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빈 라덴의 ‘聖戰’ vs 부시의 ‘테러전쟁’ 제2막

동남아 조직과 손잡고 생화학무기, ‘더러운 폭탄’으로 美 공격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3-06-25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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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미 지하드(聖戰)의 전투조직 알 카에다의 활동은 휴화산 같다.
    • 언제 어디서 폭탄테러가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2700만달러의 현상금이 걸린 지하드닷컴(jihad.com) 회장 오사마 빈 라덴은 여전히 잠행중이다.
    • ‘테러와의 전쟁’에서 부시는 언제쯤 승리를 선언할 수 있을까.
    빈 라덴의 ‘聖戰’ vs 부시의 ‘테러전쟁’ 제2막
    9·11테러 사건이 발생한 지 거의 2년이 되어간다. 21세기 글로벌 정치지형을 변화시켰다고 평가받는 이 사건의 주역 오사마 빈 라덴은 여전히 잠행중이다. 지난해 11월, 그리고 올해 2월 두 차례에 걸쳐 빈 라덴은 대미(對美) 항쟁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녹음 테이프에 담아 카타르의 위성방송 알 자지라를 통해 내보내기도 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 테이프를 분석한 결과, 빈 라덴이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빈 라덴은 살아 있다

    미국의 엄청난 물량 공세에도 빈 라덴의 대미 항쟁조직 알 카에다(우리말로는 ‘기지’ 또는 ‘근거지’)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지난 5월12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미국인 8명 포함, 35명 피살), 나흘 뒤인 5월16일 모로코 휴양도시 카사블랑카에서 잇따라 터진 폭탄테러(41명 피살)는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존재를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냈다.

    그 무렵 빈 라덴의 측근이자 알 카에다의 2인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이집트 의사 출신)는 아랍 TV에 공개된 녹음 테이프를 통해 “여러분의 형제들인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은 적들을 뒤쫓고 있으며, 그들을 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앞으로 며칠 안에 여러분의 다친 마음을 치유해줄 좋은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고 말했고 곧 사실로 드러났다.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는 지구촌 사람들의 반전 논리 가운데 하나는 “이라크전쟁이 중동지역의 안정보다는 반미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지역 불안을 높이고, 알 카에다를 비롯한 과격 이슬람 집단의 대미 지하드에 불을 지필 것”이란 우울한 전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현실은 그런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 현상금 2700만달러를 내걸고 잡으려 안달하는 빈 라덴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현재 미 정보당국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벌이는 공작의 초점은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핵심 간부 검거에 모아진다. 이들이 숨어 있으리라 추정되는 곳은 아프간-파키스탄 접경지대 마을들이다. 특히 발루치스탄 지역 산간마을 일대는 지난날 탈레반 정권의 지지기반이었던 아프간 파슈툰족이 많이 살고 있어, 알 카에다가 숨기엔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현재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은 이 일대의 의심스런 ‘안전가옥’들을 뒤지고 빈 라덴이 움직일 만한 길목에서 잠복근무를 하고 있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하다. 빈 라덴 일당 검거에 나선 것은 미 CIA 현지공작팀만이 아니다. 파키스탄 정보부(ISI)와 현상금을 노린 현지인 ‘사냥꾼’들도 눈에 불을 켜고 있다. 그러나 알 카에다 하급 간부와 추종세력으로 여겨지는 몇몇 혐의자들만 붙잡았을 뿐이다.

    만일 미 CIA 현지공작팀이 빈 라덴이 숨은 가옥을 찾아내 포위할 경우 그를 생포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 확률이 매우 낮다고 판단한다. 무엇보다 미국이 빈 라덴의 생포를 바라지 않는다. 그가 미국으로 압송돼 감옥에 갇히거나 법정에 설 경우, 부시 행정부로선 여러 가지로 달갑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빈 라덴에 대한 관심의 눈길이 쏠릴 뿐더러, 이슬람 테러 행위를 더욱 자극할 것이다. 더욱이 빈 라덴이 법정에 선다면, 그는 ‘내가 왜 대미 지하드를 벌여야 했는가’를 주제로 통렬한 비판 발언을 토해낼 것이다.

    아울러 1980년대 미 CIA가 자신에게 무기와 돈을 대주면서 아프간 내전에서 옛 소련군에 맞서도록 했다가, 1980년대 말 옛소련군이 물러나면서 지정학적 이용가치가 떨어진 아프간을 버리고 떠났던 비화들을 공개할 것이다. 이는 미국으로선 가리고 싶은 부분이다. 따라서 미국은 빈 라덴의 생포보다는 사살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그를 생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1세기 첫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아프간전쟁에서 탈레반 정권이 미국에 패하는 바람에 근거지를 잃었지만, 빈 라덴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의 잇단 폭탄테러 사건들에서 빈 라덴이 던진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라크전쟁에서 압승한 뒤 “테러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고 선언한 부시 미 대통령에게 “우리의 지하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도전장을 던진 건 아닐까.

    그렇다면 좀 이상하다. 폭탄공격 대상이 왜 미국이 아니라 사우디이고 모로코인가. 빈 라덴이 추구하는 목표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의 신성한 땅에서 미국세력을 몰아내고, 친미적이고 세속적이며 부패한 이슬람 정권을 무너뜨린 다음 이슬람 신성(神聖)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우디와 모로코의 두 왕조는 타도대상이다. 사우디는 5000명의 부패하고 무능한 왕족이 모든 실권을 거머쥐고 이교도인 미군들로 하여금 예언자 마호메트의 땅인 사우디 영토 안에 군사기지를 세우도록 허락했다. 모로코 왕정도 친미·친이스라엘이란 잣대로 보면 영락없는 타도대상이다.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조직원의 눈에 비친 사우디나 모로코의 지배자들은 한마디로 이슬람 정신을 버린 배교자(背敎者)들이다.

    전세계 지하드닷컴(jihad.com)의 회장 격인 빈 라덴의 ‘경영 마인드’로 볼 때 사우디와 모로코는 알 카에다의 새로운 요원을 모집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텃밭이다. 사우디 왕정은 정치 민주화는 물론 경제정의에조차 관심이 없는 집단이라, 사우디 국민들의 왕정체제에 대한 불만은 매우 높은 편이다. 정당과 국회도 없어 의회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고,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도 없다. 경제사정도 험악하다. 지난날 1인당 국민총생산(GDP) 면에서 세계적 수준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겨우 1만달러에 머문다. 그것도 5000명의 왕족을 중심으로 부(富)가 쏠려 있어 일반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매우 크다.

    사정은 모로코도 마찬가지다. 모로코의 왕정 독재는 악명이 높다. 그러면서도 친미·친이스라엘 정책을 펴고 있다. 게다가 빈부 차이가 극심하다(미 CIA 분석자료에 따르면, 2001년 1인당 평균 GDP는 3700달러, 실업률 23%). 소수의 왕족과 그에 빌붙은 소수 기업인들만 살찌우는 기형적인 사회구조다. 제1도시 카사블랑카의 변두리 빈민촌들은 아프리카 저개발국의 전형적인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로 이런 사회적 불만이 빈 라덴으로선 알 카에다 신규요원 모집 등 세력을 키우기에 더없는 조건인 것이다.

    “부패 친미왕조를 타도하라”

    사우디 왕정은 알 카에다가 빈 라덴의 연고지인 사우디에 대해서는 테러공격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5월 수도인 리야드 외국인 주거단지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는 알 카에다의 대미 항쟁전략에서 사우디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사우디에서 벌어진 테러공격을 알 카에다가 저질렀다는 증거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 로버트 밀러 3세는 “리야드 자살폭탄공격 행태는 전형적인 알 카에다의 수법”이라고 주장했다.

    서방 정보기관들은 알 카에다의 투쟁전술 목표가 미국과 유럽에서 이슬람 국가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경비가 삼엄한 서방의 공공건물보다는 알 카에다가 타도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슬람 국가의 보다 수월한 목표물을 공격하는 쪽으로 공격전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2002년 4월 튀니지의 휴양섬인 제브라의 유대인 교회(시너고그)를 폭파, 20명이 죽은 것도 알 카에다의 소행으로 여겨진다.

    사우디와 모로코에서 보듯, ‘신성한 이슬람 땅을 더럽히는’ 미국인을 비롯한 서구인과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은 이슬람 세계에 빈 라덴의 강력한 투쟁 메시지를 직접 던지는 효과가 있다. 이는 아울러 알 카에다 신규요원을 충원하고 세력을 넓힐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아프간-이라크 두 전쟁이 끼친 영향

    이슬람권의 반미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 필자는 팔레스타인, 아프간, 카슈미르 취재 때마다 현지인들이 미국에 대해 내보이는 거부감을 확인하며 새삼 놀라곤 했다. 미국은 아프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의 승리로 반미의 싹이 잘려나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휴화산마냥 내부에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세계적인 여론조사기관인 퓨(Pew) 리서치사가 6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슬람권에서 빈 라덴 지지율은 부시 미 대통령 지지율보다 높다. 모로코의 경우 빈 라덴 지지율이 49%인 데 비해 부시 지지율은 2%에 불과하다. 요르단(55% 대 1%), 인도네시아(58% 대 8%), 터키(15% 대 8%) 등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슬람권에서 빈 라덴의 지지율이 부시보다 낮게 나타난 나라는 쿠웨이트(19% 대 62%)와 레바논(14% 대 17%)뿐이다.

    빈 라덴의 ‘聖戰’ vs 부시의 ‘테러전쟁’ 제2막

    2002년 4월 아랍 위성방송 알 자지라를 통해 방영된 빈 라덴(오른쪽) 비디오. 왼쪽은 알 카에다의 2인자인 알 자와히리

    아프간전쟁과 이라크전쟁을 거치면서 미국과 이슬람권의 세계관은 그 거리를 더욱 벌렸다고 분석할 수 있다. 높아져가는 아랍권의 반미정서는 온건한(moderate) 이슬람 단체들마저 급진적으로 돌아서게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 같은 온건단체도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지하드(성전)’를 부르짖는 형편이다.

    미국의 이라크전쟁 승리는 이렇듯 알 카에다의 조직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하는 데 대한 위기감이 이슬람권에 퍼지면서 반미감정을 지닌 아랍 젊은이들이 알 카에다의 ‘새로운 피’로 흘러들 가능성이 높다고 빈 라덴은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이라크에서 거의 날마다 벌어지는 반미시위는 알 카에다에겐 그리 나쁜 소식이 아니다. 이슬람권의 친미국가(사우디, 모로코, 요르단, 쿠웨이트, 이집트) 정권 담당자들은 높아가는 반미감정이 곧 정권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걱정한다. 그들이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한 이유도 사담 후세인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결국은 국내 안보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랍권의 대표적 친미정권인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100명의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나게 될 것”이라 경고한 바 있다. 그런 경고는 결국 사우디와 모로코에서의 폭탄테러를 통해 현실로 드러났다.

    아프간전쟁을 비롯한 부시 미 대통령의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알 카에다 조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테러와의 전쟁’이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조직활동을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 한때 수백,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던 알 카에다 세력도 현재는 상당히 줄어든 상태다. 미 국무부가 해마다 봄에 발표하는 ‘테러보고서’ 2003년판에 따르면, 2001년 9·11테러 뒤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테러공격이 30%쯤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미 CIA의 분석에 따르면, 아프간전쟁 뒤 2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알 카에다 핵심 간부 3분의 1 이상이 죽거나 잡혔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라는 언덕을 잃게 된 알 카에다로선 지난날처럼 훈련기지를 두고 ‘알 카에다 교범’에 따라 폭탄 조작법 등 조직적인 테러교육을 펴기도 어렵게 됐다.

    그러나 핵심 간부인 빈 라덴을 비롯, 그의 핵심 참모이자 알 카에다의 2인자인 알 자와히리(이집트 알 지하드 지도자) 등은 여전히 잠행하면서 제2의 9·11테러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미 CIA는 판단한다. 알 카에다와 연계된 이슬람권의 테러조직들, 이를테면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운동(알 가마 알 이슬라미야) 지도자들도 잠행중이다. 미 CIA는 빈 라덴을 비롯한 알 카에다 핵심 간부들이 “이슬람 전사들이 조직의 대의(大義)인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해 해당 국가별로 준(準)독자적인 활동을 펴는 것이 조직보전과 장기적인 대미 지하드에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알 카에다 조직은 아프간전쟁으로 근거지를 잃은 후 이웃 파키스탄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 전세계로 퍼져나간 상태다. 알 카에다 조직원들은 옛소련에 속했던 조지아공화국, 체첸지역 등에 비밀 근거지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부 핵심 간부가 체포됐지만, 알 카에다는 곧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다른 인물로 그 자리를 메우고 신규요원들을 충원한 것으로 보인다.

    미 CIA는 현재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도 알 카에다 동남아시아 연계세력이 위협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알 카에다의 동남아지역 연합세력인 제마 이슬라미야(Jemaah Islamiyah)가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과 졸로섬을 과격 무슬림 전사를 길러내는 훈련기지로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1970년대 초반에 창립된 제마 이슬라미야의 정치적 목표는 동남아시아 일대에 이슬람 신성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알 카에다의 목표와 닮았고 미국으로부터 테러단체로도 낙인찍혔다. 9·11테러 뒤 인도네시아 당국은 미 정보당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제마 이슬라미야를 단속하지 않고 있다가 발리 폭탄테러사건 뒤에 단속에 나서 지도자 바시르를 포함해 많은 간부들을 체포했다. 제마 이슬라미야는 2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발리섬 폭탄테러(2002년 10월)의 배후로 꼽힌다. 통나무집과 텐트로 이뤄진 민다나오 훈련기지에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멀리 파키스탄과 중동지역에서 온 회교 과격분자들이 모여 폭탄 조작법 등 군사훈련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남부 민다나오에서는 1만2500명의 병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모로이슬람해방전선(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MILF)이 지난 25년 동안 분리독립운동을 해왔다. 알 카에다-모로 이슬람해방전선-제마 이슬라미야, 이 3개 조직 사이의 관계는 지금도 논란거리다. 197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적 색채가 짙었던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에서 떨어져나와 보다 이슬람적인 색채를 강조해온 MILF는 민다나오섬을 필리핀에서 분리독립시킨다는 비교적 제한된 정치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권에서 미국세력을 몰아낸다는 목표를 지닌 알 카에다와는 달리 반미 테러공격의 역사가 없고, 따라서 미 국무부도 테러단체의 범주에 넣지 않고 있는 상태다.

    1990년대 중반 빈 라덴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이념적 동조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MILF에 밀사를 파견했다. 당시 모로 쪽은 민다나오섬의 관할구역에서 자체 군사훈련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미 정보당국은 그때 이래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일대의 과격분자 다수가 알 카에다의 주선으로 민다나오섬 훈련기지를 거쳐간 것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빈 라덴은 아부 사야프(Abu Sayyaf) 조직과 손잡는 것은 피했다. 아부 사야프는 1990년대 초반 결성된 조직으로, 그 지도자 아부두라야크 자냘라니는 1980년대 아프간 내전에 무자헤딘(이슬람 의용군)으로 참전한 경력을 지녔다. 자냘라니는 스스로 “아부 사야프는 오사마 빈 라덴 여단(旅團)”이란 말을 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빈 라덴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빈 라덴은 아부 사야프가 겉으로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강도짓을 일삼고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아부 사야프는 그 뒤 관광객들을 납치해 몸값을 챙기는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올해 여름 미국과 필리핀 두 나라 군대는 필리핀 남부에서 함께 군사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다. 공격목표로 설정된 것은 MILF가 아니라 아부 사야프다.

    MILF에 대해서는 오히려 높은 유아 사망률과 문맹률이 상징하듯 낙후된 민다나오의 지역발전을 위해 3000만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겠다며 달래는 형편이다. 미국은 MILF가 알 카에다와의 느슨한 연결고리를 아예 단절하길 바라고 있다. 필리핀 당국과는 이 부분에서 기본적으로 큰 시각 차이를 보인다.

    빈 라덴, “후세인 신세는 지지 않겠다”

    알 카에다가 주공격목표의 하나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도 테러 위협 불안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대(對)테러연구소의 요니 피겔(예비역 대령)은 지난 5월 발표한 ‘계속되는 알 카에다 위협’이란 글에서, “미국과 우방국들이 알 카에다에 대한 지지기반을 차단하자 알 카에다도 그에 따라 진화 적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알 카에다의 이른바 지하조직들(sleeper cells)이 아프간 바깥에 비밀 근거지들을 세워 “아프간에서 전세계로 퍼진 만큼 다음 테러공격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예측하기가 더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1980년대 아프간 내전에 참전했던 알 카에다 요원이 직접 테러공격에 참여할 수도 있고, 알 카에다와 이념을 같이하는 특정 지역 조직원들이 알 카에다와는 무관하게 테러공격을 벌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라크전쟁은 알 카에다에게도 하나의 기회를 던져줄 것으로 피겔은 분석했다. 아울러 그는 이스라엘의 강경우파 논리에 따라, “이라크의 반미정서가 알 카에다에 새로운 지원자가 몰려드는 형태로 발전, 이라크에 알 카에다가 새 전선을 형성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빈 라덴의 ‘聖戰’ vs 부시의 ‘테러전쟁’ 제2막

    5월13일부터 호주 시드니에서 판매된 ‘벙커 버스터’라는 이름의 골프공. 빈 라덴과 후세인의 얼굴이 새겨져 있지만, 이들이 대미 테러를 위해 손을 잡지는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 내 매파(the hawkish) 각료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라크의 후세인과 알 카에다의 관련설’을 입에 올리곤 했다. 그러나 알 카에다와 후세인 정권은 “반미라는 연결고리는 있을지라도 서로 손을 잡지는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비밀서류로 분류된 CIA의 한 신문조서에 따르면, 2002년 3월 체포된 알 카에다 고위간부 아부 주바이다도 미 조사관들에게 이라크의 후세인과는 아무 연결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알 카에다 지도부에서 후세인 정권과 손 잡는 방안을 놓고 토론을 벌였지만, 빈 라덴이 그런 제휴 방안에 부정적 견해를 비쳤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빈 라덴은 “후세인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는 것이다. 2003년 3월 파키스탄에서 체포된 알 카에다의 또 다른 핵심간부 칼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도 주바이다와 같은 내용을 미국 조사관들에게 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행정부는 이런 사실들을 알면서도 이라크전쟁에 앞서 여러 침공 명분을 내세우면서 “이라크의 후세인과 알 카에다가 서로 연결됐다”는 선전을 되풀이했다.

    후세인 정권-알 카에다, 이 두 반미집단은 생리적으로 오히려 적이나 다름없다. 알 카에다가 지향하는 지하드 이데올로기는 후세인 같은 세속적인 정권을 거부하고 이슬람 신성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빈 라덴을 비롯한 알 카에다 지도부와 핵심분자들은 이슬람의 세속적인 정치지도자들이 이슬람 신도들을 탄압하고 이슬람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본다. 알 카에다의 시각에서는 1950년대 아랍민족주의의 불길을 댕겼던 ‘이집트의 혁명영웅’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 또는 현 실권자인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 사우디의 왕족들, 알제리의 군사정권 지도자들이 부정적인 존재로 여겨지며 따라서 제거대상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후세인도 이슬람 신성국가를 부정하는 세속적 권력자일 뿐이었다. 알 카에다는 후세인이 샤리아(Sharia, 성스러운 회교 율법)에 따라 이라크를 다스리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체제에 도전한 시아파와 수니파 지도자들을 살해했던 인물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해왔다.

    라흐만, “아랍의 세속적 지도자를 죽여라”

    빈 라덴이 선배로 깍듯이 모시는 인물이 있다. 제1차 걸프전쟁 당시 이집트의 급진적 종교지도자였던 오마르 압델 라흐만이다. 그는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파사건 관련 혐의로 1995년 기소돼 무기징역형을 받고 현재 미국 감옥에 수감중이다. 장님인 라흐만은 “이라크와 싸우는 쪽(미국)이나,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위해 싸우는 자들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견해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이집트 과격단체인 감마 알 이슬라미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이 조직원들이 1981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암살에 대해 자문하자 “사다트에게 죽음을!”이라 말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그들의 시각에선 이슬람 국가의 세속적 지도자는 알라신의 율법을 어긴 자들이고, 정치적으로는 친미주의자들이다.

    9·11테러가 일어나기 직전, 탈레반 정권은 아프간에서 불법적인 선교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돼 수감중인 외국인 8명(독일인 4명, 미국인 2명, 호주인 2명)과 라흐만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했었다. 탈레반이 그런 제안을 한 까닭은 라흐만을 존경하는 빈 라덴과, 라흐만과 같은 이집트 출신인 알 카에다의 2인자 알 자와히리가 라흐만의 석방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아랍권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후세인은 오래 전부터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을 자신의 집권기반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왔다. 따라서 ‘공동의 적’인 미국과의 투쟁에서 알 카에다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98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국가안보위(National Security Council)로 하여금 알 카에다와 후세인의 관계를 다시 한번 엄밀히 조사하도록 한 적이 있다. 그때의 결론도 “이렇다할 두드러진 관계(noteworthy relationship)가 없다”는 것이었다.

    알려진 바처럼 후세인은 해외의 반(反)이라크 단체 요원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긴 했지만, 알 카에다측에 생화학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MD)를 건네줘 미국을 간접적으로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 대목은 미 CIA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던 올해 초 CIA는 후세인이 그동안 거리를 둬왔던 알 카에다에게 대량살상무기를 공급, 테러공격을 부추길 가능성에 대해서도 검토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펼쳐지지 않았다.

    미국의 대(對) 알 카에다 봉쇄작전에는 알 카에다의 돈줄을 끊는 것도 포함돼 있다. 9·11테러 뒤 미 부시 행정부는 일련의 봉쇄 명령을 잇따라 내렸다. 미국은 모두 합쳐 3400만달러의 알 카에다 자산을 압류했고, 전세계에 걸쳐 그동안 알 카에다를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190개의 개인과 기관의 이름을 꼽아가며 이들을 ‘테러지원세력’으로 낙인찍었다. 논란거리는 알 카에다의 재정자금 일부가 사우디에 본부를 둔 자선단체 알 하라마인(al-Haramain) 등에서 흘러들어갔다는 점이다.

    알 하라마인은 1990년대 전반기 보스니아 내전 때 그곳 무슬림 전사들에게 재정지원을 했고, 체첸 반군에게도 일부 자금이 흘러들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이같은 사실은 2002년 6월 알 카에다의 동남아시아 현지 활동책 우마르 알 파루크가 체포돼 미 CIA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파루크는 “알 하라마인을 통해 돈세탁을 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유럽연합(EU)은 2002년 3월, 11개의 기관과 7명의 개인 기부자를 테러자금원으로 꼽은 바 있다. 미 재무부 쪽 자료로는, 전세계 150개 국가가 미국의 알 카에다 자산동결 조치에 따라 7000만달러 상당의 자산을 동결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미국과는 달리 알 카에다의 자금원만을 봉쇄할 뿐,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하마스로 흘러들어가는 자금에 대해선 엄격하지 않다. 하마스의 자살폭탄테러와 실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이뤄지는 자선행위를 구분하겠다는 입장이다.

    이같은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자금 차단 노력에도 알 카에다의 자금 사정은 궁색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미 FBI 테러자금 작전부서 책임자 데니스 로멜은 지난 5월 호주에서 열린 국제안보회의 참석 길에 가졌던 ‘시드니 모닝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테러 자금의 흐름을 막으려 힘써왔지만, 알 카에다는 그같은 제약에 아주 잘 적응해가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상황이 훨씬 나빠지더라도 그들은 테러공작에 충분할 만큼의 자금을 댈 능력이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알 카에다의 테러 위협에 맞서 올해 초 정식 출범한 미 국토안전국(국장 톰 리지)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잊을 만하면 테러 경보를 한 등급 올리는 것이 리지의 일이냐”는 비아냥마저 듣고 있다. 17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매머드 조직의 장관급 수장이지만, 리지는 알 카에다의 위협에 맞서느라 편히 잠자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미국 내 2800개 발전소, 60만개의 교량,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비롯한 463개의 고층빌딩, 30만km에 이르는 가스 파이프, 그리고 3만km의 미 국경선이다. 국토안전국이나 미국 정보기관들은 빈 라덴이 미국 본토를 공격하는 목표물 가운데 미국 주요 도시들의 지하철이 포함돼 있음을 미 언론에 흘려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빈 라덴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감과 증오를 더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빈 라덴이 9·11테러 공격에서 비행기를 납치,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함으로써 많은 민간인 피해를 낸 것은 사실이다. 빈 라덴은 미국과의 정치적 전쟁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이슬람적 대의(大義)를 선전하고 미국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극적인 수단으로서 공격목표를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 건물인 세계무역센터와 미 군사력의 상징물인 펜타곤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친이스라엘 일변도, 친미 부패정권 지지정책)에 경종을 울리려 했다는 분석이다(‘신동아’ 2002년 8월호에 실린 필자의 글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에 비춰본 오사마 빈 라덴의 전술전략’ 참조). 그러나 빈 라덴은 자신의 지하드에 대한 온건 이슬람권의 지지 또는 전세계에 걸친 동정여론을 얻기 위해서라도 지하철 공격 같은 무차별 대량살상 행위를 다시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빈 라덴이 지향하는 대미 지하드의 이유가 해소되지 않는 한 미국은 언제 터질지 모를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팔레스타인을 불법점령하고 있는 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마스(Hamas)를 비롯한 저항단체 요원들의 자살폭탄공격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이 친이스라엘 일변도의 중동정책, 그리고 친미 부패정권들과 손잡고 중동에서 자국의 패권을 강화, 석유를 지배하려는 정책을 이어가는 한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투쟁 대의’는 이슬람 지역에서 힘을 얻을 것이다. 따라서 부시의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그 터널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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