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최초의 현대식 극장 ‘원각사’(위)와 신파극의 주 무대였던 ‘동양극장’
1.3 왜 극장이 필요한가? 밝은 곳이 일터라면 어두운 극장은 놀고 꿈꾸는 곳이다. 일하는 공간이 효용을 얻기 위해 조건에 억압당하는 곳이라면, 놀고 꿈꾸는 공간은 효용이 아닌 무용(無用), 억압이 아닌 즐거움을 낳는 곳이다. 극장에는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상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밝은 곳에서 소통하는 언어와 어두운 곳에서 소통하는 언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밝은 곳에서의 걸음걸이가 직립보행이라면, 어두운 곳에서의 그것은 몸을 뒤틀고, 뒹굴고, 기고, 뛰고, 날고 하는 짓이다. 당연히 극장에는 후자의 몸짓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1.4 연극의 장(場)인 극장과 교육의 장인 교실을 비교해보는 것도 연극의 특성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극장에 오는 걸음걸이와 학교로 가는 걸음걸이는 같지 않다. 연극이 비틀거리는 발걸음이라면, 교육은 반듯한 걸음걸이를 요구한다. 뒤틀림으로 즐거움을 선사하려는 것이 연극이라면, 교육은 학생들을 현실에 뿌리내리게 하는 직선적 통로다. 연극이 옷을 벗어 헐벗은 몸을 빛내는 일이라면, 교육은 옷을 입어 몸을 가리는 일과 같다. 교육이 포상과 훈장으로 존재의 상처를 가린다면, 연극이 있는 극장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상처를 드러내 있는 그대로 비춘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처가 꽃이 되는’(정진규, ‘몸시’ 55) 바로 그것이다.
학교라는 제도에 입문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좌측통행’ ‘앞으로 나란히’ 같은 말들일 것이다. 교육이 있는 교실은 학생들에게 먼저, 모든 사물을 고정된 것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사물에 고정된 이름이 있다는 것, 고정된 쓰임새가 있다는 것, 사물은 고정된 자리에 놓여야 한다는 것. 이렇듯 교육과 교실은 사물에 이름과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대물림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문화적이다. 아니, 문화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교육과 교실이 문화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한 단선적인 길이라면, 극장은 자연적인 것으로 우회하기 위한 깊고 넓은 공간이다. 사유하고 꿈꾸며, 그것들을 드러내는 곳, 그곳이 바로 극장 공간이다.
1.5 사유하고 꿈꾼다는 면에서 극장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허락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가 극장에게 이 같은 기능을 부여했다고도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장이 이와 같은 기능을 얻어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극장에서의 꿈과 극장 바깥에서의 윤리는 서로 감시한다. 사회는 부여하면서 극장을 감시하고 극장은 얻어내면서 사회를 반성케 한다. 극장 안의 꿈은 사회를 감시해서 반성하게 하고, 극장 밖의 윤리는 극장 안의 꿈을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극장에서 교육을 하면 교육받는 대다수는 졸기 마련이다. 꿈꾸는 장소에서 교육이란 듣는 이의 몸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든다. 고개를 떨군 채 잠을 청할 수밖에 없다. 극장에서 행해지는 예비군 혹은 민방위 교육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