 그 위상을 상세히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중남미 문학은 이제 더 이상 비주류, 변방세계의 문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문학에 한국의 지성인들, 혹은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제3세계’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중남미인들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문학 자체에 헤게모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주도하는 흐름은 있다. 유럽을 시작으로 러시아, 영미 문학에 이어 지금 세계 문학을 선도하는 것은 중남미 문학이다. 노벨 문학상이 반드시 한 지역의 문학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는 아니지만, 중남미나 스페인 문학은 20세기에 많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백년동안의 고독’의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얼마전 타계한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 민중시인으로 잘 알려진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같은 나라의 서정시인 가브리엘 미스트랄(그녀는 중남미 대륙이 배출해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브라질의 조르지 아마두 등이 그들이다.

    그 외에도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또 환상소설 혹은 추리소설의 대가로 많은 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나라 출신으로 역시 환상소설의 대가인 훌리오 코르타사르와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의 원작자인 마누엘 푸익,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물망에 오르는 멕시코의 카를로스 푸엔테스, 네오바로크 문학의 선구자인 쿠바의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대통령 후보로 후지모리와 격돌했던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페미니즘의 대두와 더불어 명성이 한층 높아진 칠레의 이사벨 아옌데(1970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실각한 아옌데 대통령의 조카딸)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만남·충돌·변용의 문학

    중남미 문학 역시 그 문화처럼 신크레티즘(syncretism·혼합주의)에서 탄생했다. 중남미 문학 속에는 타자와의 만남과 충돌, 그리고 변용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담겨 있다. 한마디로 중남미 대륙은 크다. 그곳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 온갖 다양성, 그리고 역사와 함께 인간사회에서 도출될 수 있는 모든 갈등과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풍토에서 나온 문학이라 스케일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중남미 문학이 지역주의에 함몰돼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 그런 독창성에 보편성이 덧붙여지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세계의 독자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중남미 문학은 현실과 상상력 사이에서 늘 부대끼고 고민하며 성장한 문학이다. 그런 특성이 독자들에게는 남다른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중남미 현대소설은 ‘붐(Boom)’이라는 단어를 수반한다. 그런 수식어가 붙은 것은 중남미 문학이 어느 순간 갑자기, 무언가가 터지듯 세계 문학의 중심에 우뚝 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중남미 문학이 세계 문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는 기존의 옛 모델을 파괴하고 새로운 실험정신을 추구한 작가들의 진지한 문학정신이 있었다. ‘붐’세대 작가들은 당시 영미·유럽의 모더니즘, 리얼리즘 문학에 과감히 도전해, 오로지 중남미만의 독특하고 주체적인 문학을 창안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과테말라의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보르헤스, 중남미 대륙의 현실과 환상을 문학 속에서 멋지게 용해한 쿠바의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이런 ‘붐’ 소설의 1세대 작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기존의 사실주의를 세계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낡고 케케묵은 것이라 비판하면서 그 미학을 부정했다. 이로써 그들은 서구의 아방가르드 문학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보르헤스는 조이스나 카프카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며, 아스투리아스나 카르펜티에르는 초현실주의와 선이 닿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한 것은 단순한 사조의 모방이나 답습이 아닌, 사실주의와의 단절을 통한 중남미의 새로운 비전 제시였다. 또 중남미 대륙의 언어로 그들만의 작품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마술과 환상, 인간을 꿰뚫다

    왼쪽부터 가르시아 마르케스, 보르헤스, 바르가스 요사

    이들의 노력과 문학적 비전은 후배 작가들에게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선배들이 이룩해놓은 문학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더욱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을 생산해냈다.

    그 두번째 그룹에 속하는 작가들로 아르헨티나의 에르네스토 사바토·코르타사르, 쿠바의 호세 레사마 리마, 멕시코의 후안 룰포 등이 있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한마디로 소설형식의 혁신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소설의 서술방식은 직선적인 것이 아닌, 복잡다단한 미로, 또는 순환의 형태로 나타난다.

    한편 본격적인 중남미 ‘붐’ 소설 작가로는 콜롬비아의 가르시아 마르케스,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 멕시코의 푸엔테스, 쿠바의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등이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이야기꾼’이다. 이야기 그 자체에 모든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작가에게 가장 큰 희열임을 역설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그들이 즐겨 쓴 수법이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다.

    어찌됐든 이런 ‘붐’ 소설은 전세계 문학계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큰 영향을 끼쳤다. 살만 루시디, 토니 모리슨, 움베르트 에코, 밀란 쿤데라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여러 유명 작가들이 그 직·간접적 수혜자다. 이들이 중남미의 ‘붐’ 소설, 특히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남미 소설은 이처럼 보르헤스를 필두로 가르시아 마르케스, 푸엔테스, 바르가스 요사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들은 낡은 리얼리즘을 배척하고 애매모호한 현실 그 자체에 대한 회의, 환상과 신화의 재발견, 새로운 패러다임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창조적 상상력 등으로 세계 문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렇듯 황금기를 구가하던 ‘붐’소설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그 기세가 꺾이고 만다. 출판시장의 위축과 역량 있는 신진작가 배출이 원활치 못한 것이 큰 원인이다. 쿠바 경제정책의 실패와 카스트로 정권의 독재화,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 등 혼란스런 정치상황도 중남미 문학에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이 됐다. 그래서일까, ‘붐’소설 이후 등장한 ‘포스트붐’ 세대의 소설들은 더 이상 진보와 혁명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내세우지 않으며 중남미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초연한 자세를 견지한다.

    ‘포스트붐’ 세대 작가들이 직면한 딜레마는 전세대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그를 딛고 일어서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새 세대의 젊은 작가들은 선배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대신 그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붐’ 작가들이 과도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으며, 작품이 너무 어려워 대중이 읽기 힘들고, 세계주의에 지나치게 함몰돼 중남미의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포스트 붐’세대의 화려한 등장

    그들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읽기 쉬운 소설, 즉 기존의 리얼리즘으로 회귀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르헤스류의 ‘환상문학’, 마르케스류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배척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칠레의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루이스 세풀베다, 아르헨티나의 루이사 발렌수웰라·멤포 지아르디넬리·마누에 푸익, 쿠바의 미겔 바르넷·레오나르도 파두라, 멕시코의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우루과이의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등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포스트붐’ 소설은 ‘붐’소설과 달리 언어적 실험성이 많이 희석되어 대체로 읽기 쉬우며, ‘붐’소설이 가지고 있던 이념성을 바탕으로 한 경향문학적 성격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또한 공통적으로 하드보일드 소설 형식을 자주 활용한다. 전통적으로 저급한 문학으로 취급되던 추리소설(하드보일드 소설)과 그로부터 파생한 서스펜스 소설에서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을 그릴 수 있는 도구를 발견한 것이다.

    마술과 환상, 인간을 꿰뚫다

    삼바 축제에 참가한 무희

    중남미 특유의 페미니즘 문학이 탄생한 것도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중남미는 식민시대 이래 남성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해온 가부장적 사회다. 1970년대, 국제적인 페미니즘 운동과 중남미의 정치적 해방운동이 맞물리면서, 중남미 여성작가들은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포착하고 주조한 현실의 이미지를 문학을 통해 제시하려 했다. 기존의 남성중심적 문학에 도전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성의 현존을 상징하는 부엌이란 장소와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의무이자 특권인 요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대표작이 로사리오 카스테야노의 단편 ‘요리강습’이다. 요리를 통해 이제껏 중남미 문학에서 금기시해온 성적 담론, 특히 여성의 시각으로 본 성적 표현을 음식의 후각과 미각에 빗댄 작품으로는 앙헬레스 마스트레타의 ‘페미니스트 요리’,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등이 있다.

    또 하나, 현재 중남미 많은 작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미니 픽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다.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이 짧은 픽션은 길이는 짧지만 고도의 문학성과 기법을 포함하고 있다.

    과테말라 작가인 아우구스토 몬테로소의 작품 ‘공룡’을 보자.

    “깨어나 보니 공룡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이 한 줄이 소설의 전문(全文)이다. 이 소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은 독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독자들의 참여가 요구되는 개방적이고 다의적인 픽션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잠에서 깨어난 자는 누구란 말인가, 공룡이 거기에 있다니, 왜? 또 거기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공룡이란 용어에 무슨 문학적 의미라도 있는 걸까…. 독자들은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내리면 그것이 곧 하나의 비평이나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이 짧은 텍스트의 뒷부분을 채우는 것은 독자의 몫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즐거움 또한 그들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미니 픽션은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열린 작품’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생경할지 모르지만 중남미 현대 작가들은 이 장르가 21세기 문학의 대표주자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이 장르는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신속성과 간편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다양성·민주주의·평등을 요구하는 새 세기에 적절히 어울린다. 또한 창의력의 원천이 되는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으며, 인터넷 세상에서 독자가 커서를 이동하지 않고 한 화면에서 단번에 작품 전체를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포스트붐’ 소설은 ‘붐’소설과 비교해, 대중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고급소설로 간주하던 ‘붐’소설의 모델을 파기한 것은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며, 그들 문학에서 보이는 대중적 요소들은 신속성과 즉물성을 선호하는 현대 대중에 다가가기 위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대담론이 빠지고 난 자리를 상업주의와 경박성이 채우는 우려할만한 현상도 동시에 존재하게 됐다.

    대가들이 사라진 자리에 복고 바람이

    그렇게 맞이한 1990년대의 중남미 문학은 어딘지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암과 싸우며 어쩌면 최후의 작품이 될 자서전 쓰기에 온 힘을 다 바치고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여전히 정열적이지만 벌써 75세가 된 푸엔테스, 최근 다시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바르가스 요사 등을 제외하면 한 시대를 풍미한 중남미 문학도 한풀 꺾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대가들이 사라진 자리를 너끈히 메울만한 후진이 아직 등장하지 못한 때문인가. 현재 중남미 독서계를 장악하고 있는 건 이제 고전이 된 시나 소설들이다. 한마디로 말해 복고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뜻이다.

    인세를 지불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여전히 출판계가 앞다투어 내는 책이다. 최근 칠레의 안드레스 베요 출판사도 이런 분위기에 가세했는데, 푸엔테스가 1962년에 쓴 중편소설 ‘아우라’가 다시 나와(푸엔테스가 가장 최근에 쓴 소설은 2000년에 나온 ‘이네스의 본능’이다)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판으로 찍혀 수백만 부 팔린 네루다의 초기작 ‘20개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는 계속 이름을 바꿔 출판돼 뭇 연인들을 사로잡고 있으며, 중남미 대륙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 할 수 있는 칠레의 마누엘 로하스의 ‘도둑의 자식’도 출판 50주년을 기념해 스페인에서 다시 출판됐다. 카르펜티에르가 생전에 쓴 원고들을 모아 내놓은 ‘이야기들’도 주목을 끌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무엇보다 중량감 있는 신작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다. 또 한가지,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복고성과 더불어 그 기법과 주제에 있어 환상성 혹은 신화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꿈의 이미지로 멕시코인의 사랑과 정체성을 표현한 푸엔테스의 ‘아우라’, 이네스라는 오페라 여가수를 중심에 두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두 가지 역사, 두 가지 시간, 두 가지 격정을 그려낸 ‘이네스의 본능’, 현란한 색채감과 글의 음악성,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활용해 중남미만의 독특한 역사·신화·주술을 엮어 낸 ‘이야기들’. 모두 중남미 특유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분명 1980년대 ‘포스트붐’ 세대 작가들은 리얼리즘 기법을 충실히 따르며 대중주의에 편승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물신화의 시대를 사는 대중은 여전히(어쩌면 당연하게도) 신화나 환상성을 선호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대를 관통해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개념인 ‘마술적 사실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그 대표작가인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통해 살펴보자.

    누구나 인정하듯 중남미 문학세계는 대단히 독창적이다. 독자들은 그 독창성에 매료되곤 한다. 그 독창성의 원천과 같은 것이 이미 우리에게도 친숙해진 용어인 ‘마술적 사실주의’다.

    중남미 문학에서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48년, 우슬라르 피에트리라는 비평가가 1930~40년대 사실주의 경향에서 이탈한 작품을 발표한 베네수엘라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이 용어를 적용하면서부터다. 이와 관련 피에트리는 “적당한 용어가 없어 부득불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마술적 사실주의와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카르펜티에르가 1940년대 중남미 현실을 설명하면서 명명한 ‘경이로운 중남미 현실’이라는 용어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카르펜티에르가 보기에 중남미는 기존의 ‘사실주의’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한마디로 놀랍고 경이로운 세계인 것이다. 여기서 ‘마술적 사실주의’ ‘경이로운 현실’ 그리고 ‘환상’이라는 용어의 이론적 차이를 들춰내려 한다면 그보다 무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마술적 사실주의란 신화적인 세계(좀더 범위를 좁히면 주술적 세계)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 카르펜티에르의 ‘경이로운 현실’ 또한 주술적·신화적 세계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현실세계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마콘도의 창건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죽었을 때 “소리 없이 밤새도록 내려 지붕을 덮고 문을 열 수 없을 만큼 집안에 쌓였으며, 바깥에서 잠자던 짐승들을 질식시킨” 노란 꽃비에 대한 묘사라든지, 초콜릿을 먹고 공중으로 부상하는 신부라든지, 4년 넘게 내리는 비라든지, 100세가 넘은 할머니가 흡사 번데기처럼 줄어든다든지 하는 등등. 여기서 다 언급할 순 없지만 이들은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이자 마르케스의 글쓰기나 사유세계의 주요 단서가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모든 것들이 작가 마르케스가 특별히 고안해내거나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기법이나 사유는 중남미 자연이나 문학적 풍토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래서 중남미 문학이나 예술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전통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간단히 말해 마술적 리얼리즘은,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현실 그대로 재현하며 문학적 왜곡을 피해 허위적인 것을 거부하는, 문학사전에서 정의하는 그런 리얼리즘이 아니라 마술적 또는 마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중남미 세계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리얼리즘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 믿을 수 있는 환상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몰아치면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급부상했다. 정치적·역사적 사건이나 현실에 기반을 두되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이 모호하고, 초자연적이며, 경이롭고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혼재하는 마술 같은 사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로 한국의 문학도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역시 현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배합한 작가로 불린다. 그는 현실을 픽션(허구), 환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반영하는 그의 작품들은 ‘환상적 사실주의’로 불린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는 둘 다 이성 혹은 합리성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보르헤스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를, 불교식 용어를 빌리자면 ‘공(空)’과 같은 환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환상은 역사성이 결여된 근거 없는 거짓말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엇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들은 흔히 말하는 독서의 재미를 주고 있지 않다. 형이상학적 사유의 재미를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통상 기대하는 소설 읽기의 재미는 찾기 어렵다.

    신화라는 용어가 그렇듯 마술(magic)이라는 용어에는 거짓말이고 꾸며내 만든 공상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마르케스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 것이 아니며 내가 일체(一體)된 그 결과로 알고 있는 현실을 찾아내기로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자연과의 동일화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그에게는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실’로 바뀌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리얼리즘에 대한 마르케스의 언명인 동시에, 메타포의 본질에 대한 훌륭한 설명인 것이다.

    마술과 환상, 인간을 꿰뚫다

    아즈테카의 신 중 하나인 ‘소치필리’상

    마르케스는 자기 소설에서 실제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백년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한 주인공은 마치 성자의 후광처럼 노란 나비들에 둘러싸여 다닌다. 마르케스가 어렸을 때 한 전기공이 공사를 하기 위해 여러 번 집에 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나비들이 몰려와 할머니를 성가시게 하자 그녀는 나비를 쫓으며 이렇게 말했단다. “저 사람이 올 때마다 노란 나비가 극성이란 말이야.”

    이 소설의 결말에는 ‘최후의 아이’가 돼지꼬리를 달고 등장한다. 마르케스는, 어떻게 하면 아이를 괴물처럼 그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 현실에선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돼지꼬리 달린 어린이’를 묘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소설이 유명해지자 중남미 여러 곳에서 돼지꼬리와 흡사한 것을 지니고 태어난 남녀들의 고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중 한 콜롬비아 청년은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난 내가 그런 꼬리를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소설을 읽은 후, 그리고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 또한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술은 나와 너,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의 끊어졌던 고리를 연결시킨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엄연히 이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이른 바 신화세계에서 말하는 화해와 동일성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마술적 사실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해리포터 신드롬이 중남미를 휩쓸고,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서 알 수 있듯 지금 그 대륙에서는 다시 환상소설, 사이언스 픽션, 추리소설 ‘붐’이 일고 있다. 그를 반영하듯 멕시코 유수의 출판사인 간디출판사 웹사이트에는 작년까지 없던 ‘역사소설’ ‘환상소설’ ‘추리소설’ ‘에로틱 소설’ ‘공포·서스펜스 소설’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배너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경박성과 상업주의를 넘어

    그러나 그 대다수의 책에서는 전시대 선배들이 고민했던 진지함이나 방대한 사유의 폭이 느껴지지 않는다. 길가 키오스크의 가판대나 슈퍼마켓 진열대의 싸구려 에로틱 소설처럼 소비자의 호주머니만 노리고 있을 뿐이다. 작가들의 작품이 한결같이 짧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다. 재미있는 일, 시간을 투자해야 할 일이 지천인데 누가 긴 소설을 읽겠는가. 중남미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거대담론이 사라진 여파일까? 아니면 새 패러다임에 따라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바람이 불어서일까? 한국 TV 드라마에서처럼 중남미에서도 역사물 붐이 일고 있다. 16세기 멕시코 아스텍 제국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를 재조명한 후안 미랄레스(멕시코)의 ‘에르난 코르테스 : 멕시코의 창건자’는 그러한 상업주의 출판의 대표적 예다.



    그러나 남미는 여전히 문화적인 면에서 역동적이고 희망적이다. 빈곤과 가난, 실업, 정치적 불안 등 산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풍부하고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왔다. 혼효(混淆)와 하이브리드, 끝없는 파괴와 창조, 다양성, 개방성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문학, 그리고 그 문학의 미래를 주시하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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