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공적인

보이는 것 그 너머

  • 글: 정주하 백제예술대 교수·사진학 / 사진가 chuha123@hanmail.net

    입력2003-01-22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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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공적인

    최초의 사진 발명가 중 한 명인 조제프 니에푸스가 찍은 작업실 창문 밖 건물의 지붕 모습(1827)

    사진은 생일이 있다. 그러니까 다른 예술 장르처럼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시기에 특정한 인물이 발명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진의 발명이 공표된 곳은 프랑스의 파리고, 날짜는 1839년 8월19일이다. 당시 하원의원이자 과학학술원 서기이며 파리 천문대 대장인 프랑수아 아라고의 추천으로, 의회에서 이날 자신의 발명품을 시연한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는 이것을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술)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다게레오타이프 사진은 지금의 사진과는 전혀 다르다. 복제도 할 수 없고 지지체도 종이가 아니라 금속이다. 뿐만 아니라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사진가는 커다란 암실을 지고 다니거나 마차에 싣고 다녀야 했으며, 확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사진의 사이즈에 맞추어 카메라를 새롭게 제작해야 했다. 이러한 방식의 다게레오타이프 사진은 사실 다게르 혼자만의 성과물이 아니다. 그의 동업자이자 아마추어 발명가인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푸스가 아니었다면, 다게르는 절대로 이 사진을 발명할 수 없었다.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사진

    당시 샬롱-쉬르-손이라는 조그만 시골에 살던 니에푸스는 사진을 발명하는 데 관심이 있던 다른 어떤 발명가보다도 이미지 정착에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방법을 몰라 불안했던 그는 대도시 파리에서 살고 있는 다게르가 비슷한 착상으로 사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병중에 있는 형 클로드를 만나러 가던 중 파리에서 다게르를 만난다. 그후 그들은 동업을 하기로 계약을 맺는다.

    그러나 발명이 진행되던 1833년 니에푸스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다게르가 사진 발명을 마무리한다. 지극한 성공이었다(니에푸스가 죽고난 뒤 동업권은 그의 아들 이시도르에게 계승되나 별다른 관심이 없던 그는 프랑스로부터 연금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게르에게 모든 것을 넘긴다. 니에푸스의 공이 지극히 큰 데도 당시의 사진술을 다게레오타이프라고 불렀다. 니-게레오 타이프가 아니라!).



    그러나 당시 사진 발명은 그 둘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는 오히려 지금의 사진과 더욱 유사한 사진(복제가 가능한)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으며, 브라질에 거주하던 에르퀼르 플로랑스도,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변호사이자 석판화 제작소의 소유주인 한스 퇴거 빈터도 유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재무성의 서기이던 이폴리트 바야르 또한 매우 독창적인 사진술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진의 발명이란 어느 시점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대적 요청’으로 보아야 옳다. 비록 발명품이기는 하지만 이 발명은 단지 어느 한 사람의 독특한 머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789년을 기점으로 하는 프랑스혁명과(계몽과 근대를 아우르고 있는 시점으로) 19세기 초반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혁명(인간이 적극적으로 기계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진행과정이 빚어낸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를 미술사적으로 본다면, 이제 재현의 문제가 단지 사물의 객관적인 묘사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취미 판단(1690년 존 로크의 오성론으로부터 시작돼 1790년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이르러 정리가 되는. 물론 이 취미 판단이 매우 개인적이 되는 문란함 때문에 공평무사한 취미 판단의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순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의 문제로 전환되던 시기에 사진이 탄생한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공적인

    최초의 사진 발명가 중 한 명인 자크 망데 다게르가 찍은 파리 풍경(1839·위)과 윌리엄 폭스 탈보트의 작품(1844)

    사진은 탄생하면서 그 표현의 지극한 명징성으로 수천년 동안 회화가 가지고 있던 ‘재생의 힘’을 일거에 무력화한다. 더 이상 사실적일 수 없는 사진은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따라갈 수 없는 힘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의 명징한 재현 능력 때문에, 당시 역사화가인 폴 들라로슈는 “이제 회화는 죽었다”고 외치며 침통해 마지않았다. 초상화를 그려 먹고 살던 당시의 많은 화가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사진이 예술로서 당시 회화와 견주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발명가와 화가가 결탁해 자신들의 생존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사진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적어도 발터 벤야민(1892∼1940)에게는 그렇다). 그러니까 사진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욱 인간적이고 천박한(고상한 예술의 입장에서 본다면) 태도로 이 세상에 만들어진 발명품이라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20세기를 여는 새로운 예술이 시작된다. 적어도 민주주의적인, 그리고 저변 수평적인 향유가 가능한 그런 의미를 가진 예술로서 말이다.

    이렇게 태어난 사진은 산업적인 우여곡절을 겪고 19세기 후반에 이른다. 여전히 사회와 예술로부터 멸시의 대상이 되던 사진이 급기야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회화가 구축해놓은 영역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애쓰는 시기다. 소위 픽토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이 조류는 몇 명의 위대한 사진가를 탄생시키면서 널리 퍼지게 된다. 이 픽토리얼리즘 시대의 사진은 말 그대로 회화풍을 따르는 작업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교훈적이고 윤리적인 계몽을 내용으로 하는 대규모 작업들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조차 사진가들이 맹목적으로 회화성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제시한 흐릿한 초점의 사진은, 오히려 인간의 눈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적인 시각의 좀더 과학적인 탐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원형으로 되어 있는 우리의 눈은 그 원형의 곡선으로 인해 어느 지점에 초점을 맞추면 바로 그 옆에 있는 지점에는 초점을 맞출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간단한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눈에 대한 ‘확연한 진실’은 이제 사진예술을 하는 사진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책을 앞에 놓고 한 글자에 초점을 맞추면 그 옆의 글자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진실한 재현을 깊게 생각하는 사진가일수록 이 초점이 흐린 사진에 깊게 매료됐던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공적인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하인리히 칠레(1890~1910), 오귀스트 아트제(1913),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삼등칸’·1907), 로라 길핀(1917)의 작품

    잘 알려진 것처럼 19세기 후반은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이 교차하는 시기다. 분자와 원자가 발견되고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비밀스러운 과학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사회를 견인하였던, 그리고 마침내 과도한 에너지의 사용을 경고하는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던 그런 시기였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모더니제이션(근대화)이라고 불리는 19세기를 지나면서 발전된 과학의 힘으로 인간은 엄청난 잉여생산물과 잉여노동력(식민지 확보를 통해)을 생산했다. 물론 대규모 살상이 가능한 전쟁도 치렀다.

    이러한 시기에 사진이 당시의 과학을 바탕으로 재현의 문제를 더욱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특히 예술의 문제가 이제 주관적인 태도로 바뀌어 작가의 창의적인 시각이 중요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천재의 문제가 새롭게 재인식되던 시기(18세기로부터 시작해 19세기까지 이어온)에 사진가들이 대단한 콤플렉스에 갇혀 당시의 예술적 분위기에 휘둘린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진은 이러한 콤플렉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를 맞는다. 우리가 사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대체적으로 초기와 근대를 구분 짓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인데, 픽토리얼리즘이라는 회화성의 사진이 진행되던 시기에 겹쳐, 그리고 회화와 문예를 중심으로 하는 시기구분으로는 모더니즘 시기와 겹쳐, 사진은 매우 사실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다시금 회귀한다. 포토리얼리즘 시대라고 불러야 옳을 이 시기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있으며, 대표적인 작가로는 프랑스의 장 으젠느 오귀스트 아트제(1857∼1927)와 미국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1946), 그리고 독일의 하인리히 칠레(1858∼1929)가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공적인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32), 아우구스트 잔더(‘페인트공’·1932), 도로시아 랭(‘이주자의 어머니’·1938)의 작품

    이 세 명의 작가를 대표로 하는 사진의 리얼리즘은, 회화사와 예술사에서 이야기하는 리얼리즘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즉 회화에서는 귀스타·쿠르베(1819∼77)를 중심으로 하는 리얼리즘이 이미 19세기 중반에 전통적인 회화의 대상과 표현의 의미를 사실적으로 전환시키고자 애썼고, 예술사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와 유럽 일부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 팝아트 이후에 다시 미술사 안에는 극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포토리얼리즘이 생성되었다.)

    그러니까 사진사 속에 위치하는 이 리얼리즘 운동은 사진이 탄생하고 50여 년이 흐르면서 매우 빠르게 기술적으로 발전하면서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자신이 가진 ‘표현 매체로서의 근본적인 가능성’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사진이해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세 명의 작가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자신들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가진 이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때론 신비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서로 전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직업적 입장을 가지고 있던 이 작가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도구를 통해 인간의 삶을 매우 여실하게 들여다보고 재현해놓기를 열망했다. 특히 독일의 하인리히 칠레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죽은 후 발견된 사진들을 보면 카메라를 가지고 그가 어떻게 인간의 삶에 파고들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 당시 그는 사진으로 예술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사진은 매우 빠르게 발전한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광학과 기계학의 급격한 발전으로 카메라의 부피가 작아지고 필름 감광시간이 줄어들면서 촬영 방법이 다양해졌다. 그동안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늘 무거운 카메라를 고정시킬 든든한 삼각대가 필요했다. 때문에 사진가의 시각은 당연히 고정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정적인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라이카로 대표되는 소형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사진의 내용은 매우 역동적이 된다.

    사진예술, ‘지적인 미국’에서 꽃을 피우다

    프랑스 태생의 사진가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러한 소형 카메라의 달인이다. 그는 매우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연극 무대처럼 표현한다. ‘결정적 셔터 찬스’라고 알려진 그의 사진 미학은 소형 카메라에 표준렌즈(50mm)를 장착하고 절대로 대상에 의식적인 개입을 하지 않으면서,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절묘한 순간성에 집착하였다. 그의 사진들에 나타난 재미(삶의 단면으로)는 이전의 사진들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그 재미가 다시 그의 사진을 폄훼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스냅이라고 일컬어지는 기법의 사진들이 가지는 가벼움이 사진 읽기를 재미로 그치게 하기도 한다는 뜻이다(그 시대에는 그것이 매우 중요했지만).

    같은 시대를 살던 아우구스트 잔더(1876∼1964)는 매우 다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쾰른에서 사진관을 하던 그는 ‘20세기의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을 직업별로 구분해 유형화한 후 그들의 초상사진을 찍는다. 언뜻 보면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사진들은,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의 ‘전모’를 전면에서 밝힐 수 있게 해준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증명의 기운’과 ‘보존의 기운’을 모두 잘 이용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아트제가 이러한 사진의 힘을 이용해 판매 원고로 사진을 제작했다면, 잔더는 그 힘을 시대의 증빙자료를 만드는 데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유형학적 사진(Typology Photo- graphy)이라는 장르로 유효하게 진행되는 잔더 부류의 사진은 사진이 어떻게 인류를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본보기다.

    유럽에서 시작한 사진은 유럽에 국한하지 않고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중에서도 미국은 사진을 가장 열렬하게 받아들인 나라다. 19세기말까지 별 독특한 문화를 갖지 못했던 신생국 미국은 남북전쟁을 사진으로 기록할 정도로 그 받아들임이 활발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농업안정국 산하에 사진가들을 고용해 자신의 뉴딜정책을 실현하는 밑거름으로 삼기도 하였다. 미국은 이처럼 사진을 사회의 공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매체로 사용한 것뿐만 아니라, 사진이 예술로 가장 강력하게 안착된 나라이기도 하다. 이미 유럽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가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사태를 맞는다. 독일의 바우하우스가 학교로는 대표적이고, 미국으로 이주한 예술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러한 고급 두뇌들의 유입으로 미국은 점차 매우 지적인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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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커 에번스의 ‘지하철 승객’(1959·왼쪽)과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연작 중 한 편(1956)

    이러한 시기에 워커 에번스가 있다. 그는 당시 이미 사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실험적인 작업을 다 마쳤다. 작은 카메라로 지하철에서 승객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담고 11×14 카메라로 풍경사진을 찍기도 하는 등 그가 사용한 방법과 접근 태도는 거의 ‘전(Pan)’ 사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 미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준 시인 휘트먼의 관점으로 노동자와 저변층의 미국인들을 카메라에 담은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은 세계 예술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예술을 통한 인류의 구원에 관심이 있는 모더니스트들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예술에 대한 극심한 혐오를 경험한다. 1910년부터 1930년대까지 러시아혁명을 중심으로 매우 격렬하게 인류의 삶에 파고들었던 아방가르디안들은 기존의 예술로는 절대로 인류의 삶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과거의 모던한 예술로부터 더욱 천박하고 천한 대중성을 예술의 중심으로 전환하려 노력한다.

    지금 우리가 팝아트라고 부르는 이 예술 장르는 당시까지 진행되던 예술관으로 본다면 매우 혁명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예술을 보여주는 도구가 간판쟁이들이나 쓰던 실크스크린으로 대치된다든지, 예술의 소재가 싸구려 창녀와 같은 이미지의 영화배우(마릴린 먼로 같은)가 되는 것을 어떻게 같은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참아냈는지 모르겠다. 물론 지금이야 매우 익숙한 기법과 대상들이지만,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와 ‘고답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을 당시 예술가들의 눈에는 이 팝 예술이 천박하고 쓰레기 같았을 것이 분명하다. 잘 넘어오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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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른트 &힐라 베셔의 ‘휴텐베르크 루어 지방’(1970)

    이제 사진도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소위 현대사진이 시작된 것이다. 스위스 취리히 출신인 로버트 프랭크는 1946년에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가 시인 잭 케루악의 도움으로 구겐하임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1956년부터 1957년까지 1년 동안, 아내인 마리아와 아들 파블로, 그리고 막내딸 안드레아와 함께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여행하면서 작업한 사진이 그 유명한 ‘미국인들’이다. 사진의 근대성을 버리고 주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 이 사진들은, 당시 상승일로의 미국산업이 낳은 국민들의 우울과 무력함을 잘 대변하고 있다. 사진적으로 선배인 워커 에번스의 스타일을 잇고 있는 로버트 프랭크는 이 사진을 끝으로 사진에서 영화로 매체를 바꾼다(그는 그 이유를 사진으로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사진 속에서의 기호 읽기와 주관적 태도로 기호를 생성시키는 작업태도는, 이후 세계적으로 사진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 이전까지 사진의 역할은 기록과 사실성의 재현에 성실하게 묶여 있었다. 위대한 사진가 카르티에 브레송도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가 그러한 것처럼, 사실을 보고 네모난 파인더 안에 그 사실을 사실적으로 (잽싸게) 가둔 공은 있으나, 그 파인더의 공간에서 선택한 대상들을 원하는 대로 재배치해 자신이 해석한 의미로 전환시키지는 못했다.

    때문에 아름답고 절묘하기는 하지만, 그의 사진을 통해 깊은 감정의 전이를 느끼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의 사진은 다르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대상과 상황에 개입했던 감정을 그대로 전한다. 그의 감정이 대상을 선택한 의도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와 같은 감정의 선 위에 설 것을 제시하며 살그머니 껴안는다. 이러한 감정이입의 가능성은 그가 매우 세심하게 대상의 의미를 읽고 해석해 그것을 어떻게 사진으로 옮겨야 바르게 감정이 전달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훈련한 결과다. 그러니까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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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낸 골딘의 ‘뉴욕 모텔에서 낸과 디키’(1980),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루어지방’(1989), 신디 셔먼의 ‘무제 #17’

    이 로버트 프랭크의 등장으로 사진의 재현이 주관적인 태도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마치 18세기에 미학이 변환된 것처럼) 사진이 더 이상 사진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즉 사진이 전시되고 소통되는 장이, 사진계에 묶여 있던 것을 예술계 전체로 확산하는 지각 변동이 생긴 것이다. 사진의 역사가 그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다가 이제 예술계 전체에서 나름의 입장을 갖고 그것이 다른 장르와 다를 것이 없는 그런 처우를 받게 되기에 이른다.

    가장 큰 변화로는 사진 가격의 엄청난 폭등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전시된 적이 있는 독일사진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사진 가격은 60만∼70만달러다(에디션은 6매다). 이는 사진이 사진으로서 이해되기보다는 과거의 회화처럼 예술로서 소비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진의 예술계 진입은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준다. 태어난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태어난 곳에서조차 싸구려라는 냉대를 받던 사진이(특히 시인 보들레르가 심하게 사진을 경멸했다) 이제 예술의 최전방에서 소비를 주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보통 예술의 역사를 가르면서, 최근의 사조라 할 수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작을 1970년대로 본다(꼭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건축에서 시작한 이 새로운 사조는, 사진으로 최고의 꽃을 피운다. 1978년이 되자 1970년대까지의 사진과는 전혀 다른 작업들이 등장한다. 신디 셔먼과 낸 골딘 등이 작업한 사진들은 무엇보다도 매우 사적인 문제를 제시한다. 이중 신디 셔먼은 자신이 등장인물이 되는 셀프 포트레이트를 주로 작업했는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도록 분장을 하고 촬영했다. 때문에 그녀의 작업을 보면 우리가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느낌을 받으나 자세히 보면 다 가짜다. 매우 익숙하나 전혀 낯선 사진을 통해 셔먼은 우리에게 이것과 저것,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허물라고 요구한다.

    예술보다 더 전투적인 예술

    작가의 ‘자기 반영적 태도’는 낸 골딘에 이르러 더욱 심화된다. ‘성적 억압의 발라드’라는 제목의 초기 작업에서 그녀는 자신과 주변 친구들의 일상적 삶으로 보는 이들을 초대한다. 적나라한 성적 발현과 다시 그 성적 공간에 함몰돼 있는 젊은 미국인들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작업은 그래서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작업에서도 신디 셔먼의 경우와 같이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이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80년대를 아우르는 이 새로운 경향의 작업들에 나타난 자화상은 단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자기 반영성을 확립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신이 구현된 것이다.

    이 신디 셔먼이나 낸 골딘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모던한 사진들은 로버트 프랭크 이후 현대 미국의 사진계를 주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으로 사진의 뉴욕 집결을 이루어낸다. 가장 큰 사진시장인, 그리고 사진과 예술의 합일에 성공한 뉴욕은 그래서 지금 사진천국으로 불린다. 이러한 보스턴 스쿨 작가들과 함께 뉴욕의 사진계를 지배한 또 하나의 이념은 아우구스트 잔더의 맥을 잇는 타이폴로지 사진들이다.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대학 교수였던 베셔 부부와 그의 제자들이 이룬 이 타이폴로지 사진들은 극도의 객관성을 갖고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절개한다. 대형 카메라와 컬러, 그리고 섬세한 디테일이 특징인 이 사진들은 이제 ‘사진세계 속의 사진’이라기보다는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여타의 미술방식과 다르지 않은 예술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예술보다 더욱 전투적인 예술이 돼버린 것이다.



    사진과 예술을 묶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일이다. 특히 사진의 역사가 사회 속에서 아직 잘 회자되지 못하는 것을 전제한다면, 단지 예술사의 관점으로만 보아도 안 되고, 그렇다고 같은 평면인 회화사 차원으로만 봐서도 안 된다. 너무도 인간적인 매체이고, 인공성이 뛰어난 이 사진은 이제 새로운 세기에 가장 예술적인 것으로 이해돼야 마땅하다. 누가 규정해놓았든 예술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이 인공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일, 이것이 예술일진대, 인간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공적이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중에서도 사진이야말로 인공적으로 탄생해 인공적인 자양분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며 인간의 문제와 함께 변화하니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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