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보이는 것 그 너머

  • 글: 강 혁 경성대 교수·건축도시학 hkang@ks.ac.kr

    입력2003-01-22 17: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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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한국의 전통 집짓기에는 ‘건축가’가 없다. 경복궁 전경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축’이란 단어를 짚어보자. 건축(建築)이라는 한자말이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건축은 영어 ‘architecture’의 번역어인데, 일본인들이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사정은 문화·공간·시간·과학·미술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이 서구 문물을 수입하면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조어들이다. 이제 그 말들은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뿌리 내려, 기원은 잊혀진 채 늘상 쓰는 일상어가 돼버렸다. 그런데 건축이란 단어가 근세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전까지 우리에게는 건축이란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얼른 납득 가지 않는 대목이다. 우리에게는 분명 조상이 남긴 찬란한 건축문화유산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에겐 우리 식의 집짓기 전통이 있었고 그것을 영조(營造), 혹은 조영(造營)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집짓기라는 점에서는 동일할 지 몰라도 분명 건축이 아니었다.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전통이 우리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게 그거 아니냐고 따지고 든다면 아니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한 예를 들면, 오늘날 걸작으로 꼽히는 종묘나 무량수전을 지은 건축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건물을 지은 목수나 대목(大木)은 있었으되 건축가는 없었다. 우리에겐 작가로서의 건축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적인 건축의 체제, 혹은 전통 안에서라야 비로소 건축물은 작품이 되고 그것을 만든 이는 예술적 재능을 지닌 건축가로 인정받는 것이다.

    건축이라는 한자 조어도 아주 잘된 번역 같지는 않다. 건(建)과 축(築)은 말 그대로 ‘짓는다’는 뜻인데, 그런 뜻의 영어로는 따로 ‘building’이 있다. 명사이기도 하고 동명사이기도 한 ‘빌딩’은 짓는 일, 그리고 그것의 결과물인 건물을 말한다. 그렇다면 ‘architecture’는 무슨 뜻일까. 그것은 라틴어에 연원을 두고 있는데 ‘archi’는 근본, 혹은 으뜸이라는 뜻이고 ‘tecture’의 ‘tec’은(제작의) 기예, 혹은 기술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건축(architecture)은 으뜸가는 기예, 혹은 근본이 되는 제작술이라는 뜻이 된다. 또 건축가(architect)에는 우두머리, 대장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에서 건축이 하나의 의미심장한 술(術·technique)로서 고급한 문화 혹은 예술에 속해 있었으며 건축가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인물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서구에서는 건축(architecture)과 건물(building)을 구분해 사용해온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자의 차이에 대해서는 “링컨 성당은 건축이고 자전거 창고는 건물이다”라는 유명한 언명이 있다. 풀어 말하자면 ‘건축’은 조형적이고 기념비적이며 예술적 질과 가치를 지닌 특별한 건물을 칭하는 것이고, ‘건물’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지어진 평범한 집을 가리킨다. 사실 건축과 건물은 그렇게 똑 부러지게 갈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관습적으로 건축을 건물로부터 분리하여 보고자 했으며 건축을 특권화해 거기에 독특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건물’과 ‘건축’은 어떻게 다른가



    그래서 건축은 서구에서 조형예술의 범주에 속한다. 미술사 책이 회화, 조각과 더불어 건축을 다루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여기에 비해 조선에서의 건축은 공조(工曹)에 속했다. 여기에 두 문화권 사이의 근본적인 시각 차가 있다. 서구의 건축도 근대에 이르러 공학, 곧 근대 기술(technology)의 영향권에 있게 되면서 예술로서의 성격과 기술로서의 성격이 대등한 것으로 변화하지만, 예술에 더 가치를 두고 그것을 건축가 개인의 창조력의 산물로 보려는 입장은 오늘까지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적 근대사회에서 건축가는 국가로부터 자격을 부여받아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는 전문가가 되었으며, 건축물은 법에 의해 규제되고 관리되는 대상이 되었다. 건축의 제도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사건은 공공 권력이 건축을 자기 지배/보호의 영역으로 편입시켰음을 뜻한다. 여기서 근대 건축의 독특한 두 측면이 드러난다. 건축은 창조적인 예술 행위로 인정받으면서 한편으로 의료나 법률과 같이 지식과 경험을 갖추어야 제공할 수 있는 전문 서비스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집짓기를 건축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서구식 제도이자 시스템, 그리고 인식으로서의 건축을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뜻한다. 서구적 형태와 공간을 지닌 집을 새로운 재료와 축조술을 구사해 짓게 됐고, 그 일을 전담하는 건축가라는 직능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근대화라 부르는 역사적 과정의 일부로 이루어졌으며, 그 자체가 서구문명의 수용이자 새로운 삶의 방식의 도입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100년 조금 넘는 기간에 우리의 생활환경은 급진적인 변화를 경험하였으며 수천년 동안 계승되어온 목조의 건립 방식은 고고학적 유산으로 잔존하게 되었다.

    우리가 서양 건축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부터다. 선교, 외교, 교육을 목적으로 이 땅에는 이국풍의 건축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오늘 우리가 모던하다고 일컫는 그런 형태가 아니라 근세 건축, 혹은 양식 건축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키 낮은 초가집과 기와집밖에 없던 한양에,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고딕식 교회의 탑들과 견고하고 당당한 르네상스 혹은 신고전의 석조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 조선 민중이 받았을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명동 성당이라든가 정동의 영국성공회 교회가 그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의 근대 건축 수업은 식민지 경험을 통해 값비싸게 이루어졌다. 한일합방은 주체적인 근대화의 기회를 박탈했다. 일제로부터 그들이 이해하고 소화한 서구의 근대식 건축을 전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식민지 시절에 진행된 물적 토대의 변화와 사회체제의 변화는 근대적 건립과 거주, 그리고 근대 도시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행정기관, 은행, 학교, 병원, 백화점, 호텔, 사무소, 철도역, 공장, 창고 등과 같은 전에 없던 건물 유형이 도입되었다. 신공법의 시행과 건설의 조직화 및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한양(경성)은 커다란 구조적 변화를 경험하였으며 부산, 인천, 군산 같은 도시가 일제에 의해 새로 조성되었다. 이제 한국인은 과거와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게 됐다. 이른바 근대적 삶, 혹은 근대성의 체험이었다.

    조선총동부 건축은 왜 최고여야 했나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철거되기 전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식민 잔재로 지탄받아 철거된 조선총독부나 이제 문화재로 지정된 한국은행·서울역 같은 건물은 일제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것들이다. 조선총독부 건축에는 역량의 한계를 느껴 독일인 건축가의 손을 빌리기도 했다. 일본 본토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대작을 건립한 의도는 명백하다. 조선의 정궁을 가로막는 거대한 서구식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근대화된 일본의 선진성을 조선 민족에게 보여주고 문화와 기술력에서도 진정 일제가 우월하다는 것, 그래서 식민 통치가 정당하다는 것을 설득하려 한 것이다. 이미 당시 서구 건축은 선진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까지도 동일한 코드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인은 최초의 근대식 건축 교육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경성고공을 비롯한 한반도의 건축 학교가 기술 위주의 교육을 펼쳤음을 알아야 한다. 반면 일본의 건축 대학 중에는 건축가 양성을 목표로 하는 곳도 있었다. 일본인은 자의식을 가진 건축가를 양성하되 조선인은 단순한 건설 기술자로 키우려 했던 것이다.

    또 하나, 일본은 서구 건축을 수용하여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었다. 그 사건은 서구식 건축을 그대로 수용하는 일의 한계와 변용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그들은 구조적 안전성을 강조하는 교육 체제, 혹은 디자인과 공학이 공존하는 독특한 일본식 교육 체제를 만들어냈다. 그 체제가 지진과 무관한 한반도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그것이 오늘까지도 한국의 건축학과가 공학과라는 이름을 달고 공대에 있는 큰 이유다.

    일제 시기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가 등장한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길룡(1898~1943)은 경성공전을 졸업한 최초의 한인이다. 그는 사무실을 열고 일련의 수작을 선보였다. 한국인 자본가 박흥식이 건축주인 화신백화점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최초의 한국인 건축가와 한국인 자본가의 합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화신백화점은 보존했어야 한다). 경성제국대학 본부(현 문예진흥원)도 박길룡의 작품이다. 경성고공 건축과 출신의 시인 이상(김혜경)은 건축 현장에 근무하기도 했고, 자신이 설계한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모던한 시는 그가 받은 근대식 건축 교육과 깊은 연관이 있다. 시각성이 돋보이고 기하학이 동원되곤 하는 그의 시는 종이 위에 펼쳐진 가상의 집짓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래의 집짓기 법칙 대신 서구식 축조법과 건축 언어로 근대식 건축을 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모던 건축은 아니었다. 개화, 외세, 서양, 권위를 상징하는 그 양풍 건축은 고전적 양식을 응용한 복고적인 것이었다. 건축에서의 모더니즘,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근대 건축은 19세기말~20세기초 유럽에서 진행된 건축의 문화혁명에서 비롯한다. 일제가 그것을 수입한 것이 1920년대 중후반이고, 1930년대에는 한반도에도 철근 콘크리트조의 모던한 건축물들이 다수 선보이게 됐다. 그리고 20세기 내내, 우리 건축문화는 이 모더니즘 건축의 지배를 받게 됐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의 모던 건축 수용이 근대주의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내면화에 의한 것이 아닌, 근대화 과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역사적 필연성, 사회적 도시적 필요에 의한 수용이 아니라 선진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결과다. 이에 따라 우선적으로 수입한 것이 그 모던한 형태와 그를 위한 기술·공법이다.

    사실 당시 사람들에게 모던 건축의 바탕에 깔린 사고와 이념, 그 사회·문화적 배경은 몹시 낯선 것이었다. 서구의 모던 건축이 성숙한 자본주의와 기술, 도시를 온상삼아 태어났다면, 우리의 그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근대를 성취하고 근대적인 삶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로부터 시작됐다. 이러한 전도는 건축에서 근대성의 내용을, 이념과 가치로서보다 건설의 합리화, 그리고 개발을 통한 발전이란 측면에서 추구하게 한 큰 이유가 됐다. 한마디로 건축의 문화적 측면에 대한 이해가 대폭 축소된 채 수용되었다는 뜻이다.

    유럽 중심부에서 아주 짧은 기간에 태동해 두 번의 세계대전 후 전세계로 퍼져나간 모던 건축, 혹은 건축의 모더니즘은 20세기 지구촌의 도시와 건축을 구성한 원리 및 방법, 그리고 실천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더니스트라 불리는 건축가들에 의해 주도된 문화운동으로, 오래되고 낡아빠진 건축의 관행과 어법을 부정하고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건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모던 건축의 생성에는 근대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등장한 거대한 변화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민혁명, 과학혁명, 산업혁명이 가져온 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세계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도시화와 환경 문제, 노동계급의 발생과 주택난, 기계에 의한 사물의 대량생산과 분업화, 교통과 통신이 가져온 시공간 감각의 변화, 시민 대중사회의 성장. 그것은 새로운 삶의 체험이고 문화적 가능성이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엄청난 역기능과 사회적 모순들을 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서구를 지배해온 고전적인 건축의 전통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건축의 내부에도 심각한 문화적 위기가 야기됐다. 동시대의 건축이 근대적 생산방식과 기술, 재료를 수용하여 환경과 사회문제에 적절히 대처하고 근대에 합당한 표현 형식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즉 건축을 통해 삶의 공간을 재편성하고, 근대인의 생활방식을 주조하며, 새로운 문화적 가치와 이념을 드러낼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많은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시도와 실험, 그리고 실천에 전념했다. 르 코르뷔제, 미스 반 데어 로에, 그로피우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이 그 중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독일에 세워진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건축가를 양성해냈고 근대 디자인 교육 체제의 모태가 되었다.

    근대 모던 건축은 대개 건축의 합리적 생산방식, 콘크리트·철·유리 등 신재료의 구사와 그것의 진솔한 사용, 장식을 배제한 단순하고 추상적인 형태, 기계 미학, 역동적이고 투명한 공간,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 등과 같은 내용들로 규정된다.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띤 모던 건축은 1930년에 이르면 보편적이고 동일한 성격을 가지면서 한 방향으로 수렴되는데, 이를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인근 유럽, 그리고 남미와 일본 등 여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세계대전은 모던 건축에 커다란 시련을 주었다. 특히 나치는 모더니즘을 탄압하여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미국에서 국제양식이 꽃 피고 미국의 부와 힘을 앞세워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2차 대전 후 폐허의 복구와 재건은 근대 건축, 그것도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를 내세우는 국제양식을 기초로 진행되었다. 비서구의 개발과 도시 건설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본토에서와 달리 여타 지역에서 근대 건축은 양식과 방법으로 이해되고 수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해방과 6·25전쟁 후, 국가 건설이 지상과제이던 한국에서도 근대 건축은 동일하게 받아들여졌다. 해방 이후 미군정, 그리고 건국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건축문화는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차적으로는 건립의 방식이었고 이차적으론 근대화의 표징이었다.

    해방 공간의 혼돈과 곧이어 일어난 분단은 ‘한반도의 남북조 시대’를 불러왔다. 근대 건축 또한 근본적으로 동일함에도 남북한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상이한 가치를 드러내었다. 남한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도시와 생활 세계를 만들어가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재화이자 부동산이고 상품이었다. 한편 북한에서 그것은 인민에게 평등한 삶을 제공하기 위한 도구이며 이념을 드러내는 프로파간다였다. 소련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건축이 북한의 국가적 공공 건축에 채택되었는데, 전체주의적 색채가 강한 고전적인 것이었다. 인민의 건축이 왕정시대의 억압적 형식을 취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훗날 주체 건축을 한다면서 북한은 전통 건축을 공공의 표현양식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광복과 건국, 그리고 6·25전쟁으로 인한 처참한 파괴 후 폐허에서 시작된 한국 근대 건축은 취약한 물적 토대와 저급한 건설 기술, 빈약한 재료, 빈곤한 실무 경험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토의 재건과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삶터를 마련하는 데 모든 노력이 경주되었다. 피란민 등으로 갑자기 불어난 도시 인구를 수용할 주거공간이 절대 부족했고 달동네, 혹은 산동네라 불리는 불량 주거지가 생겨난 것도 이때부터다. 일제 때 한국과 일본에서 교육받은 소수의 한국인 건축가가 실무와 교육을 담당했고, 건축가와 건설 기술인을 양성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에 볼 만한 건축물의 생산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근본적으로 모던 건축은 공업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콘크리트·철·유리 같은 근대적인 신재료를 사용해 표준화·규격화·조립화라는 합리적 방법을 통해 대량생산을 꾀하고 보편적이며 단순 명료한 미학적 표현을 추구했다. 그렇다고 재료와 공법이 한정되고 물적 생산기반이 없던 당시 한국의 여건에서 그것이 꼭 적합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한편 건축가들은, 외관으로나마 세계적 추세인 국제양식을 따르고자 했다. 그 건립은 수공업적인 방식이었으되 선진사회의 건축문화를 이상으로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내부에 담긴 사고와 미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결여되어 있었다. 어쨌든 단순하고 추상적인 상자 형태와 격자형 벽면은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에서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 측면이 있었고, 조형의 가능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우남회관(시민회관), 신신백화점, 명보극장, 국제극장, YMCA, USOM청사(현 미대사관), 서울농대, 성모병원, 혜화동 성당, 장충체육관 같은 건물들이 이 시기에 설계되거나 지어진 대표적 건축물들이다. 거의가 전쟁 피해가 다소 복구된 1957년 이후 건립되었으며, 대개 콘크리트 구조였으나 철과 유리를 이용해 조잡하나마 커튼 월(단순히 칸막이 구실만 할 뿐 하중을 지지하지 않는 바깥벽)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김태식, 이천승, 정인국, 김희춘, 이희태, 강명구, 배기형 같은 건축가들이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1957년, 건축가들은 한국건축가협회를 설립하는 데 이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의식을 지닌 작가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또 하나,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형식이 처음 선보이게 된 것도 1950년대다. 저층의 공동 주거 건물이 1950년대 후반 서울 몇 곳에 실험적으로 지어지는데 이 것이 한국 아파트 역사의 시발이다.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김중업의 주한 블란서 대사관. 한국 현대 건축의 가장 탁월한 성과물 중 하나로 꼽힌다.

    1961년 5·16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출범은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거대한 변화가 한국을 진정한 근대, 혹은 현대로 이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건축의 변모와 발전이 그 바탕에서 이루어졌음을 부인하긴 힘들다. 제3·4공화국은 경제성장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정부 주도의 계획 경제, 수출 주도형 경제를 강력히 추진했다. 5차에 걸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가져왔다. 이 시기에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으나 근대화의 모순들도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 1965년 월남 파병, 1973년의 에너지 파동은 사회적·경제적으로 역사적인 변곡점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1970)은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축소시키면서 개발에 따른 국토 공간의 대변혁을 예시했다. 인구 급증에 따라 대도시들은 기형적으로 팽창했으며 심각한 도시문제를 발생시켰다. 울산 같은 공업 도시가 생겨난 것도 이때다. 대도시의 주택난은 집합 주거 형태인 아파트의 건설을 촉진시켰고 와우아파트 붕괴와 광주대단지 폭동 같은 사건을 유발하기도 했다. 농촌의 새마을 운동은 수천년 동안 내려온 주거와 마을의 풍경을 순식간에 바꾸어버렸다. 대형 공공사업이 벌어져 워커힐 건설, 여의도 개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건립, 한국종합무역박람회 개최 같은 프로젝트들이 진행됐다.

    1962년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의 발효, 1963년 건축사법의 제정은 국가 권력이 법과 제도로 도시 공간과 건축을 규제하고 관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경제개발의 가시적 성과가 보이는 1960년대 후반쯤이면 건설 물량이 확대되고 볼만한 건축물들이 도시 가로를 수놓게 된다.

    그러므로 박정희 시대라 일컬어지는 1960~70년대는 한국인이 왜곡된 형태로나마 근대성을 본격적으로 체험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경제성장과 사회변화는 도시 문화가 자라날 바탕을 제공했다. 한국 건축은 그 생산과 소비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국면으로 진입했다. 무엇보다 건축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위한 기술적 발전이 요청되었다. 근대적 감수성과 미의식, 문화적 정체성과 한국성의 추구, 작가의식과 개성의 표출 같은 근대성의 발현이 발견되는 것도 이 시기다.

    우리는 당시 두 사람의 걸출한 건축가의 등장과 활약을 목격하게 된다. 김중업(1922~88)과 김수근(1931~86)이다. 김중업은 세계적인 거장 코르뷔제 밑에서 건축 수업을 받고 1956년 귀국해 사무실을 연다. 그는 낭만적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작가로서 드물게 강한 자의식을 표출한 인물이다. 부산대 본관, 서강대 본관 등 1950년대 후반에 이미 몇몇 우수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이 시기에 주한 프랑스대사관, 주한 이탈리아대사관, 제주대 본관, 삼일빌딩 등 일련의 역작을 선보인다.

    그 중에서도 1962년 완공된 주한 프랑스대사관은 김중업의 최대 걸작으로 꼽힐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한국 현대건축이 낳은 가장 탁월한 건축물 중 하나로 간주된다. 근대 콘크리트의 조소적 특성을 한국 전통건축과 창조적으로 결합시켰다는 것말고도, 경사진 대지의 탁월한 이용, 건물들의 교묘한 배치, 아름다운 지붕선 등은 이 건물의 미덕으로 꼽힌다. 당시 최고 높이를 자랑한 삼일빌딩은 국제양식에 충실히 따른 것이면서도 당시로선 드물게 세련된 커튼 월의 감각과 우아한 비례미로 한국 오피스 건축사에 남는 수작이 되었다.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나란히 붙어 서있는 김수근의 ‘공간’ 구사옥(왼쪽)과 제자 장세양의 신사옥

    김수근은 일본 동경예대에서 공부하고 박춘명 등과 함께 응모한 국회의사당(1960) 현상설계에 일등으로 당선하면서 귀국한다. 그후 자신의 설계사무소인 공간사를 개설하고 잡지 ‘공간’을 창간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 5·16으로 국회의사당 설계는 무산됐지만 그는 당시 군사 정부와 손잡고 워커힐 개발에 참여했으며 자유센터(1953) 설계도 맡았다. 워커힐 힐탑 바, 타워호텔, 오양빌딩, KIST 본관, 문화방송국, 한국일보사 등 1960년대의 작업들은 철근 콘크리트의 조소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으로 동시대의 세계 사조 및 일본 현대 건축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지어진 서울대 예술관, 동숭동 문예회관, 마산 성당, 경동교회 등에서 그는 작가적 변신을 보인다. 대개 벽돌을 사용하면서 한국적 조형미와 공간감을 추구한 것이다. ‘공간’ 사옥(1977)은 그의 작품 중 백미로 꼽히며 인간적인 스케일에 미로처럼 변화무쌍한 공간으로 주목받았다.

    한국 근대 건축의 두 거장이라 할 김중업과 김수근의 작업이 소중한 것은 작품의 수월성뿐 아니라 근대의 보편적 건축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한국적인 표현을 추구하였다는 점에 있다. 모더니즘 안에서 지역성을 탐색하려는 경향은 근대 건축이 성숙하면서 국제적으로 일반화되었는데 한국도 그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당시 한국 근대 건축은 국제양식의 보편성에 충실하려는 경향과 지역성을 모색하는 경향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희태의 복자기념성당(1967)과 국립극장(1973), 정인국의 수운회관(1970), 엄덕문의 세종문화회관(1978) 등에서 우리는 지역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작가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부산 구덕체육관(이광노), 어린이회관(이광노), 대한교육연합회관(이광노), 유네스코회관(김정수), 조흥은행 본점(이천승 등), 한전 별관(강명구·정인국), 군종회관(김석재) 등도 1960년대의 주요 작품이다.

    1970년대, 재벌 사옥과 대형 호텔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김수근의 마산 양덕 성당

    김수근의 부여박물관을 둘러싼 왜색 시비나 강봉진이 당선된 국립박물관 설계 경기(1966)에서 관에 의한 전통양식의 강요에 대한 반발은 당시 한국 건축이 근대와 전통, 국제와 지역 사이에 갈등하며, 비서구가 근대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봉착하게 마련인 정체성 문제에 부딪혔음을 의미한다. 다만 그것이 성숙한 실천적 성과로 열매 맺지 못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관변 건축이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어갔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에 대한 고민은 자발성과 타율이 교차하였던 것이다.

    1970대에 들어서 유류파동 같은 시련을 겪지만 한국경제는 10%대의 경의적인 성장률을 경험하며 도약단계에 진입한다. 이 시기 건설이 국부에 차지하는 비율이나 중동 건설붐이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를 고려할 때, 개발시대의 절정이라 부를 만하다. 이러한 변화가 건축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노출 콘크리트에서 벗어나 조립식 패널(PC)과 커튼 월이 일반적이 되고 자재와 건설의 규격화·표준화·공장 생산이 본격화되었다. 건물의 규모가 대형화하고 삼성의 동방빌딩이나 대우그룹의 대우빌딩 같은 재벌들의 사옥이 건립되었다. 일본 자본과 일본 건축가들의 참여로 플라자호텔, 신라호텔, 하야트호텔, 롯데호텔이 들어선 것도 이때다.

    해외 유학파와 실무자들이 귀국하여 국내 건축술을 한 단계 높이는가 하면 대형 사업 발주와 물량 확대는 ‘정림’ ‘원도시’ ‘종합’ ‘공간’ 같은 대형 설계조직 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주었다. 근대 건축에 있어 또 한 사람의 거장인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제자인 김종성이 귀국해 동성빌딩, 효성빌딩, 힐튼호텔 등의 설계에 참여하며 한국 오피스 디자인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음도 기록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세워진 건물 중 공주박물관(이희태), 서울의대병원(이광노), 한국방송공사(박춘명), 연대도서관(김정수), 연대루스채플(김석재), 서울대도서관(이승우), 서울가든호텔(황일인), 제주민속박물관(김홍식), 출판문화회관(홍순인) 등이 주목할 만하다.

    1980년대는 박정희 시대에서 1990년대 개방 시대로 가는 이행기 혹은 과도기로 볼 수 있다. 군사 독재의 닫힌 사회와 경제 규모의 팽창, 민주화의 욕구 사이에서 일어난 파열음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재벌 기업의 확장과 무역수지 흑자는 부동산 투기와 건설 붐을 일으켰다. 주택 가격 상승과 주택난은 계속되는 신시가지와 신도시 건설이라는 대증 요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1980년대는 재벌 기업의 사세를 과시하는 대형 고층 사무소 건립이 두드러졌으며 이때 지어진 63빌딩(박춘명)은 아직도 한국 최고의 오피스 건물로 남아있다. 서울에서 강남의 시대가 열린 것도 1980년대다. 강남의 아파트촌은 도시 중산층의 출현과 대중 소비집단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올림픽을 위한 스포츠 콤플렉스, 무역센터(KOEX), 대형 호텔, 백화점, 레저시설이 건립되는 등 급속한 강남 개발이 이루어졌다.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조성룡의 아시안 게임 선수촌. 요즘의 고층·고밀도 아파트와는 다른 여유와 배치의 변화가 느껴진다.

    박정희 시대와 차별화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은 문화예술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예술의 전당, 국립국악당, 현대미술관, 독립기념관 같은 시설이다. 그것들은 문화공간에 적합한 자유로움 대신 여전히 국가 권력에 봉사하는 상징 조작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제5공화국 정부는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유치했고, 국제 행사에 걸맞는 도시 미관을 조성하기 위해 간선도로 정비, 도심 재개발 등을 추진했다. 용적률 완화와 고도 제한을 해제하여 도시의 고밀 고층화가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오늘 서울 도심과 강남의 스카이라인, 가로의 대강이 형성되었다. 국가 행사가 도시 발전을 위한 계기로 작용하기보다 국가 이벤트를 위해 도시의 모든 것을 맞춰나가는 방식은 아직도 그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1980년대 한국 건축계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로 한참 시끄러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구미에서 탈근대 담론은 건축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대표적 비평가인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는 모더니즘 건축의 실패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제안했다. 근대 건축의 시행이 낳은 현대 도시와 공간의 획일성·비인간화를 비판하고, 인간을 위한 풍요로운 환경을 위해서는 건축에서의 다양성과 전통을 용인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탈근대 건축론은 건축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통찰이 결여된 형태 위주의 논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다.

    한국 건축계가 1980년대에 서구의 탈근대 담론을 답습한 것은 우리 건축문화의 식민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태였다. 왜냐하면 서구인들이 비판하는 근대가 낳은 역기능을 삶 속에서 절실하게 느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까지 최소한의 근대적 합리성조차 성취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우리의 도시 문제는 근대성 자체가 안고 있는 본질적 한계와 관련된 것이기보다 근대화의 부작용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우리의 현실 맥락과 무관하게 선진문화의 사조라는 이유로 수입된 혐의가 짙다.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거의 전적으로 양식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 단조롭고 무표정한 상자곽 건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운동 정도로 - 일종의 유행이자 취향으로 받아들여졌다.

    여하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1980년대 한국 현대 건축에 주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것은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상업 건축의 요구와 잘 맞아떨어졌다. 압구정동이나 동숭동 같은 가로변에는 시각적 충격 효과를 유발하는 포스트모던 건축물들이 마구 들어섰다. 모던 건축의 엄격함에 비해 포스트모던 건축은 역사적인 모티프들을 자유롭고 유희적인 방식으로 인용했고 신기성·다양성·장식성을 특징으로 했다. 근대가 중점적 가치를 둔 공간과 기능, 구조 대신 외관을 중시하기에 중소형 상업 건물 건축에 특히 유용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시설들이 탈근대의 표정과 제스처로 독자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한국의 포스트모던 건축은 곧 몇 가지 수법으로 정형화한 모습을 띠게 되며 일종의 포장술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민간 상업 부문에서만 맹위를 떨친 게 아니다. 1982년 독립기념관의 현상 설계가 있었는데 거대한 한옥 지붕을 얹은 김기웅의 것이 당선안으로 선정됐다. 역사적 상징의 인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그것은 근대에선 금기시되던 수법이다. 이후 전주시청사(김기웅), 국립국악당(김원) 등 공공 건축에서도 내부 기능과 분리된 외피로 전통의 복식을 입히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것은 1960년대 전통 논쟁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고 민족주의와 외래 이론의 결합이라는 이상한 조합이었다. 심지어 예술의 전당 설계에서도 갓과 부채라는 민속적 소품이 그 형식적 정당화를 위해 거론되었다.

    오히려 1980년대에 주목할 사실은 건축 기술의 축적과 대형 고층 건축물의 건립 붐, 해외 건축가들의 국내 진출이다. 이 시기의 대형 건축들은 포스트모던하기보다 오히려 후기 모던적(Late modern)인 성격을 보였다. 구조적 합리성 위에 기술적 진보와 세련된 외관을 추구하는 이 수법은 대규모의 공간에 적합하였으며 그 온건함과 보수성으로 말미암아 자본이나 권력이 수긍할만한 조형이었다. 철골과 대형 판유리, 조립식 패널 등 공업화된 재료 사용이 일상화했고 다양한 조형적 시도는 1990년대의 오피스 르네상스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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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의 갤러리 빙. 뒷편에 자리잡은 하이야트 호텔을 의식해 설계한 까닭에 작은 규모임에도 그 존재감이 당당히 드러난다.

    해외, 특히 미국 저명 건축가의 대형 프로젝트가 두드러진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시자 펠리가 광화문의 교보 빌딩을, SOM이 럭키 트윈타워를, CRS가 구 국제그룹 사옥을 지었고, 웰튼 베켓사가 삼성그룹 본관 및 중앙일보사를 지었다. 일본의 니켄 세케이는 국내 유수 건축사와 합작으로 무역센터를 세웠다. 1980년대는 또한 은행 본점들의 건축 붐이 일었던 시기이기도 해서, 외환은행 본점(정림건축), 한일은행 본점(원도시건축), 제일은행 본점(원도시건축), 중소기업은행 본점(김중업), 수출입은행 본점(정림건축), 한국은행 본점(원정수·지순) 등이 국내 유수 건축가 집단에 의해 건실한 조형으로 지어졌다.

    어찌 보면 1980년대 건축문화는 88올림픽과 86아시안 게임을 대비하고 수렴하는 성격을 지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종합경기장과 체조경기장(김수근), 역도경기장(김종성)을 위시한 체육시설들이 잠실에 지어졌다. 국가 행사를 대비해 고층 건축물 건설이 장려됐고 많은 대형 호텔들이 지어졌다. 힐튼호텔(김종성), 스위스그랜드호텔(WBTL+서울건축), 라마다르네상스호텔(공간), 인터콘티넨탈호텔(김병현)이 건립됐으며, 서울투자금융(이상수+선진엔지니어링), 두산빌딩(우일건축), 안국화재빌딩(정림건축), 무역센터 사무동(니켄 세케이) 등 주목할만한 고층 오피스가 세워졌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조성룡)와 올림픽선수촌 아파트(우규승)는 그 배치와 공간에서 참신한 아파트 주거 형식을 제시한 점에 의의가 있으나 이윤 추구 위주의 한국 아파트 건축에서 예외적인 현상으로 남았다. 집합주거 분야는 한국 현대 건축에서 가장 소외되고 후진적인 부문이다.

    과천미술관은 재미 건축가 김태수의 작품으로 부지가 과천으로 무리하게 선정되었으나 전통 성곽의 모티프를 이용하여 자연 경관 속에 건물을 앉히고 내부 전시공간을 교묘하게 배치한 우수한 작품이라 하겠다. 서초동에 자리잡은 예술의전당 역시 건립 당시에는 위치가 문제되었으나 수도권의 팽창으로 현재 별 무리 없이 사용되고 있다. 한 장소에 각종 시설을 집중시킨다는 발상은 결코 문화적이라고 할 수 없다. 원안의 큰 변경으로 설계 의도가 훼손된 점은 있으나 콘서트홀이나 오페라하우스는 한국에서 본격적인 전용 문화공간으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육사도서관(김종성), 정릉수녀원 성당(김영섭), 한강 성당(김원), 갤러리 빙(김원), 두손갤러리(김석철), 단대 퇴계기념도서관(김정식), IBC(김중업), 계성원(김태수), 충북대 인문관(홍순인) 등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고 1989년 사회주의권 몰락을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는 서서히 후기 근대적 상황으로 진입한다. 문민시대를 거쳐 국민의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미흡하나마 개방사회로 이행하는 등 다원적 가치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더불어 후기 자본주의적 모습을 띠면서 대중 소비사회로 진입이 가속화됐다. 세계화·정보화·영상화의 거센 바람은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로 이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변화는 1990년대 이래 문화의 시대, 욕망의 시대, 대중의 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1997년 IMF 관리체제나 2002월드컵의 붉은 악마 현상은 이런 시대 상황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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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엘 비숄리의 종로타워.해외 건축가의 국내 작업은 더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시장이 막강한 권력으로 등장했고 일상·여가·향유가 주요 화두가 됐다. 상업주의와 소비문화가 삶 깊숙이 침투하면서 생활환경은 이미지와 매체, 기호들로 가득 차게 됐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의 장소적 안정성은 희박해지고 그 대신 이질성과 혼돈이 주 특성이 되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도시에서 유목이 정주를 대체하며 삶의 새 양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가용의 보편화, PC 보급과 인터넷 상용화, 이동통신의 일상화, 신용카드의 소지 같은 신변 변화로부터 케이블 TV, 위성방송, 디지털방송, DVD 등 신종 매체의 등장과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변화, 거대 할인매장, 대형 쇼핑몰, 복합영상관, 고층 고밀도 아파트, 주상복합, 원룸하우스, PC방,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업소들의 출현까지. 도시 공간의 변모를 열거해보면 지난 십여 년간 우리 사회가 얼마나 격심한 변화를 겪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 현대 건축이 보여주는 풍경은 겉보기엔 제법 화려하다. 전 시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건축 물량이 증가했고 수준 높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건설 기술상의 큰 발전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사이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에 심대한 변화가 있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건축이 문화로 인식되고 이미지로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건축물을 심미적 대상으로 보고 공간을 욕망하고 향유하는 일이 보편적 현상이 된 것이다. OECD 가입과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의 필연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건축이 후기 산업사회의 문화산업으로 포획되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이는 실내 건축이라 불리는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건축이 일종의 패션 같은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건축은 대중과 소원한 영역이 아니다. TV의 러브하우스 같은 프로그램은 건축계에서 생소한 인사를 스타 건축가로 탄생시켰다. 영화나 TV 연속극, 혹은 광고에서도 건축가는 빈번히 등장한다. 건축가는 갑자기 문화 엘리트가 되었고, 삶의 공간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장식하는 전문가로 간주되고 있다. 이제 건축 공간은 더 이상 공동체의 삶의 양식을 제안하고 꼴 짓는 인프라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이미지이자 소통 대상이 되는 정보이며, 거래되고 소비되는 기호이자, 계급을 구별짓고 신분을 표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건축물의 사물적 측면이 아니라 그것의 상품 미학적 측면이다. 그래서 오늘의 건축은 점점 가벼워지고 표층적이 되고 있다. 청담동 명품거리에서도, 한국의 맨해튼이라는 테헤란로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변화는 건축가들에게 당혹스럽기도 하고 때로 새로운 도전으로 비치기도 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건축가에게 대담한 디자인상의 실험을 허용하고 작가적 역량을 펼칠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도시 곳곳에서 신기하고 특이한 건물들이 경쟁하듯 솟아오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래 전 건축 본래의 진정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근대 이래 암묵적으로 받아 들인 가치들이 점점 낡은 것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 시대 가장 첨단을 걷는 건축들이 대개 상업 건축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 편승하든 저항하든 건축가는 집을 지어야 한다.

    또 하나, 이 시대 건축에서의 큰 변화는 전산화와 영상문화의 영향이다. 그것은 디자인의 생산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전산과 정보기술은 전에 없이 새로운 형태와 공간을 산출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의 여파는 건축에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그것이 가져다줄 ‘용감한 신세계’가 우리 도시와 생활공간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지난 10여 년간 한국 현대 건축에 일어난 변화는, 과거 30~40년 간의 그것에 못지않은 것이다. 건축가가 인기 직종이 됐고 전에 없는 호황을 구가했는가 하면, 외환위기 이후에는 불경기와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기도 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등의 사고는 우리 건축의 근대성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월드컵, 부산아시안게임, 대전엑스포, 아셈 총회 등 대규모 국가 이벤트에 건축이 동원됐고 그 소기의 역할을 감당했다. 인천신공항 건설, 경부고속철도 역사 건설, 국립박물관 건립 등 국책사업에 따른 거대 건조물의 건립은 새로운 기회와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다. 최근 대도시에 세워지고 있는 초고층 건물, 대형 복합건물, 컨벤션센터, 문화공간들은 그 양과 질, 기술에 있어 이제 웬만한 건축물은 별 어려움 없이 완성할 수 있을 만큼 국내 건축계의 역량이 축적되었음을 입증한다. 일부 건축물들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다. 그러나 아직 세계적 수준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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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승효상의 ‘웰콤’사옥

    1990년 이후 한국 현대 건축에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주도적 이념이나 사조의 부재 가운데 다원적 가치와 개성의 발현이 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규정하자면 모던으로 회귀라고나 할까. 이는 성찰적 탐색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순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서구의 해체주의 건축은 주로 담론으로 거론될 뿐 일부를 제외하곤 실제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해외 조류에 초연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 해야 할 것이다. 정보와 지식, 인력의 왕래가 그만큼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공공시설과 상당수의 민간 프로젝트들이 설계 경기를 통해 작품과 건축가를 선발하고 있다. 아마 한국처럼 설계 경기가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공정한 시합을 통해 최선의 작품을 선발한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가장 나은 작품을 선택하는 방편인지, 실험적 시도들을 수용해 이 땅의 건축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가장 중요한 국가적 시설들은 대개 무난하고 보수적이며 회화적인 디자인이 선발되고 있다. 어느새 설계 경기는 ‘차이의 게임’이 되고 있다.

    1990년대 건축문화와 관련해 가장 주목할 일은 건축가의 저변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3세대, 4세대에 해당하는 중견·신인들의 등장과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1960, 70년대의 두 거장, 1980년대 소수의 대표적 건축가에 의해 주도되던 것과는 판이한 상황이다. 물론 4.3그룹 출신과 같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 그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출신·성향의 건축가들이 저마다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한국에서 공부하고 경력을 쌓은 국내파가 있는가 하면, 해외 유학과 실무를 경험한 상당수의 해외파도 있다. 이들은 1980년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고 방식과 감성을 드러내고 있다. 다수 신세대 건축가의 출현은 유학 붐, 그리고 1990년대 프로젝트의 급증과 맞물려 있다. 역량 있는 신인 건축가들의 출현은 계속될 전망이다.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우규승의 환기미술관. 지형·건축·전시공간의 조화가 훌륭하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해외 건축가들의 빈번한 국내 작업이다. 개방 시대에 건축문화의 국제적 교류는 당연한 일이다. 일부 한국 건축가들도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세계적인 대가들의 상당수가 한국에서 작업 기회를 가졌다. 그들의 능력이 ‘브랜드’를 중시하는 자본의 욕구와 맞아 떨어진 결과이겠다. 1980년대에 이어 김태수·우규승·손학식·이따미 준과 같은 해외 거주 한국인 건축가들도 국내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유걸·김병현·최두남처럼 아예 귀국해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대형 건축 사무실들 또한 불경기 속에서도 선전했다.

    1999년은 건축문화의 해였다. 그러나 외환위기의 충격 때문인지 문화로서 건축의 위상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는 미흡했다고 생각된다. 2002년에는 건축가 승효상이 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대대적인 전시회를 가졌다. 건축과 문화의 만남이 점차 활발해지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많은 건축가들이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 만나 생산적인 대화와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1990~2002년을 대표할 작품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만큼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중 포스코 사옥(POS-AC·간삼), 환기미술관(우규승), 바른손센터(이종호·양남철), 수졸당, 웰콤센터(승효상), ‘공간’ 신사옥(장세양), 제주월드컵경기장(황일인), 상암경기장(류춘수), 파주어유지동산(조병수), 밀알학교(유걸), 의재미술관(조성룡·김종규), 선유도 공원(조성룡), 아산 신도리코공장 및 기숙사와 문태고등학교(민현식), 김옥길기념관(김인철), 삼청동주택·삼곡천주교회(김영섭), 포도호텔(이따미 준) 등은 주목에 값하는 작품들이다.



    한국 현대 건축은 신자유주의·지구화·정보화의 험한 파고 속에서 자기 변혁과 갱신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 땅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희망의 집짓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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