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는 노대통령에게 반대하는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어쨌든 민의(民意)를 대변하는 기관이다. 이러한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이 고영구(高泳耉·66)씨와 서동만(徐東晩·47)씨를 국정원장과 국정원 기조실장에 임명하려 했을 때 반대했다. 야당은 물론이고 일부 여당 의원들도 반대의 목소리를 냈는데, 노대통령은 두 사람의 임명을 감행했다.
여기서 ‘눈 밝은’ 사람들은 서동구(徐東九·66) KBS 사장 해임과 비교하며 “이상하다”고 지적한다. 서동구씨는 노무현 후보의 언론특보를 지낸 사람으로 노무현 정부 출범 후 KBS 사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KBS 노조가 서씨의 KBS 사장 취임에 반대했다. 노조의 반대가 거세지자 노무현 정부는 슬그머니 서씨로부터 사표를 받고 대신 정연주(鄭淵珠·57)씨를 추천해 후임 사장에 임명했다.
여기서 ‘눈 밝은’ 사람들은 “노대통령은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가 반대하는 사람은 ‘기어코’ 임명하고, 노조가 반대하는 사람은 해임했다. 왜 노대통령은 국회의 결정은 외면하고 노조의 의견은 수용하는가? 민주주의 원칙에서 본다면 노대통령은 참으로 이상한 결정을 내렸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 사정에 보다 밝은 소식통들은 이러한 의견을 배제했다. 이들은 “서동구 사장과 고영구 원장 건을 바로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러한 비난 속에는 고원장이 갖고 있는 진보성향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지금 국정원은 손댈 곳이 너무 많은 조직이다. 국정원에는 ‘고통스런’ 개혁을 거부하려는 세력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부지불식간에 고원장 체제에 반대하는 의견을 전파하고 있다. 고원장이 국정원장으로 적절한지는 그가 국정원을 어떻게 개혁하는지 지켜본 후 판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고영구 국정원 체제가 출범한 것은 지난 5월1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 이상이 지나자 신중한 의견을 내놓았던 이들은 “고영구 체제에서 국정원 개혁은 기대하기 힘들다. 고영구 원장은 진보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국정원을 개혁하지 않는 쪽으로 타협한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국정원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기에, 이들이 고영구 시대의 국정원 개혁은 물 건너갔다고 말하는 것일까.
기자는 익명을 전제로 국정원 사정에 밝은 전문가를 만나 국정원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취재하였다. 이러한 취재에서 나온 것 중에서 공통된 것을 추려 정리한다. 그러나 국정원은 최고의 국가 정보기관인 만큼 기밀을 요하는 것은 상세히 밝히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대통령府, 섀도 캐비닛
국가정보원은 2차장(朴丁三)이 이끄는 국내파트와, 1차장(廉燉載)이 지휘하는 해외파트, 그리고 3차장(金保鉉)을 사령탑으로 하는 대북파트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이 세 개 파트를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기조실(실장·서동만)이 있다. 먼저 국내를 무대로 활동하는 국내파트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국정원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국정원 국내파트를 ‘대통령부(府)’나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으로 표현한다. 대통령부라고 하는 것은 국정원법 제2조가 국정원을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규정한 데서 나왔다.
청와대는 모든 행정부처를 지휘하는 최고 기관이지만 ‘머리’만 집중돼 있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줄 ‘발’이 없다. 물론 청와대가 요청하면 행정부처는 성심성의껏 지시사항을 이행한다. 그러나 이들은 원하는 시간 내에 지시 사항을 마무리짓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청와대가 궁금해하는 것에는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많다. 그런데 행정부처를 통해 지시하면 대개 ‘업무 협조전’을 만들어야 하므로 기밀 유지가 되지 않는다. 청와대가 듣고 싶은 것은 반대의 목소리인데, 행정부처 공무원들은 ‘예스맨’ 기질이 강해 제대로 민심을 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동원하는 것이 국정원 국내파트다. 국정원 국내파트는 행정·사법·입법의 모든 국가기관에 정보관을 출입시키고 있다. 대기업체와 대형 병원·언론사 등 주요 기관에도 출입시킨다. 지방에는 광역 시·도 단위로 지부가 있어 지방 사정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더구나 국정원은 일반 행정은 집행하지 않으므로 각 기관이 하는 일에 이해(利害) 관계가 걸려 있지 않다. 그러니 비교적 객관적인 자리에서 보고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