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가을’에서 근대를 추억하는 일은 당연히 우리가 언제, 어떻게 근대에 살게 됐는지를 성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의 근대에 대한 추억은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쓰라린 기억을 동반하기 때문에 말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오랫동안 근대를 도달해야 할 목표라고만 믿었기 때문에 근대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경험을 근대로 이야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의 가을’에 이르러 근대의 빛과 그림자의 전모가 드러남으로써, 근대의 병리학이니 근대의 패러독스와 같은 말이 등장하면서 근대의 신화는 깨졌다. 지향해야 할 삶의 목표였던 근대가 삶의 문제로 인식되면서, 정상적 근대와 비정상적 근대, 또는 근대는 문명이고 전근대는 야만이라는 이분법은 의미를 상실했다. 가장 근대적인 전쟁이 가장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역설을 두 번이나 경험한 인류는 문명과 야만은 모순이 아니라 근대라는 동전의 양면임을 깨달았다. 근대 자체가 일그러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근대가 일그러진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를 ‘식민지 근대’라고 지칭하는 것의 터부(Taboo)도 이제는 깨졌다.
‘중국계’에서 ‘서양계’로 우주관이 전환된 근대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의 근저 ‘일그러진 근대-100년 전 영국이 평가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푸른역사)은 첨예한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우리와 일본의 근대성을 성찰하는 책이다.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보지 못하는 인간은 성찰을 하기 위해 거울이 필요하다. 자기의 거울은 타자(他者)이고 타자의 거울은 자기다.
역사를 자기 나라의 이야기로만 보는 ‘국사’는 타자라는 거울을 보지 않는 역사학이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 서양사와 동양사를 전공하는 역사가들의 임무는 타자로서의 서양과 동양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역사를 비추어보는 일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서양사학자와 동양사학자는 미국사, 영국사, 프랑스사, 독일사 그리고 중국사와 일본사라는 자신의 전공분야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박교수가 여타의 서양사학자와 다른 것은 전공인 영국사를 공부하면서도 관심을 내내 우리 역사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박교수는 “우리가 서양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양과 우리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들을 반면교사로서 잘 활용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나를 잘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비교사의 관점이 필요하다. 비교사란 자기의 역사를 타자의 역사에 비추어보고, 또 타자의 역사를 자기의 역사에서 바라보는 역사학의 ‘거울놀이’다.
일반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과거 청산’이다. 과거사에서 한쪽이 채무자라면 다른 쪽은 채권자가 된다. 역사가 한국과 일본 둘 사이의 관계로만 이루어진다면, 이런 식의 과거 정리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종래의 한국사 연구자는 일반적으로 이런 식으로 우리의 근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박지향 교수는 영국이라는 제3자의 시선을 따라 우리와 일본을 견주어보는 비교사의 시각을 열어놓음으로써, ‘과거 청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일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틀을 제시했다.
영국이라는 제3자의 시선의 주안점은 근대였다. 100년 전 우리와 일본의 공통된 화두는 근대화, 곧 근대라는 역사적 시간으로의 진입이었다. 우리와 일본에 있어 근대란 세계의 중심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바뀌는 시기였다. 중국이라는 태양을 도는 ‘중국계’에서 서양이라는 새로운 태양을 향하는 ‘서양계’로 우주가 바뀌는 대전환기였던 것이다. 영국은 이런 ‘서양계’의 중심 중의 중심에 서 있던 나라였다.
박교수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이나 ‘과거 청산’ 논쟁에 직접 관여하는 대신에 우리와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시점인 100년 전에 영국이라는 서양 근대의 모범생이 우리와 일본의 근대성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우리와 일본의 근대의 계보를 추적했다.
영국 근대를 모범으로 삼았던 일본인이 일본 근대의 영국적 기원을 말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인이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을 말하는 것은 비난받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이 두 차이는 어디서 비롯했는가? 뒤따라오는 자는 앞서간 자를 모방하고 추종하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은 영국의 근대를 번역했다. 일본은 ‘제2의 영국’이 되고자 했다. 그 꿈은 영·일동맹을 통해 실현됐다. 19세기의 ‘찬란한 고립’에서 벗어나 유럽에 힘을 집중시키고자 했던 영국은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에게 동아시아의 경찰권을 넘겨주고, 결과적으로는 일본이 한국을 합방하는 것을 승인했다.
‘서양계’의 태양이 영국이라면 일본은 지구에 해당하고 한국은 그 주위를 도는 달과 같은 위성에 불과하다. 그래서 영국인이 보기에 ‘영원히 클 수 없는 어린아이’인 한국인이 ‘제2의 영국인’인 일본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1928년 한국에 와 2년간 경성제국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영국 소설가 드레이크는 이런 영국인의 생각을 전형적으로 대변했다. “어떤 민족이 강압적으로 통치받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내부에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멸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 조선이 악의 무고한 희생자들이라고 심약하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도 20세기 후반에 전개된 역사는 드레이크의 이런 발언이 망언이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주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한국은 멸망하지 않고 부활하여 번영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에 의해 심심치 않게 재생산되고 있는 드레이크식 망언 문제는 어떻게 극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일본인들이 망언을 할 때마다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한국민족과 일본민족 사이의 역사 충돌이란 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문제는 망언이라는 도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구조다. 궁극적으로 그 구조가 근대를 일그러진 거울로 만들었던 것이다.
근대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박지향 교수 책의 최대 장점은 영국이라는 서구 중심의 시각을 매개로 해서 그 구조가 오리엔탈리즘임을 밝힌 데 있다. 이것은 역사를 민족이라는 주체가 근대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서술했던 종래의 민족주의 역사학이 보지 못했던 부분이다. 역사를 ‘국사’로 환원하는 민족주의 역사학은 자기와 타자,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에 의거해서 전자가 후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만들어낸 ‘일그러진 근대’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근대란 서양을 세계로 하고 ‘그 나머지’ 세계를 타자화하는 거울이었다. 서양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했고, 그러한 역할을 할 타자가 없을 때는 타자를 만들어내는 일도 불사했다. 이러한 근대의 계속은 문명의 충돌을 초래하고, 그 궁극적인 결과는 인류 역사의 파국이 될 것이다. 이런 역사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자아를 주체로 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타자화하는 데카르트적 근대의 인식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가 근대의 오리엔탈리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박지향 교수는 다음과 같은 처방을 결론으로 제시했다.
“우리 모두는 곡해와 왜곡의 거울을 깨는 작업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와 타자의 모순되고 불안정하며 상호의존적 관계에 주목하면서, 우리 모두는 ‘서로에 의해 전염되어 있고 행복하게 혼합되어 있는 존재들’이라는 의식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서로 다른 문명들이 만나는 곳은 쌍방의 접촉지대로, 충돌과 대결이 아닌 더불어 사는 통문화(transculture)지대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