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

  • 글·사진: 퍼슨웹문화기획집단 www.personweb.com

    입력2003-06-25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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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도권 한계 뛰어넘는 지식·담론 생산
    • 대안적 학문 연구체 스스로 조직
    • 생태여성론, 분류생태학… 다양한 분야 섭렵
    • 특정 학맥 구애받지 않는 날 선 비판
    • 전문성과 대중성의 균형 추구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공간과 주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자생적인 연구단체, 새로운 성격의 사회교육 단위, 인터넷에 기반한 네트워크, 지식정보를 다루는 기업의 연구조직 등이 기존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지식과 담론을 생산하고 수용하는 새로운 공간적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낡아버린 대학 시스템의 바깥에서, 그리고 이전과 다른 개념을 띤 대학에서 앎의 편재 방식과 내용을 바꿔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퍼슨웹이 만난 장석만·고미숙·윤해동·문순홍·이정우·이진경·이태원씨 등 7명은 이런 실천의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기존 시스템과 관계망에 적당히 타협하거나 적응하지 않는다. 대신 대안적이고 학문적인 실천을 직접 조직하거나 경험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철학아카데미’ ‘바람과 물 연구소’ 등을 이끌며 제도권 밖에서 삶의 ‘다른 길’을 모색중인 장석만·고미숙·이진경·이정우·문순홍씨의 행보는 각자의 공부 주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앎의 길과 삶의 길을 일치시키려 노력한다. 윤해동씨는 ‘결여’ ‘완성’ 등의 관점에서 한국의 근대를 사고하는 방식에 서구적 이념형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나아가 민족주의 담론이 근대 한국사를 제대로 보는 데 장애물이 되기 시작했음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이태원씨는 우리의 본격적인 해양생물학 서적인 ‘현산어보’의 다시 쓰기를 시도함으로써 한국의 전통 분류생태학에 새로운 흐름을 불어넣고 있다.

    [생태여성론의 선구자]문순홍(바람과 물 연구소 소장)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
    퍼슨웹은 인터뷰를 준비하던 즈음, ‘지금 문순홍은 투병중이며 절대 안정을 취해야만 한다’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대체 인물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접한 문순홍의 저서와 관련자료는 이미 퍼슨웹을 매료시킨 후였다. 몇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획에서 문순홍을 제외할 수 없다는 생각은 점차 신념으로 바뀌었다. 대면 인터뷰가 전화 통화로 대체되긴 했지만, 문순홍은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희미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각인됐다.



    직접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문순홍을 그토록 붙잡으려 한 것은 바로 문순홍과 분리할 수 없는 ‘생태여성론(Eco-feminology)’이 발산하는 매력 때문이었다. ‘생태학’ ‘생태주의’라는 용어가 막 사회적으로 익숙해지려는 지금, 그보다 한 발짝 앞서 생태주의와 여성주의의 결합을 실천해온 문순홍이란 인물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생태여성론은 생태여성주의(Ecofe- minism)의 한계를 보완하는 새 이론이자 관점이다. 생태여성주의가 자연과 여성의 모성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여성의 환경활동에 의의를 부여하는 입장이라면, 생태여성론은 관계적 세계라는 틀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에 상호보완적인 긴장관계를 부여한다. 따라서 생태여성론은 현재의 남성(성) 중심적 사회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안사회를 이끌 주체로서의 여성(성), 그리고 대안사회 구성의 가치와 원리로서의 ‘여성적인 것’에 무게를 싣는다.

    이런 시각은 생태 논의의 한국적 수용을 위한 움직임들이다. 실제로 문순홍은 설문조사와 300여 명에 이르는 여성 환경활동가를 심층 인터뷰했다. 이를 통해 한국 여성 환경운동의 시원(始原)과 역사를 점검하고 현 시점에서 여성 환경활동가들의 현황을 분석함으로써 한국에서 생태여성론의 실천(‘한국의 여성환경운동’, 아르케)을 시작했다. 동시에 생태여성론 개념들을 19세기 말 등장한 동학과 원불교, 증산도 등의 언어로 바꾸고 이를 개념화·이론화하는 공동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생태여성론 논의를 좇다보면 생활정치, 미시정치적인 관점이 배어나고 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이른바 정치생태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생태여성론의 특성은 문순홍의 이력을 살펴보면 쉽게 고개 끄덕이게 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당초 성균관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문순홍은 박사후 과정으로 여성학을 공부했다. 때문에 정치학과 여성학을 섭렵한 문순홍이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1980년 대학 졸업 후 문순홍은 외교안보연구원 유럽 관련부서에 근무했다. 당시 그곳의 신문들은 반전평화운동, 녹색당, 학생들의 빈집 점령운동 등을 보도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사회의 기본 물음이 노동과 반독재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문순홍은 혼돈스러웠다고 회고한다.

    이는 석사과정 지도교수로 사실상 생태사상의 한국적 원조라 할 수 있는 임효선 교수를 만났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교수는 문순홍에게 정치사상의 기초로서의 ‘자연관’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며, 문순홍은 근대 서구철학의 자연관과 동양적 자연관의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년간의 독일 유학에서 얻은 자기성찰은 내가 나의 것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귀국 후 문순홍은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 연장선 위에서 서구철학의 자기반성(?), 일명 철학의 종언 혹은 포스트모던 논쟁판을 기웃거리게 됐다.

    여성 환경활동가 300여명 심층 인터뷰

    문순홍의 관심 분야는 환경문제가 아니라 생태패러다임과 이와 관련된 사회적 물음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패러다임 변동에 관심이 있었던 문순홍은 변동의 방향이 생태적인 방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변동을 일으키는 생태 위기는 분할된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자기 목소리 내기, 추상화된 보편성과 이 보편성에 기반한 체제억압성에서 구체적 개인들(개체들)의 살아 숨쉬는 능력 복원하기의 문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동시에 이 안에 여성과 자연의 자기 목소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문순홍은 말한다. “내가 연구해야 할 곳은 아카데미에 갇힌 연구실만이 아니었다. 동시에 현장이었다. 1987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사람들은 생태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내 작업은 이 생태란 단어를 이해시키는 데 집중돼 있었다. 동시에 내 관심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시각 형성에, 현장에 참여하는 건강한 시민 형성에 있었다.”

    5월31일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하는 종교인들의 삼보일배(三步一拜) 행사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대장정을 마감했다. 생태여성론의 입장에서 문순홍은 그 행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생태여성론은 지역과 관련하여 물리적이고 추상적인 공간 개념보다는 구체적 삶이 진행되는 장소 개념을 선호한다. 이 장소는 행정적·정치적·경제적 목적의 구획 속에 닫힌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장소는 강, 산맥, 동식물대에 의해 분리되기도 하지만(닫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넘어서는 영성에 의해 열리기도 한다.

    한국의 환경운동에서 동강 영월댐 건설 반대운동은 그런 운동방식에서 한 획을 그었다. 그것은 영월·정선·평창으로 닫힌 영성(동강과 자신의 삶과의 관련성에 대한 인식)을 한반도 전역으로 열어놓았던 것이다. TV 화면에 펼쳐지는, 또 현장방문에서 확인한 동강의 아름다움은 전국민의 생태적 감수성을 흔들어놓았고 동강이 그곳에 그대로 있어야 할 이유를 이해시켰다.

    이에 비해 새만금 간척사업은 동강의 사례와는 달라 새만금에 대한 생태 감수성을 지역에서 전국으로 열어놓을 기제를 발견하지 못했고, 새만금이란 지역을 행정적·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에 가두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삼보일배 행사는 이 기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삼보일배 행군은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바로 내 안의 자기-타자-긍정성을 탐진치의 억압에서 풀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통해 인간과 지역 이해관계에 갇혀 있는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시각을 한반도, 동북아, 세계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운동을 넘어 자기혁명의 수행이고 이 수행을 통해 나와 타자가 해방된다는 의미에서 생명축제의 전조다.

    문순홍은 당분간 강의와 외부 활동을 쉬고 있는 상태지만 최근 문순홍에게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이 만든 에코페미니스트 모임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www.ecofeminist.org)’은 ‘꿈꾸는 지렁이들’(환경과생명) 같은 책을 출판하며 여성 환경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
    이태원은 이번 기획에서 선정한 대상 중 최연소 인물이다. 1972년생. 우리 나이로 서른둘. 한창 젊디젊은, 그래서 뭔가를 의욕적으로 벌여 시작할 것만 같은 나이에, 한국의 전통 생태분류학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성과물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다가왔다. 무려 ‘7년 동안 집필한’이란 수식어를 단 책, ‘현산어보를 찾아서’(1∼3권, 청어람미디어)가 그것이다.

    이태원은 그야말로 평범한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이다. 밥 먹을 때도 자분자분하니 말없이 밥과 반찬을 입에 넣던 그가 눈을 반짝이며 대화에 동참하던 순간은 바다낚시가 화제에 올랐을 무렵이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자그마한 조피볼락을 잡아 나눠먹는 낚시꾼의 우애를 이야기하는 중에 비로소 이태원은 책 속에서 만났던 이태원다워진다.

    이태원이 처음부터 고전 자료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현산어보’를 처음 접한 순간에는 자전을 놓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찾던 수준이었다고 하니 ‘현산어보’를 번역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어려서부터 우리말의 방언, 지명 등과 관련된 어원(語源)에 궁금증이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생물 명칭의 어원에 대해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놀이처럼, 취미처럼 그렇게 작업에 매진하다 어느 새 ‘7년’이 지나버린 것이다.

    ‘7년 동안’ 책을 뒤지고 발품을 팔아가며 책에 나온 물고기를 잡는다, 배를 가른다 해서 ‘현산어보를 찾아서’란 책을 완성해낼 수 있었다. 엄청난 기획의 산물이었다기보다는 진정으로 산과 바다에서 놀기 좋아하던 청년이 취미와 일의 행복한 결합을 통해 빚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오랜 청춘의 시간 동안 지겨워하거나 회의 한번 하지 않고 꼬박 그 일에 매달릴 수 있는 열정이 솟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산어보를 찾아서’가 각광받는 까닭은 우리에게도 본격적인 해양생물학 서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웠을 뿐 아니라 정약전(1758∼1816)의 ‘현산어보’에 기대어 흑산도 인근 해양 동식물 226종의 명칭, 분포, 생태 등을 상세하게 다시 쓴 해양 생태계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흑산도행 고속페리 남해스타호에서 서술을 시작한 이 책은 단순 기행문이나 해양 생태계 보고서가 아니라 백과사전식 다양한 인문학 지식을 담고 있어 새로운 방식의 대중적 글쓰기로도 주목받고 있다.

    ‘현산어보를 찾아서’가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던 만큼 그 책에 대한 반응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적인 성격의 글이든 전문가들의 글이든 자기 글에 대한 독자를 확보한다는 것은 글 쓰는 사람 모두가 꿈꾸는 욕망이 아니던가. “언론은 ‘현산(玄山)’이냐 ‘자산(玆山)’이냐는 논쟁에만 관심이 있다”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많지 않다”는 그의 말에서 ‘현산어보를 찾아서’에 대한 본격적인 반응을 기다리는 아쉬움이 전해진다.

    ‘놀이’로 시작한 전통 분류생태학 연구

    지금을 사는 우리가 새삼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곧 현재를 진단하려는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한국 전통의 본격 해양생물학 서적을 새롭게 발굴한 성과물이 현재의 과학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외로 “별로 없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숨돌릴 틈도 없이 쇄도하는 과학의 발전 속도 속에서 ‘현산어보를 찾아서’는 한 번의 숨고르기에 불과하다는 말일까.

    과학문명에 대한 이태원의 시각은 의외로 소박하다. ‘알면 보인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자연을 접하는 순간 그것의 정체를 안다면 훨씬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 함께 뒹굴었던 자신의 체험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길 바라는 마음, 즉 이태원의 작업을 지탱하는 토대가 됐을 ‘자연과의 공유’ ‘타인과의 공유’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현산어보를 찾아서’는 읽기 쉬운 문체로 다양한 방면을 소개하고 있어 독자들을 쉽게 흡인하는 것이 장점이다. 이런 평가에 대해 그는 평소 학생들에게 어려운 과학지식을 조금이라도 쉽게 전하려는 교사로서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며 웃는다. 보기 드문 대중 과학서를 집필한 그가 최근 번지고 있는 과학 대중서의 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생물학은 분류생태학과 분자생물학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는 ‘현산어보를 찾아서’와 같은 결과물이 대표적 사례이며, 후자에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유전공학이 해당한다. 연구의 대세는 많은 연구인력이 참여하고 있는 유전공학 쪽인데 아무래도 전문적 내용이 많은 만큼 분류생태학에 비해 대중적으로 풀어내기가 용이하지 않단다. 따라서 전문적 내용을 다룬 과학 대중서의 경우, 대체로 외국서적을 번역한 경우가 많다.

    분류생태학이 우리나라의 자연과 생물을 다루는 만큼 우리의 색깔로 가공하기 쉬운 데 비해 분자생물학은 우리 색깔을 찾기도 힘들 뿐더러 찾을 필요성도 크지 않기 때문에 때론 잘 된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산어보를 찾아서’ 4, 5권의 후반 작업이 생각보다 더디다고 한다. 자꾸 문장에 눈이 가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면 다시 들로, 산으로, 갯벌로 뛰어나가 발 벗은 아이처럼 신나게 놀 작정이다. 이태원의 놀이가 유쾌한 결과물이 되어 우리 곁에 다가올 그 언젠가가 기다려진다.

    [‘아메바성 에너지’로 가득찬 고전평론가]고미숙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
    고미숙은 지난 4월 ‘열하(熱河)’에 다녀왔다. 박지원이 ‘열하’를 다녀왔던 나이와 동일한 마흔넷의 봄, 고미숙 역시 ‘열하’의 땅을 밟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4월이 어떤 때인가. 중국과 동남아에 한창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하던 바로 그 시기였다. 수많은 중국 유학생들이 SARS를 피해 귀국하고 덩달아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그 기간에 굳이 중국여행을 강행하려는 그를 사람들은 ‘무모하다’며 말리기도 했고, 몇몇 사람들은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상황이야 어찌됐건 무사히 열하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고미숙은 열하 기행과 괴질 소문이 맞물린 이 독특한 체험을 기록물로 남기며 생활하고 있다.

    고미숙의 행동을 가타부타 평할 의도도, 평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혀를 내두르르게 하는 행동이란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고미숙을 만나보면 누구나 능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가 열하 여행과 관련하여 체험한 것이 ‘담론 혹은 표상에 포획된 상황’이든 ‘질병에 달라붙어 있는 은유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든 상관없이 기존의 결정된 표상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외부와 ‘접속’하려는 고미숙의 행보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고미숙의 이력. 학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지만 고전문학에 ‘필(feel)’이 꽂혀 대학원에서 조선조 시조문학으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민족문학사연구소 활동으로 잔뼈가 굵었다. 교수 되길 포기하면서 이후 수유리에 개인 연구실인 ‘서울사회과학연구소’를 열었는데 이때 함께한 사람들 중 일부와 결합해 내건 타이틀이 바로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이때부터 수유리에서 대학로로 옮겨와 터전을 닦았다.

    진정한 혁명은 바리케이드가 아닌 일상을 통해 이뤄진다는 생각 때문에 연구실을 드나드는 수많은 친구들과 함께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하고 등산하고 세미나를 연다. 이같은 연구실의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 학연이나 성차별이 없는 ‘밥상 공동체이자 도시 속 지식인 공동체’란 별칭을 얻게 됐다.

    외부자의 편안한 시선으로만 보자면,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돼온 것같이 느껴지지만 연구실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일상과의 전쟁이었다. 때로는 김치 하나 때문에 부딪쳐야 했으며 청소, 음악, 강좌, 쓰레기문제 등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고미숙은 그 속에서 타인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자신의 습속을 변화시켜나갈 줄 아는 것만이 진정한 앎과 삶의 결합이라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다’는 믿음하에 전세계 다양한 친구들과 결합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꿈꾸고 있다.

    고전 쉽게 풀어 전달하는 중간자

    고미숙은 고전평론가란 이름으로 불리기를 소망한다. 고전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현대의 독자들에게 쉽게 풀어 그 생생함을 전달하는 중간자 역할이 자신에게 부과된 소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엔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을 출간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처럼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이 책에서 그는 때론 정약용을 중세 내부의 정주민(定住民)으로, 때론 박지원을 중세 외부를 사유하던 유목민(遊牧民)으로 논파함으로써 그야말로 박지원류의 ‘게릴라식 글쓰기’의 변주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처럼 자신과 접속하는 모든 사물을 ‘자기 안의 무엇’으로 변화시키는 고미숙이 전하는 느낌은 아마도 ‘아메바성 에너지’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접하는 사물이 그 무엇이든 자신과 ‘접속’하는 대상에 대해 유쾌하게 반응하고 기꺼이 과감하게 자신을 변이시켜나갈 줄 아는, 변화에 주저하지 않는 에너지야말로 고미숙이 지닌 최대의 강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에너지야말로 고미숙의 삶 속에서 끊임없는 편력, 아니 편력을 넘어선 유목이 넘쳐나게 만드는 것일 게다.

    지금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6월말 오랫동안 둥지를 틀었던 혜화동을 떠나 원남동으로 거처를 옮길 작정이다. 고미숙은 최근 양수리에 새로 집필실을 마련했다.

    이 모든 것들이 비단 지식인만의 공동체가 아닌, 말 그대로의 코뮨을 꿈꾸는 고미숙의 새로운 첫걸음인지, 그리고 그의 독자적인 실험이 다시 어떤 길을 향하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바라건대,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그리고 고미숙이 꿈꾸는 모든 일들이 풍성한 가을걷이 같은 알찬 결실을 보길 희망한다.

    [한국 민족조의 에 대한 본격적 비판자]윤해동(한국사 연구자)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
    윤해동은 좀처럼 출신고등학교를 밝히지 않는다. 그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한때 잘나가기로 유명했던 대구의 모 고등학교 출신이다. 예전의 한 인터뷰 자리에서도 출신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었다. “그게 뭐 중요합니까? 그냥 넘어가죠.”

    77학번과 나이는 같지만 1979년 대학에 진학한 그는 “학과 성적은 떨어지지만” 학교 생활만큼은 열심히 했던 학생들 대열에 합류해 국사학과에 진입했다. 출신성분(?), 소위 학력에 관한 서너 가지 사소한 질문에 대해서 그는 계속 손사래를 치며 답변을 거부한다.

    민족주의 비판, 나아가서 한국사학 전반에 대한 메타비평을 기획하는 그의 논쟁적 저작(‘식민지 인식의 회색지대: 일제하 공공성과 규율 권력’, 당대비평 13호)에도 필자 소개는 그저 ‘서원대 강사’라고만 돼 있다. 대학사회에서 한 연구자의 현 위치를 가늠하기 위한 필수요소로 인정되는 출신고를 비롯해 최종-최고학력, 학벌 등의 좌표를 생략 혹은 교란한다. 마치 어떤 방정식으로도 접근 불가능한 4차원의 존재인 양, 혹은 방정식으로 제한되거나 예측될 수 없는 존재의 자유로운 유영을 꿈꾸는 양.

    그는 말투와 연배를 헤집어서 그에 어울리는 ‘건전한 상식’ ‘선입견’ 등등을 타진해보려는 틀에 박힌 접근통로를 철저히 차단한다. 출신고를 밝히지 않으려는 그의 기질은 기실 학자로서의 ‘기본태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어떤 종류의 ‘집단적 아이덴티티’로부터도 자유롭고자 늘 꿈꾸며,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의 ‘최소덕목’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윤해동은 학부를 졸업한 뒤 곧바로 입대하여 1985년 만기제대했다. 제대 직후, 당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던 대학 친구의 권유로,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연구소의 간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아무런 적(직업)이 없는, 완벽한 자유인으로 한국사 연구자의 길에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역사문제연구소’를 비롯하여 한국사 관련 단체들이 대학원생 중심의 전문 연구자 집단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이를 일종의 길드적 조직체로 묘사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유인’으로서 연구단체에 개입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 대학 외부에서도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대학원 석사 학번이 89학번이니 동년배에 비한다면 대략 5∼6년 늦은 셈이었다.

    윤해동은 한국사를 전공한 연구자 중 최초로 민족주의에 대해 본격적인 비판을 쏟아낸 인물이다. 한국사학계가 민족주의의 견고한 틀 속에서 유지되고 있던 점을 감안한다면 윤해동의 주장은 가히 폭탄의 뇌관에 비유할 만하다.

    윤해동의 연구의 특징은 일제시대 미시적 영역에 대한 접근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시대 촌락의 구장은 식민지 권력 침투의 첨병이면서 촌락민의 대변자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이중적 측면은 곧 ‘식민지 공공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친일과 저항의 경계선에서 모호하게 규정돼오던 다양한 활동과 사건들은 저항과 협력이 교차하는 ‘회색지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윤해동에게 있어서도 아직 ‘회색지대’는 시작에 불과하며 문제 제기에 가깝다. 그러나 저항-협력의 양자가 ‘교차’하는, 그리고 ‘민족국가의 건설’로도 혹은 ‘황국신민화의 길’로도 이어지지 않는 그 어떤 ‘가능성의 공간’이 열려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식민지적 공공성’이란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이 남겨두고 온 과거를 복원하는 열쇠이자, 나아가 그 역사 서술을 근원에서부터 교란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윤해동의 비판은 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을 겨냥하고 있다.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학의 대표적 형식논리라 할 수 있는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그대로 뒤집어놓은 형태라는 것이다. 곧 서구중심주의(eurocentrism)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이는 결국 서구적 근대-진보 관념에 대한 근원적 반성 없는 한국사 서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윤해동의 이런 주장은 포스트적 역사학, 혹은 탈근대 논의에 대해 내부적으로 더욱 강화의 포즈를 취하는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한국사학계가 안고 있는 민족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근대 이후 성립된 ‘역사학’ 일반이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그가 진행해온 일련의 비판적 연구작업들은 최근 출간된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에 잘 드러나 있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한때 민족주의는 진보와 동일한 이름으로 이해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비판 진영 내부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그만큼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론은 성장했고, ‘공공적/시민적 민족주의’나 ‘열린 민족주의로의 전환 가능성 혹은 민족주의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하는 입장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해졌다. 사회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에 이제 좀 익숙해지려는 참이기도 하거니와 2002년 6월을 뜨겁게 달궜던 ‘붉은 악마’의 함성은 ‘민족’이 내포한 강고한 힘과 허구성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는 계기가 됐다.

    윤해동의 주장에 대한 한국사학계의 반응은 대체로 무감한 편이다. 국사학계의 좀더 활발한 논쟁을 기대해본다. 윤해동은 와세다대학 외국인 연구원(visiting scholarship)으로 지난 5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의 체류기간 동안 ‘한일간 민중사회사’를 공동연구할 예정이다.

    [‘탈주’꿈꾸는 정력적인 저술 활동가]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무’ 연구원)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
    우선 이진경의 이력서가 필요했다. 수시로 얼굴을 마주 대하는 사람의 이력서를 훑어보는 일은 어색하고 낯설다. 어쨌든 ‘공식적’인 소개를 위해서는 인상이나 소견보다 ‘사실’들이 우선 필요한 법. 그런데 이렇게 ‘인상적’인 이력서는 처음 보았다. ‘인상’부터 밝히는 데 있어 양해를 구해야겠다.

    이력서엔 저서, 논문, 번역 목록을 제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2002년 한 해 동안만도 7권의 책, 즉 ‘철학과 굴뚝청소부(증보판)’(그린비), ‘철학의 외부’(그린비),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증보판)’(소명출판), ‘철학극장, 욕망하는 영화-기계들(공저)’(소명출판),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개정증보판)’(푸른숲), ‘노마디즘 1·2’(휴머니스트), ‘들뢰즈와 문학기계(공저)’(소명출판)를 펴냈을 정도로 이 이력서의 주인공은 자타가 공인하는 ‘글 쓰는 기계(writing machine)’다.

    1980년대를 ‘뜨거운’ 젊은 날들로 기억하는 세대는 이력서의 주인공 이진경이란 이름을 ‘사사방’과 함께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본명이 박태호인 이진경은 1988년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이하 ‘사사방’)을 출간할 때부터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다’를 줄여 ‘이진경’이란 이름을 만들어냈다는 속설은 그야말로 속설일 뿐. 부르기 편하게 그저 ‘되는 대로’ 붙여본 필명은 원래 이진경이 아니라 이진형이었다. 하지만 이진형을 이진경으로 잘못 인용한 김석민의 ‘한국자본주의의 농업문제’(1987)가 ‘사사방’(1988)보다 먼저 아침출판사에서 출간되는 바람에, 역시 아침출판사에서 펴내기로 했던 ‘사사방’은 이진경이란 필명을 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진경이란 이름은 이렇게 좀 허무하게(?) 탄생했다(‘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다’란 말은 ‘사사방’을 읽은 사람들이 나중에 지어붙인 삼행시 내지는 광고카피 정도였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진경은 서울대 사회학과 82학번이다. 석사논문을 마무리지을 무렵인 1990년 1월 ‘노동계급’이란 기관지를 발행했던 그는 노동계급 조직 중앙위원으로 구속돼 만 2년을 채우고 1991년 말에 출소한다. 출소와 함께 시작된 그의 정력적인 저술활동은 마침내 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로 임용된 2003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출소를 전후한 시기, 그러니까 본격적인 저술 작업에 들어갈 무렵의 이진경을 가리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들뢰즈주의자로 변신’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80년대 학번에게는 ‘사사방’으로, 90년대 학번에겐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기억되는 삶의 ‘단절’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단절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내 모습을 모두 아는 사람이다. 1990년대의 나를 ‘탈주의 철학’으로 규정하고, ML주의자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의 논법을 많이 쓴다. 그러나 1980년대의 운동이야말로 탈주적인 삶, 가장 지배적인 탈주의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기존의 지배적 체제, 가치,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던 거니까. 탈주로서의 삶이라는 면에서는 연속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진경은 1993년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 ‘논리 속의 철학, 논리 밖의 철학’(새길)을 시작으로 이후 매년 한 권 이상의 책을 썼다. 소위 ‘탈주의 철학’을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된 셈인데, “80년대에 갔던 길은 끊겼다”고 생각한 그가 새롭게 찾아낸 길은 근대적 삶의 방식 자체를 문제삼았던 들뢰즈와 푸코에게로 그를 이끌었다.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은 남다르다. 1998년 겨울부터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 강의를 바탕으로 쓰기 시작해 2002년 겨울에 발간한 ‘노마디즘’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와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한 책이다.” 이진경은 “우정의 기록이란, 함께 찍은 사진이나 서로 주고받은 서명된 편지만을 뜻하진 않는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심지어 만난 적도 없지만, 서로간에 호의를 갖고 무언가를 주고받았고, 그것을 통해 삶이나 사유에 어떤 변화가 야기됐다면, 그것으로 우정을 나눴다고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반문한다. ‘노마디즘’을 탄생시킨 건 다름아닌 ‘우정’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이전의 사회주의는 ‘근대적’ 주체를 생산해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한치도 다르지 않았기에 붕괴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푸코와 들뢰즈였다고 이진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근대를 뛰어넘을 것인가. 그는 이에 대해 ‘코뮌주의를 통해, 우정을 제일 가치로 여기는, 일상의 혁명을 통해’라고 답한다. 물론 이진경이 말하는 코뮌주의는 경제적 개념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는 그에게 이런 코뮌주의적 이상이 생활로, 실천으로 ‘살아지는’ 공간이다.

    이진경의 ‘코뮤니즘’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외부’다. 일상과 싸우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해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해도 그를 진정 진보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뭘 공부하고 어디서 활동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다.”

    근대인의 삶을 바꾸는 것은 주의나 강령이 아니다. 각자가 자본주의의 ‘외부’를 꿈꾸며 자유의 공간을 넓혀나갈 때,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 자체에 느슨한 구멍을 내는 현재진행형의 ‘탈주’를 거듭할 때에야 비로소 세계는 바뀔 수 있다고 이진경은 확신한다.

    [동·서양 경제 허무는 철학자]이정우(철학아카데미 원장)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
    대학로에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가 있다면 인사동엔 ‘철학아카데미’가 있다. 올해로 4년째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맡고 있는 이정우는 1959년 충북 영동 출생. 서울대 섬유고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전공을 바꿔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미셸 푸코의 담론공간 개념과 주체의 문제’로 박사논문을 쓴 후 여느 인문학 박사들과 마찬가지로 7∼8년간 시간강사 생활을 하다 1995년 가을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임용된다.

    하지만 만 3년을 채운 1998년 그는 학교를 나왔다. 소위 ‘선망의 대상’인 교수직을 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갔다.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에서의 불편함 같은 것들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자유로운 ‘가로지르기’를 꿈꾸는 그에게 코드화된 제도권에 갇혀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철학아카데미에 대한 구상은 없었다. 우선 학교 밖으로 나오는 일이 급했다.

    2000년 봄 뜻이 맞는 몇 명과 함께 인사동에 철학아카데미를 열었다. 철학아카데미의 모토는 시민교육기관(대중성), 철학연구집단(전문성), 사회참여 등 3가지다. 수강생들이 몰릴 땐 한 학기에 500명 이상이 강의실을 꽉 메우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월드컵 이후 시민과 학생의 수강 열의가 한풀 꺾여 한창 피어오르던 시기에 비해서는 인원이 좀 줄었다고 한다. 새로운 연구풍토 조성을 위해서는 강의 외에도 세미나, 학회, 잡지가 필요하다. 철학아카데미는 이미 두 번의 학회를 통해 성과물을 얻었다.

    철학아카데미의 연구풍토를 이정우는 크게 두 가지로 소개한다. 하나는 동양의 기학(氣學)과 노장사상(道家)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가장 활발히 소개되고 논의되는 현대사상들이다. 이정우에겐 흔히 ‘동서양 철학의 접맥’이란 레테르가 붙곤 한다. 하지만 그는 ‘접맥’이란 표현 속에 이미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서로 다른 둘을 합쳐보자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접맥’이라든가 ‘접합’ 같은 개념 자체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그가 주장하는 자유로운 ‘가로지르기’를 위해서는 코드화된 이분법적 사고를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이정우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학술 잡지 ‘아카필로’를 복간하는 일. 2000년 11월 격월간 학술 서평지로 출발한 ‘아카필로’는 재정적 문제로 인해 7호로 중단됐다. 복간되는 ‘아카필로’는 발행주기가 격월간에서 반년간으로 바뀌고 내용도 철학서적들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 중심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잡지문화가 죽었다. 예전엔 학술, 문화를 이끌어나갔다. 영상매체의 점유율이 아무리 높아진다 하더라도, 학술은 역시 잡지라는 형식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정우의 말이다.

    철학전문대학원 개설 구상

    이처럼 소위 ‘경계 허물기’ 또는 ‘가로지르기’의 철학적 성과가 아마추어리즘으로 폄하되는 사정에 대해 이정우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미 자신은 그런 점들을 소화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소화는 ‘과감한 포기’라는 말과 통한다. ‘소화’라는 말에는, 같은 철학 전공자간에도 서로 ‘코드’가 다르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제도권 학문의 풍토에 처음엔 갑갑해하기도 하고 이를 바꿔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지만 개인적 노력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절감했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 그럼 정말 포기한 것이냐고 묻자 “포기를 한 거다. 부질없는 짓을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찾아나선 것”이라 답한다.

    그렇지만 깨끗한 포기를 절망이나 푸념과 혼동해선 안 된다. 이정우는 상황이 결코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몇 사람의 고독한 행보로 현실을 바꿀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한결 나아졌기 때문이다. 기존의 제도권 시스템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이 제도권 안팎을 막론하고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정우는 자신을 ‘재야’라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또한 사람을 공간적으로 규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제도권 안의 교수들 중에도 의식 있는 사람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밖에 있다고 해서 모두 의식이 투철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자기 옆의 동료나 한국의 사정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독일에 관심을 집중하고, 프랑스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또 프랑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정우는 철학전문대학원을 구상하고 있다. 물론 확실한(!) 스폰서가 나타나야 하겠지만. 현재의 철학아카데미를 2원구조로 재편해 한 쪽에선 시민들을 위한 교양교육-지금보다 더 쉬운 대중강좌-을 담당하고 다른 한쪽은 인재를 양성하는 철학전문대학원으로 꾸려갔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더불어 이정우는 제도권 밖 연구공간들의 연대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서가 내지 도서관 건립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아직까지는 분야와 관심사가 다른 데다 서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구체적 연대가 잘 이뤄지지 않고 않지만 공동도서관 설립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틈새 학문’ 공략하는‘재야 고수’ 列傳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1975년 종교학과에 입학한 장석만은 ‘지양’이란 서울대 인문대 서클의 3대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반정부투쟁을 위해 공부를 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1977년 12월 ‘사회대 심포지엄’ 사건으로 강제징집된 그는 신병을 받는 부대가 해병대밖에 없었던 까닭에 해병대에 입대한다. 안 그래도 좀 ‘튀는’ 장석만의 이력에 ‘해병대 출신’이란 결정적 항목이 들어가게 된 내력이다.

    1980년 3학년으로 복학한 장석만은 학교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공부하는 것도 운동의 한 영역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장석만은 종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1992년 ‘개항기 한국사회의 ‘종교’ 개념 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에서 1997년 사이, 장석만은 미국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미국과 캐나다에 머문다. 그즈음 독일 튀빙겐대에 자리가 나 거기 눌러앉을 뻔했으나, 외국어로는 평생 자신의 사유를 자유롭게 풀어낼 수 없으리라는 걸 결정적인 순간에 깨닫고 귀국했다.

    근대성과의 씨름이라는 장석만의 긴 행로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시작됐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공부보다는 긴 호흡과 넓고 깊은 시야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라 여겼던 그에게 등대가 돼준 것은 미셸 푸코였다. 개념이나 담론의 지층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자명한 것의 자명하지 않음을 폭로하는 계보학적 방법론은, 수탈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다른 관점으로 한국의 근대를 바라보게 했다. 하지만 ‘종교’라는 개념을 ‘이미-거기’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그것의 형성과정 자체를 문제삼은 그의 논문이 당시 종교학과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그의 사유가 ‘이해받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장석만이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전신인 한국종교연구회 설립(1987)을 주도한 것도 대학원의 일반적 분위기가 이처럼 절망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때 이미 과정을 마친 학위소지자들이 취직을 하지 못하는 ‘적체’가 시작됐고, 대학원 내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서로 지적 자극을 주고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일단 조직이 결성되자 제도권의 탄압이 시작됐지만 오히려 그런 자극이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이 하는 계기가 됐다고 장석만은 말한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는 최근 사단법인, 즉 하나의 제도가 됨으로써 변신을 꾀했다. 이는 이 연구소가 더 이상 조직(단체)의 존폐 문제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 힘을 바탕으로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들이 진행돼야 할 것이다.

    공부가 윤리적 실천이자 삶 자체

    이쯤되면 학자로서의 장석만은 정말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에 관심이 없는 걸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활용하기 나름인 듯합니다. 이리저리 바쁜 삶에서 어떻게 자양분을 얻을 것인지가 관건이지요.”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는가 아닌가는 그의 삶에 변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소모적이냐 생산적이냐는 ‘일’이 아닌 ‘사람’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리라.

    장석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돈은 못 벌면 안 쓰면 되는 것이라면서. 그렇다면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질문하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그는 그것이 잘못 제기된 질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물음은 ‘인간은 모두 한 종류다’라는 식의 생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직업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근대인의 삶이 이런 거라면 장석만의 삶 앞에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하지만 수식어 따위는 필요없다. 그는 ‘그저’ 공부를 삶의 행로와 연결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공부가 윤리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이 학자로서의 신념이자 생활인으로서의 지혜인 장석만에게 ‘공부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정확히 같은 질문이다.

    근대라는 시스템 하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을 허물어뜨리고 낯설게 만드는 것, 이제껏 자명하고 절대적인 지위를 누려온 것들을 사상누각 신세로 떨어뜨리는 것. 장석만의 문제의식은 일목요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불안에 빠뜨리게 되는 건 아닐까?

    장석만은 이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흔들리는 지반 위에서 겨우 무엇이 문제인지 어렴풋이 아는 상태로 서 있는 것.” 이런 장석만의 삶과 근대성이란 화두는 평행선을 긋는다. 평행선은 결코 헤어지지 못한다.

    위에 언급한 7명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달라진 지식 생산의 조건이 이들에 의해 어떻게 새로운 실천의 토양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앎과 삶의 합일-아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알기-을 추구하는 것은 실존적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든 이들의 바람이다. 우리가 만난 이들은 그 길에서 용맹정진하는 7가지 탁월한 방법을 보여준다. 독자들이 이들의 앎과 삶을 만나는 과정에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는 행운이 찾아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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